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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7화 (297/328)

살인의 기억 297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21)

나는 플래시로 공동 안쪽을 비췄다.

공동의 깊이는 약 13m. 위에서 아래로 판 깊이가 아니라 바닥에서 평행한 높이로 파인 공간이다.

플래시의 동그란 불빛이 어두컴컴한 공동의 벽 끝에 닿는 순간 나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뾰족한 돌멩이 끝에 붉은 흙이 묻어 있다. 그리고 벽에 돌로 새긴 성경 구절이 보인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는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은 후, 다시 플래시로 글을 비췄다.

“장진수가 남긴 글귀다.”

나는 이 구절을 알고 있다. 정확한 장과 절을 암기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히브리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수녀님이 악의 유혹이 다가올 때는 이 구절을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라 타이르시곤 했었다. 나는 플래시를 들고 글을 비춰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장진수. 정말 후회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 연쇄살인마 장진수가?

그래, 나는 놈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인정이 아닌, 후회하는 녀석에 대한 연민이 들까 봐. 그건 놈에게 죽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유가족에게 죄가 된다.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 인정이란, 놈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놈이 지은 죄를 사해서는 안 된다.

놈이 이곳에 왔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놈은 미카엘 신부의 행적을 쫓기 위해 단양에 내려와 수녀님을 만났다. 그때 여기도 함께 방문했을 확률이 높다.

나는 플래시로 공동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곳도 놈이 다녀간 곳 중 하나라면 여기 일기장을 숨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혹시 흙을 파고 매장했을 수도 있기에 흙의 색이 주변과 다른 곳들을 살폈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다.

그리 깊지 않은 공동을 꼼꼼하게 살피느라 한 시간이 넘은 후에야 밖으로 나온 나는 품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확인했다.

공동 내부는 전화가 터지지 않았는지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는 것이 보이고 발신자에 관우 이름이 떠 있다.

공동 밖으로 나와 언덕 위까지 올라온 나는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관우야.”

-과장님, 무슨 일 있어요? 전화가 안 되던데.

“아, 미안. 무슨 일이야?”

-CCTV 확인 도중, 장진수 놈의 동선 하나가 더 나왔습니다.

놈의 동선. 분명 그 안에 일기장을 숨긴 장소가 있다.

“어디야?”

-단양입니다.

나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놈이 단양에 왔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문제는 관우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녀석이 동선에 대해 언급하며 단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카엘 신부를 쫓기 위한 동선 외에 다른 동선이 더 나왔다는 뜻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장소가 떠올랐다.

“혹시 장진수 본가야?”

-예, 맞습니다.

“…….”

본가. 놈의 가족이 함께 살던 집. 놈에게는 그 집에 대한 나쁜 기억밖에 없다. 그런 집에 왜 다시 갔을까? 예전처럼 자기 부모의 시신을 감상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목적으로 다시 찾은 걸까?

-과장님 지금 단양이시니 한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아, 그리고 장진수 1차 사건 때 시신 무더기로 나왔던 천주교 성지에서 놈의 필적으로 보이는 글귀가 나왔다.”

-예?

“뾰족한 돌멩이로 벽에 새긴 건데 사진 보낼 테니까 확인하고, 인근 KCSI 출동시켜서 공동 내부 글귀 보존하라고 지시해.”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한번 공동을 노려본 뒤 차가 있는 농가까지 걸어갔다.

바닥에 누구 것인지 모를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혀 있다. 이 많은 발자국 중에 장진수 놈의 발자국도 있겠지? 여길 찾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심코 밟은 발자국이 연쇄살인마의 발자국이란 걸 알까?

무심코 든 생각에 난 실소를 머금었다. 요즘 사람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아마 이곳에 장진수 발자국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돋보기를 들고 찾아다니거나, 혹은 모든 발자국을 다 밟고 다니는 영상을 찍으며 별 풍선 구걸을 하겠지.

나는 농가에 주차해 둔 차를 타고 놈의 본가로 향했다.

본가는 그리 멀지 않아 차로 7분 정도 걸린다. 주변에 민가가 없는 놈의 본가 앞에 차를 대고 내리자, 집 뒤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멈칫하며 귀를 기울였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저기 있다. 부모는 죽고, 유일한 아들은 탈옥하다 총에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빈집. 그 집의 뒤편에 누군가 있는 거다.

나는 자동차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열어두고 총을 들었다. 지하실이 있던 장독대를 힐끔 보니 폴리스라인이 찢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총을 겨누고 집 쪽으로 서서히 접근했다.

누구일까? 미카엘 신부는 지금 쌍문 성당에 있고, 장진수는 병원에 있다. 둘 모두 이동 시 내게 보고가 들어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 둘은 아니란 뜻이다.

총을 겨누고 서서히 접근하고 있는 바로 그때 내 귀로 허탈한 소리가 들려온다.

“와, 진짜 무섭네요. 구독자 여러분.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자 요즘 가장 유명한 탈옥수 장진수가 살던 본가입니다. 저 진짜 무서워요, 라이브 방송한다고 괜히 혼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네? 맞아요. 장진수는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기 엄청 무섭다니까? 네? 네. 집 안으로는 못 들어가요. 저기 들어가면 저 진짜 구속됩니다. 에이, 폴리스라인은 살짝 찢은 것뿐이죠. 들어가진 않았잖아요. 저 그렇게 간 큰 사람 아닙니다.”

앳된 여성의 목소리. 나는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탁 풀리며 허탈하게 총구를 내렸다.

“하…… 씨X.”

도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나는 집 뒤로 저벅저벅 걸어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회색 후드 티셔츠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1인용 텐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가 라면을 끓이며 핸드폰으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이리저리 비추며 주변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이 장진수의 본가가 맞는지 묻는 구독자들에게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 맞아요. 저 원래 단양 살다 서울로 이사 간 거라, 뉴스에서 이 집 보자마자 알았어요. 예? 에이. 단양에 집이 몇 채인데 그걸 다 알아요? 여긴 제가 학교 다닐 때 자전거로 항상 지나다니던 곳이라 알아본 거지.”

솔직한 마음으로 당장 달려가 끓이던 라면 냄비를 엎어버린 후 핸드폰을 붙잡고 구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이게 정말 재미있냐고. 사람 죽은 게 너희에게는 재밋거리이냐고.

물론 그 생각은 마음속으로만 해야 된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이가 몇 명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저 여성이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찍어버리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내 얼굴이 팔리게 된다. 그럼 수사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나는 벽 뒤에 숨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거기.”

“힉!!!”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난다. 슬쩍 눈을 내밀어 보니 놀란 여성이 라면 냄비를 엎으며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잘됐네, 확 엎어버리고 싶었는데.

넘어진 여자가 발발 떨며 외친다.

“누, 누구세요! 저 지금 라이브 방송 중이에요! 여차하면 신고합니다!”

하, 신고해라. 하면 네가 잡혀가나 내가 잡혀가나 내기할래? 나는 한숨을 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

“경찰입니다. 당신은 출입금지 구역에 무단 침입했습니다. 즉시 방송 중지시키고 퇴거하세요.”

“…….”

여성은 상황을 파악하는지 조용하다. 슬쩍 눈을 내미니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하는 채팅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여성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친다.

“경찰인데 왜 숨어요? 나와요!”

“일선 경찰이라 방송에 얼굴이 나가면 곤란합니다. 방송을 끄시면 나가겠습니다.”

“…….”

여성은 다시 채팅을 확인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 소리를 지른다.

“방송 끄고 나서 아저씨가 날 해칠지 어떻게 알아요?”

“…….”

하, 이제 날 살인범으로 모는 거냐? 너무 한심한 상황이라 한숨도 안 나온다.

“그럼 안심하시게 인근 지구대 부르겠습니다.”

“…….”

“그럼 됐죠?”

“…….”

나는 벽 뒤에 숨은 채로 전화기만 빼서 흔들었다. 그러자 여성이 급히 소리쳤다.

“아뇨! 경찰은 안 돼요!”

그래, 안 되겠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걸리면 넌 최소 벌금 몇백은 때려 맞을 테니까. 오늘 번 후원금 다 날리게 될 거다.

“그럼 어쩝니까?”

“시, 신분증! 그거 보여주세요!”

“핸드폰 카메라 다른 곳으로 돌려요.”

“네!”

“좀 멀리 떨어뜨려 놓으시고.”

“네!”

여성은 핸드폰 카메라를 집 방향으로 바꾸어두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밀어놓는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달려들면 얼마든 내 얼굴을 찍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나는 눈만 내밀고 여성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다 신분증을 꺼내 고개와 함께 내밀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머, 멀어서 안 보이는데! 소속과 계급 말해주세요.”

지랄. 핸드폰에 마이크 있는 거 내가 모를 것 같냐? 나는 양손을 들고 핸드폰을 눈짓했다.

“방송 중인 거 압니다.”

“아!”

여성이 핸드폰 쪽으로 달려간다. 혹시 모를 상황이 있을 수 있으므로 나는 다시 벽 뒤로 숨었다.

여성이 구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들려온다.

“여러분, 잠깐 마이크 좀 끌게요. 혹시 제가 5분 안에 안 돌아오면 신고 좀 해주세요. 알겠죠? 꼭 해주세요!”

여성이 마이크를 끈 뒤 외친다.

“음향 장치 오프 시켰어요!”

나는 혹시라도 여성이 장난을 쳤을 수 있으므로 고개를 내밀고 핸드폰 위치를 확인 후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날렸다. 잘못 날아간 명함이 그녀가 있는 위치보다 조금 뒤쪽에 떨어진다.

여성이 얼른 가서 명함을 주워 본 뒤 눈을 크게 뜬다.

“구, 구, 국가수사본부?”

“알았으면 방송 끄시죠. 아, 혹시라도 제 명함이 방송에 나가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현장 체포할 겁니다.”

“아, 아, 알겠습니다!”

여성은 다시 마이크를 켜고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보이게 한 뒤 말했다.

“여러분, 아쉽게도 오늘 방송은 여기서 종료해야 될 것 같아요. 네? 맞아요. 명함 확인했고 신분증도 확인했어요. 진짜 경찰 맞는 거 같은데 저 어떻게 되는 거죠? 구독자 오빠 중에 변호사님 계시지 않나? 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알려줘요. 일단 지금은 꺼야 되니까 나중에 제 메일로 좀 보내주세요. 그럼 여러분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꼭 부탁드립니다! 뿅!”

볼에 바람을 넣고 연신 브이를 그리며 애교를 부리는 여성 BJ의 모습을 바라본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 씨X…… 한심해서 욕도 안 나오네 정말.

방송을 끄자 여성이 머뭇거리며 다가온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내 눈치를 보는 여성이 말했다.

“시, 신분증 다시 좀.”

“…….”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신분증을 놓았다.

“장독대 쪽 폴리스라인. 당신이 훼손한 겁니까?”

“…….”

“대답?”

“네…….”

“위법행위라는 건 아시죠?”

“…….”

“인근 지구대에 연락할 테니 대기하세요.”

“저, 저기 아저씨!”

“아, 할 말 있으시면 지구대 가신 후에 그쪽 순경들에게 하세요.”

내가 핸드폰을 들고 지구대에 연락하려 하자 여성이 내 팔에 매달린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 아저씨! 나랑 거래! 거래합시다, 예?”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인상을 썼다.

“내가 당신과 거래할 일이 뭐 있습니까?”

여성이 다시 내 팔에 매달리며 외쳤다.

“나 원래 여기 살았어요! 장진수 오빠, 어릴 때 자주 봤다고요!”

그녀를 밀치고 전화를 걸려던 나는 멈칫했다.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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