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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8화 (298/328)

살인의 기억 298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22)

해가 완전히 넘어가 사위가 어두워진 시간. 나는 조금 전에 만난 여성 BJ와 함께 텐트 앞 캠핑 의자에 앉았다.

내게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건넨 그녀가 말했다.

“뚱치 유미.”

나는 커피 잔을 받으며 물었다.

“예?”

“제 이름이요.”

“하…… 본명 말씀하세요.”

“아, 정유미. 뚱치 유미 채널 구독해 주실래요?”

이 사람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나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정유미가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핸드폰을 넣으려다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액정을 보았다. 관우에게 온 문자다.

[과장님, CCTV 분석 결과 장진수 놈이 단양 상진 성당에 다녀온 이후에 본가에 들른 것으로 보입니다. 본가 앞 200M 지점에 있는 방범용 CCTV에 찍혔는데 머무른 시간은 약 30분입니다.]

30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놈이 여기서 뭘 한 걸까? 나는 짧게 알겠다는 답을 한 뒤 전화기를 품에 넣고 정유미를 보았다.

“여기 살았다고요?”

정유미가 얼른 일어나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네, 저쪽이 우리 집이었어요.”

장진수 본가를 기점으로 다시 반대 방향을 가리킨 정유미가 말했다.

“학교는 저쪽이었어요. 단양 제일 여고.”

아까 얼핏 자전거를 타고 매일 여길 지나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정유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분증 봤죠?”

“네…….”

“저 보통 강력계 형사 아닙니다. 소속 보면 각 나오죠?”

침을 꿀꺽 삼킨 정유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말하면 수사방해, 공무집행방해, 출입금지 구역 무단 침입, 중요 증거물 훼손까지 전부 다 걸고넘어질 겁니다.”

“…….”

정유미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 되어 있다. 이렇게 간 작은 여자가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개인 방송도 좋지만 살인범이 살던 집까지 무단 침입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구독자 수에 눈이 멀어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네…….”

“진술 제대로 하면 넘어가 줄 테니까 너무 겁먹지 마시고.”

정유미의 눈빛이 다시 밝아진다. 원래 무척 밝은 성격인 모양이다.

“헤! 네! 아는 거 다 말씀드릴게요!”

나는 잔디밭에 커피 잔을 놓은 후 몸을 내밀었다.

“여기 언제부터 살았어요?”

“여기가 고향인데요.”

“몇 살 때까지 살았어요?”

“고2 때 서울로 전학 갔어요.”

“지금 몇 살인데요?”

“스물넷이요.”

스물넷. 고2면 열여덟. 6년 전까지 여기 살았다는 뜻이다. 장진수 놈이 사건을 일으킨 건 2년 전. 서울에 올라간 건 4년 전. 6년 전에 이곳에 장진수와 정유미가 함께 있었다.

“장진수. 직접 본 적 있어요?”

“많이 봤죠. 맨날 여기 지나가는데.”

장진수는 힘없는 여성을 노렸다. 그런데 매일 이곳을 지나는 여자아이를 그냥 뒀다? 왜 그랬을까? 나는 다시 한번 주택 주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택 주변에는 민가가 없다. 정유미가 집에서 학교에 가는 도중 실종되었다면 반드시 이 집이 수색 포인트가 되었을 것이다.

시신 중 두 구가 보관되어 있던 집이니 당연히 여기서 일을 도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진수는 무척 똑똑한 놈이었으니까.

“당신이 본 놈의 이야기를 해봐요.”

정유미는 낮은 캠핑 의자에 앉아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고 말했다.

“음…… 제가 이 길로 지나다닌 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인데.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녔어요. 이 집에는 항상 사람이 안 보였는데 처음엔 빈집인 줄 알았어요. 근데 어느 날 2층 창문에 누가 서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람이 살긴 사나 보다 했어요.”

“계속하세요.”

“2년 전에 뉴스에서 장진수 얼굴 나왔을 때 저 진짜 놀라 자빠질 뻔했어요. 학교 다닐 때 가끔 보던 남자 얼굴이었으니까. 저도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밤에 잠도 안 오더라고요.”

그랬을 거다. 사실 이 여자는 진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뉴스에서 본 얼굴로 바로 기억해 낼 정도면 가까이에서 본 적도 있습니까?”

“네, 있어요.”

“언제였습니까?”

“어…… 그러니까 몇 번 되는데…… 여기 말고 요 뒤에. 그러니까 건물 뒤에 보면 장독대 있죠?”

“네.”

“거기 근처에서 장독대를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었어요. 자전거 타고 지나다가 눈 마주쳤는데 하던 일을 멈추고 절 엄청 노려보더라고요.”

그랬겠지. 거기 시신을 숨겨놓았으니까. 정유미가 팔을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와, 말하고 나니 소름 돋네. 뉴스에서 봤는데 저 장독대 밑에 시체가 있었죠? 와, 나 좀 더 일찍 봤거나 늦게 봤으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요점만 간단히.”

정유미가 입술을 삐죽 내민 후 다시 말을 잇는다.

“뭔가 음침한 사람이었어요. 눈 마주치고 저도 움찔 놀라서 나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는데 빤히 절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전 머뭇거리다 그냥 갔고요. 그날 집에 가서 아빠한테 말했더니 아빠 말이 그 집에 원래 되게 성질 고약한 아저씨가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안 보인다고 했어요. 아들은 있는데 부모는 안 보인다면서 맨날 애 때리더니 이젠 애만 두고 다른 곳에 가서 사는 것 같다고. 콩가루 집안이라고…….”

남의 가정사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정유미도 자기 아버지의 언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말끝을 흐린다.

잠시 내 눈치를 보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저기 숲 보이세요?”

“어디요?”

“저기.”

정유미가 가리키는 곳. 본가에서 정유미의 학교 방향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이 보인다.

“예, 보입니다.”

“학교 갈 때 제일 빠른 곳이 저 언덕 넘어가는 건데. 빙 돌아가면 15분 넘게 걸리거든요. 저거 넘어가면 5분이면 가요.”

“그런데요?”

“저기서도 그 사람 본 적 있어요.”

나는 멈칫하며 다시 숲을 보았다.

“저기에서 본 적이 있다고요?”

“네.”

“뭘 했는지는 모르고?”

“네,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때 저 넘어졌어요.”

놈이 저 숲에서 나왔다? 저기서 뭘 했을까?

“거기서 마주쳤을 때는 어땠습니까?”

“아, 생각하면 짜증 나요. 사람이 넘어졌는데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무릎 까졌는데도 모르고 얼른 자전거 타고 전력질주로 학교로 갔었어요. 근데 진짜, 노려보는 거 말고는 별 행동 안 해서 어디 신고하기도 그렇고 엄청 답답했어요.”

나는 다시 한번 야트막한 언덕을 노려보았다.

“어디쯤인지 기억할 수 있습니까?”

“어…… 그러니까 언덕길 중간쯤인데.”

“학교 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어느 방향에서 나타났습니까?”

“왼쪽이요.”

살펴볼 가치가 있는 정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유미를 보았다.

“일단 당신을 구속하는 건 보류하죠.”

정유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와! 제가 도움이 된 건가요?”

“그건 아직 모르고.”

“에이.”

“혹시라도 저와 했던 대화가 방송에 나가면 그땐 진짜 구속될 겁니다.”

“네…….”

나는 다시 한번 숲 쪽을 바라보다 본가를 힐끔 보았다.

가만, 정유미는 이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아까 그녀의 아버지가 장진수 부모 이야기도 한 걸 봐서는 그녀도 부모를 마주쳤을 수도 있다는 건데.

“혹시 장진수 부모님,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성질 고약한 아버지라고 표현했던 그 사람은 본 적 없습니까?”

“아뇨, 본 적 없어요. 한 번도.”

“중년 여성도 본 적 없습니까? 장진수 어머니인데.”

“없어요.”

음, 혹시 봤어도 너무 어릴 때 봤으면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캠핑 의자에서 일어났다.

“구속 안 할 테니까 빨리 텐트 접고 여기 뜨세요. 그리고 만에 하나 다시 여기 오시면 그때는 정말 가차 없습니다.”

정유미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앉았던 캠핑 의자를 접는다.

텐트를 치우는 정유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나.

그녀는 내가 자기가 갈 때까지 감시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조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틈틈이 날 힐끔거리며 텐트를 접어 배낭에 넣은 그녀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됐으니까 다시 오지 마세요.”

“네.”

정유미가 여러 번 굽실거리며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돌아 나가다 멈칫한다. 가만히 주택 2층을 올려 보는 정유미.

나는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다 물었다.

“왜 그래요?”

정유미가 다시 나를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얼른 물었다.

“나이가 얼마나 된 사람입니까? 남자? 아니면 여자였습니까?”

“남자요.”

장진수 아버지일까?

“나이는?”

“어…… 남자 나이는 잘 모르는데. 아저씨였어요.”

“장진수 아버지 연령대로 보였습니까?”

정유미가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젓는다. 저게 맞다는 건가, 틀리다는 건가? 나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내 눈빛에 찔끔한 정유미가 얼른 변명한다.

“연령대는 그래 보였는데 그 사람 아버지 아니에요.”

응? 방금 장진수 아버지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지?

“무슨 말입니까, 그게?”

정유미가 손가락으로 2층 창문을 가리켰다.

“요기서 보이는 창문 말고 반대편 창문이요. 그러니까 제가 맨날 지나다니는 길에서 딱 보이는 2층 창문. 거기로 봤어요.”

“장진수 외에 다른 인물 말입니까?”

“네, 그 사람과 장진수가 2층에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어요.”

누구일까? 나는 정유미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놈의 아버지가 아니란 건 어떻게 아십니까?”

정유미가 자기 목을 슬쩍 만진다.

“검은 옷에 목에 흰색 카라를 단 사람. 그거 신부 옷 아닌가요? 신부님은 결혼을 못 하는데 무슨 아들이 있어요. 분명히 사제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어요.”

온몸에 벼락이 치는 느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굳었다.

머릿속으로 미카엘 신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참 예쁜 아이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얼굴도 하얀 것이 나중에 크면 인기가 많겠구나 했다고. 항상 혼자였고, 혼자가 편해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다녔으며 열심히 기도하는 아이였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음, 거기까지 말씀드렸군요.’

‘처음 놈이 성당에 왔을 때 나이가 얼마였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제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혼자 살다 서울에 올라갔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성당에 처음 왔을 때는 놈에게 부모님이 계셨나요?’

‘글쎄요, 토마스의 부모님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카엘 신부는 장진수의 부모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집에 왔었다. 이 집의 2층에서 어린 장진수와 함께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미카엘 신부의 말을 떠올렸다.

‘미카엘아, 미카엘아. 네가 사람들의 구원이 되어라. 나는 그리하기 위해 세상을 만들었고 너희 사제들을 만들었다. 네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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