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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3화 (293/328)

살인의 기억 293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7)

강북구 우이동 강혁 아저씨의 비밀 수사 아지트.

나는 철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앞으로 여기 들락거리게 될 테니 다들 번호 외워놔요. 앞에 거는 #890310*이고, 뒤에 문은 #013098*입니다.”

이중 철문을 열고 사무실 앞에 서자 관우가 맨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간다. 모르긴 해도 안에 있는 방대한 수사자료에 감탄부터 나올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관우는 휘파람을 불며 발을 들였다가 멈칫하더니 굳은 자세로 경례를 한다.

“충! 성!”

응? 안에 아저씨가 계신가? 오진규와 연주가 관우 목소리를 듣고 급히 들어가 경례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굳어 있는 세 사람 뒤에서 고개를 빼 보니 소파에 앉은 강혁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계신 것이 보인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청에 계실 시간 아닙니까?”

강혁 아저씨가 씩 웃으며 신문을 편다.

“내가 청장인데 누가 뭐라고 할 거냐? 아니꼬우면 너희도 청장 하든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는 내 뒤에 선 팀원들을 힐끔 보며 눈짓한다.

“까발렸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내일모레 환갑인 양반이 까발렸냐 라는 말이 나옵니까? 중학생도 아니고.”

“뭐 인마. 내 말투가 원래 이런데.”

“아 좀, 체통 좀 지켜요.”

“나 그런 거 안 키워, 인마.”

우리 둘의 대화를 들으며 실실 웃는 세 사람. 앞에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경찰의 정점에 서 있는 청장이지만 워낙 고시원 뒤 포장마차에서 자주 술을 마셔서 그런지 다들 크게 불편한 기색들이 없다.

아저씨는 동네 복덕방 아저씨처럼 엉덩이를 움직여 소파에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 앉아, 다리 아프게 왜 서 있어.”

팀원들이 모두 앉자 아저씨는 내게 브리핑을 하라는 듯 눈짓을 한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지금껏 수사했던 내용들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브리핑은 순조롭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오진규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하나은…… 아니, 과장님의 어머님께서 성당에 아기를 맡겼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자택에 있다가 밤에 도주해 성당 앞에 아이를 맡겨두고 다시 도주했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이후에 실종되었고 얼마 전에 백골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팩트로 볼 수 있지만 앞의 내용은 추정 아닙니까?”

“…….”

관우도 손을 든다.

“대구 금은방에 있는 여인숙은 어떻게 알고 찾아가신 겁니까?”

연주도 궁금한 점이 있는지 손을 든다.

“저도 있는데. 여인숙에서 전화를 건 아버님이 밖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어머님과 통화 중에 변을 당했다고 하셨는데. 당시 해당 지역에 CCTV가 있었나요? 아니면 통화기록이라도 남아 있습니까?”

세 명이 던진 질문에 단 한 가지도 답을 해줄 수가 없었던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는 내 눈빛을 받으시고는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일단 조용. 질문은 브리핑이 끝나고 난 뒤에 한꺼번에 받는다.”

단순히 시간을 끌어주시려는 걸까? 그사이에 변명을 생각해 내라고? 하지만 이걸 어떤 변명으로 얼버무리지?

나는 잠시 입맛을 다신 후 끝까지 브리핑을 진행했다. 현재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나열하고 나자, 오진규가 팔짱을 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건의 범인이 미카엘 신부라면 그가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도중이거나, 끝난 직후가 되겠군요.”

연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심쩍게 끝난 일가족 몰살 사건의 생존자가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살인을 했다……. 단양에 부임 후 부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진수를 살인이라는 수단으로 구해주었다……. 말이 앞뒤는 맞는데.”

관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일단 정황증거 말고는 없네요. 하긴 그러니 아직 못 잡은 것이겠지만.”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말했다.

“관우 말이 맞아. 현재까지 증거는 없다.”

그때 강혁 아저씨가 일어난다. 청장이 일어나 그런지 모두의 시선이 아저씨에게 집중된다.

“증거는 없다. 정황증거뿐이지. 문제는 그런 정황증거마저도 도경이가 최근에 밝혀낸 거다. 미카엘 신부라는 용의자가 나온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이란 뜻이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와 꽂힌다. 다시 아까 하다만 질문들이 떠오르는 얼굴들이다. 아저씨는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현도경.”

“예.”

“여기 이 새끼들. 전부 다 네 식구들 아니냐?”

“…….”

“솔직히 말해봐. 현장 나가서 누군가에게 네 등을 맡겨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여기 애들 못 믿냐?”

“…….”

나는 고개를 돌려 날 빤히 보고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믿을 수 있습니다.”

강혁 아저씨가 천천히 걸어 관우 앞에 선 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날 바라본다.

“네게 이런 말 묻기는 좀 미안하네. 하지만 예시를 들어 설명할 게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해라.”

아저씨가 관우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다들 도경이 녀석 가족이 없는 건 알지?”

세 사람이 내 눈치를 본다. 청장의 질문에도 대번에 답을 하지 못하는 세 사람.

강혁 아저씨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봐라, 이 새끼들. 감히 청장이 질문했는데 씹는 놈들이다.”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친다.

“왜 저러겠냐?”

“…….”

나는 다시 한번 내 팀원들을 보았다. 청장 입에서 자기 말을 씹는다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누구 한 명 말을 더듬으며 변명하는 사람이 없다. 그건 같은 질문을 또 받는다 해도 같은 대응을 하겠다는 뜻이다.

“제가 상처받을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래, 네놈 상처받을까 무서워 청장 질문도 씹는 놈들이 이놈들이다 이거야, 이놈아. 이 새끼들이 네 식구가 아니면 누가 가족이겠냐?”

맞는 말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걸까?

나는 숨은 진위를 확인하려 아저씨 눈빛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눈빛으로 날 보며 미소 짓는 아저씨.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아저씨가 입에 건 미소에 숨겨진 말을 알아챘다.

“…….”

나는 팀원들과 아저씨를 번갈아 보았다. 자기가 숨기라고 해놓고 이제 와 이런 자리에서 준비도 없이 밝히게 하다니.

나는 아저씨에게 원망 섞인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아저씨는 싱글싱글 웃고만 계신다.

한숨을 쉰 나는 세 사람 앞에 서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허리를 숙이는 내 덕에 놀란 팀원들이 벌떡 일어난다.

“과장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고개 드세요, 과장님. 무슨 일입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팀원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팀에 제일 늦게 합류했지만 뛰어난 직감과 경험으로 오히려 날 이끌어주던 때도 많았던 오진규.

번뜩이는 천재성으로 꼭 필요할 때 한 건씩 해주는 관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주는 믿음직한 연주.

나는 세 사람과 한 번씩 눈빛을 교환한 뒤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을 속였습니다.”

오진규는 놀란 얼굴이 되었고, 관우와 연주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다시 한번 세 사람과 눈빛을 교환한 뒤 말했다.

“그걸 처음 본 건 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여덟 살 때. 학교를 다녀오던 길에 건널목에서 처음 봤습니다.”

나는 나직한 어조로 나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나는 철없는 행동으로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내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눈과 귀를 닫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습니다.”

멍하게 내 말을 듣고 있던 세 사람 중 관우의 눈이 반짝인다. 녀석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외쳤다.

“정령! 정령 계약자 맞죠? 그것들이란 게 정령 맞죠? 어느 원소 계열 녀석과 계약하신 겁니까? 저도 보여주실 수 있어요?”

연주가 무지막지한 강도로 녀석의 뒤통수를 갈긴다.

“닥쳐, 이 애니 오타쿠 새끼야!”

오진규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관우의 말은 헛소리였지만 나는 지금 녀석에게 고맙다.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가 상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굴러다니는 관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정령 계약자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없는 능력이 있다.”

한심한 얼굴을 하던 연주와 오진규의 표정이 굳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관우가 고개를 번쩍 든다.

“무슨…… 능력이요?”

나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 다시 강혁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친 뒤 고개를 끄덕인다. 이 녀석들은 믿어도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다시 세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진실을 알려줄 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봅니다.”

사무실에 적막이 흐른다. 다들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하, 나라도 못 믿겠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겠지. 뭐 그래도 괜찮다. 이제 내가 읽은 기억에 대해 변명 없이 말할 수 있고, 그것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내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될 테니까. 당장 믿어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세 사람의 반응을 보고 강혁 아저씨 쪽을 확인했다. 아저씨는 내게 윙크를 하며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 진짜 잘한 선택이었을까?

그때 연주에게 뒤통수를 맞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관우가 부스스 일어나며 뒤통수를 만진다.

“역시 슈퍼 히어로가 맞았어. 내가 처음부터 의심했지. 역시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응? 저 녀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관우가 연주를 째려보며 말했다.

“내 말 맞지? 아, 쫌 살살 때리지, 개 아프잖아.”

연주가 날 가만히 바라본다. 관우가 의심했다는 게 무엇이었을까?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다 중얼거린다.

“음…… 가끔 정신 잃었다가 깨어나며 비틀거린 그때…… 그게 기억을 읽었던 때라는 건데.”

역시 저 아저씨는 날카롭다. 바로 인과 관계까지 파고들어 버리네.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여주 사건 때 살해당한 피해자 차 속에서도 그랬어요. 그리고 바로 그림을 그려 소금 공장 내부를 그렸고.”

그런 일이 있었지. 오진규가 발을 달달 떨며 말했다.

“예전에 왜 그 새끼 있잖아. 붕어빵 장사 하다 건강원에서 사람 죽인 놈. 그때 뱀 보다가 갑자기 어지러워했었어. 그리고 나서는 그 새끼가 계속 사람을 죽이러 다닐 거라며 거리를 뛰어다녔지.”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부 살인사건 때도 배 위에서 라면 먹다 갑자기 그물에 걸려 올라온 카메라를 검사해 보라고 했어요. 거기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고. 내가 그때부터 의심스러웠다니까?”

관우가 연주를 몸으로 툭 밀며 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연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번엔 맞혔네. 아씨, 짜증 나. 평생 자랑할 거 아냐?”

“히히, 그래. 자손만대에 자랑할 거다.”

분위기가 왜 이래? 설마 내 말을 한 번에 믿어버리는 거야? 이게 정말 그리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야? 오히려 말을 한 내 쪽이 더 당황스럽다.

“다들…… 믿어주는 겁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오진규가 엄지를 들며 말했다.

“이제 과장님이 사람 같아 보이네요. 전에는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아서 좀 무서웠는데 이제 좀 안심입니다.”

연주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관우와 이야기 많이 했었어요. 이제 설명이 좀 되네요.”

관우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려 준다.

“슈퍼 히어로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는 법. 이제부턴 저도 돕겠습니다, 영웅이시여.”

나는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을 보았다. 그때 강혁 아저씨가 박수를 한번 치며 웃는다.

“거봐, 새끼야. 식구라는 게 원래 이런 거다.”

“…….”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강혁 아저씨는 이번에도 옳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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