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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9화 (299/328)

살인의 기억 299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23)

“저기, 저쪽 근처였는데.”

정유미는 놈을 마주쳤던 언덕 숲길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에 두말없이 먼저 언덕으로 걸었다.

경찰과 함께 있으니 지금껏 느꼈던 공포심도 어느 정도 가셨는지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중간에 몇 번 눈치를 보는 것이 혹시 카메라를 켜도 되겠냐 묻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건 허락해 줄 수 없어 의도적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언덕에 나 있는 오솔길.

사실 오솔길이라고 하기도 좀 뭐 하다. 그냥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자연적으로 생긴 산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자전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지반이 단단한 흙길이다.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들이 우거져 있는데 나무가 빽빽하지 않고 듬성듬성 나 있어서 답답한 느낌은 없다.

계속 걷던 정유미가 멈춰 선다. 오래전의 기억이라 잘 생각나지 않는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길 한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고는 눈을 빛낸다.

“여기였어요.”

“확실합니까?”

“네, 넘어졌을 때 저 바위에 제 자전거 옆면이 찍혔어요. 덕분에 엄마한테 잔소리 들었거든요.”

정유미가 길에 서서 왼쪽을 가리킨다.

“저기, 저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왔어요.”

“언제였습니까?”

“네? 아, 그때가 주말에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 가는 길이어서 오후 시간이었는데. 한…… 두 시쯤?”

“시간 말고, 몇 학년 때였습니까?”

“음…… 아!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정확할 거예요. 그해에 여길 떠났거든요.”

정유미가 고2 때. 지금부터 6년 전이고 그때 장진수 놈의 나이는 이십 대 후반. 나는 주머니에서 플래시를 꺼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가보세요.”

정유미는 약간 아쉬운 기색으로 우물쭈물한다.

“저기 안 무서워요? 이제 해도 졌는데 혼자 계시는 것보다는…….”

“됐으니까 가세요.”

“…….”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녀를 쏘아보자, 움찔한 정유미가 천천히 물러난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오늘 저와 나눴던 대화는 방송에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나가면 어떻게 한다고 했죠?”

정유미가 목을 움츠리며 말한다.

“구치소에서 보게 될 거라고…….”

“가보세요.”

“네…….”

정유미는 아쉬운 눈빛을 보내며 뒷걸음질을 치다 계속 노려보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곧 뒤로 돌아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간다.

멀어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충분히 거리가 벌어진 후 오솔길 옆 숲으로 발을 들였다.

바스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난 잡초들이 밟히는 소리. 왠지 스산하다.

놈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는 뭘까? 놈은 살인범이다. 정유미가 놈을 마주쳤을 때는 벌써 일곱 이상을 죽인 시점. 그런 놈이 아무 목적도 없이 여기 왔을 리는 없다. 최악의 경우 여기서 추가 시신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길을 헤맬 염려는 없다. 이곳은 말이 숲이지, 산도 아니고 야트막한 언덕이었으니까. 게다가 떡갈나무도 듬성듬성 있는 곳이라 사방이 훤히 보인다.

“여기서 뭘 했냐, 장진수.”

나는 플래시를 사방으로 비추며 수상한 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바닥을, 나중에는 나무 위를 보았지만 수상해 보이는 것은 없다.

“어디냐, 도대체 어디야.”

혼잣말을 하며 플래시를 비춰보던 나는 한 떡갈나무에 어린이 키만 한 높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뚫은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새가 뚫었거나, 자연적인 구멍 같아 보이는데 위치가 상당히 낮다. 새는 저렇게 낮은 곳에 구멍을 뚫지 않으니 아마 자연적인 구멍인 모양이다.

고작 나무에 뚫린 구멍일 뿐이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악마처럼 보이는 나무.

나는 그 나무 앞에 서서 플래시로 안을 비췄다. 안쪽으로 뚫린 구멍이 아래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죽은 나무인 모양이다. 무성한 이파리를 뽐내고 있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이파리도 없고, 나무 색도 하얗게 죽어 있다.

플래시로 나무 안쪽을 비춰보던 나는 아래까지 닿지 않는 빛 때문에 결국 소매를 걷었다. 안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꽤 오랜 시간 밖에서 플래시를 비춰도 꿈틀거리는 것이 없었으니 위험한 것이 들어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혹시 몰라 라텍스 장갑을 낀 나는 떡갈나무 구멍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구멍이 깊다. 팔을 구부려 안으로 밀어 넣자 성인 기준 팔뚝의 절반 정도가 아래로 들어간다.

손끝에 느껴지는 느낌. 그건 단단하고 빳빳한 느낌의 바닥이다. 손을 휘휘 저어 주변을 만져 보았지만 옆은 나무 벽의 느낌이 난다. 까칠까칠하지 않고 반질반질한 느낌이 나는 것이 누군가 자주 만진 느낌이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허탈한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허공을 쓸어 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나무 벽부터 단단하고 편편한 바닥까지 꼼꼼하게 만져봤지만 물건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닥이 편편하고 단단해?’

그럴 수도 있는 건가? 나무 벽은 반질반질했지만 그렇다고 바닥처럼 편편한 느낌이 아니라 울퉁불퉁하다. 그런데 바닥만 이런 느낌이란 건 이상하다.

나는 손을 꺼내 장갑을 벗은 후 다시 밀어 넣었다. 손끝에 바닥이 닿자 나는 그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가죽.”

가죽의 느낌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물건.

“일기장이다!”

나는 손을 더듬어 가죽의 가장자리를 찾아 손가락을 끼워 넣고 간신히 그것을 세로로 세웠다. 손에서 느껴지는 이 느낌. A5 용지 정도 크기의 가죽 일기장. 분명히 이게 장진수의 일기장이다.

가슴이 뛰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손이 떨린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드디어 내 손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 뒤 세워둔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래 만지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인 검은 가죽 수첩이 내 손에 들려 있다.

나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내고 혹시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다시 한번 구멍에 손을 넣었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울퉁불퉁하고 구멍도 숭숭 뚫려 있는 나무 바닥이 느껴진다.

꼼꼼하게 구석구석을 만져본 나는 일기장을 소중하게 품고 오솔길로 나왔다. 당장 일기장을 펴고 내용을 보고 싶지만 이곳은 너무 어둡다.

또한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기 쉬운 장소이기도 하기에 굳이 여기 서서 내용을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한 행동이다.

언덕길에서 내려와 장진수의 본가에 도착한 나는 지하실로 가는 통로가 있는 장독대 옆 시멘트 세면대 위에 걸터앉았다.

일단 수첩의 겉면을 사진으로 남겨 둔 후 천천히 일기장의 첫 장을 연 나는 이것이 장진수의 일기장임을 직감했다.

나는 즉시 사진을 관우에게 보내며 문자를 남겼다.

[즉시 단양에서 제일 가까운 KCSI 지부에 연락해서 장진수 본가로 대원 보내라고 해. 인근 언덕의 떡갈나무 구덩이에서 놈의 일기장이 나왔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은 후 첫 장에 적힌 놈의 글귀를 플래시로 비추었다.

우리 인생이란 여정의 한가운데서 저는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숲 속은 제 삶의 지름길이 숨겨진 장소입니다.

단테 신곡, 지옥 편 제1곡.

일기장의 가장 첫머리에 쓰여진 글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기장 첫 장에 ‘나의 기억’이나, ‘나의 기록’,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명언을 써놓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시 이놈은 일반인과 다르다. 첫머리부터 섬찟한 느낌이 든다.

나는 멀리 어둡게 보이는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숲이 네 인생의 지름길이 숨겨진 장소였던 거냐, 미친놈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 장을 넘겼다. 꽤 빼곡하게 쓰여져 있는 놈의 일기의 첫 장이 보인다.

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신경질적인 아버지.

알면서 무시하는 어머니.

우울하지 않은 날을 찾는 게 더 쉬운 날들.

우울하지 않은 게 이상한 나의 집.

쿵쾅거리는 발자국

그가 나를 때리러 오는 소리.

불안함에 터져 버린 울음

나의 울부짖음이 들림에도 귀를 막은 나의 어머니.

성 미카엘 대 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 되이 하느님께 청 하오니

그를 감금 하소서.

그리고 천상 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 소서.

아멘.

나는 첫 장의 일기부터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의부에 의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시달리던 시기에 쓴 일기. 자신을 때리는 의부와 아이의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 외면한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기댈 곳은 기도밖에 없었던 아이의 아픔이 느껴지는 고백이다.

“하…….”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연민을 느낄 때가 아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음 장을 넘기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울린다. 나는 전화를 어깨 사이에 끼고 전화를 받았다.

“예.”

-관우에게 연락받았다. 장진수 일기장이 나왔다고?

나는 일기장을 내려놓고 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당연히 관우나 연주일 줄 알았는데 목 과장님 전화였다.

“예, 형님. 맞습니다.”

-단양이라고 했지?

“예.”

-바로 인근 대원들 출동시킬 테니 잠깐 대기해. 나도 내려간다.

“직접 오시게요?”

-그래, 나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대원들 도착할 때까지만 있어. 자세한 발견 장소 설명만 해주고 가.

“알겠습니다.”

-내용 봤냐?

“지금 첫 장 보던 참입니다.”

-후, 그게 만약 살인 일기라면 언론이 또 시끄러워질 거야. 장진수 그놈 그거 아직 병원에 있지?

“예.”

-경비 인력 좀 더 늘려라. 그놈 도주가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가족들이 들이닥칠까 싶어 걱정되네.

“예, 알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수고 많았다.

“제 할 일인데요 뭐.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연주에게 문자로 장진수가 입원한 병실의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다시 무릎 위에 일기장을 올리고 플래시를 입에 물었다.

한밤중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스산한 느낌이 들었지만 사실 시골이라 어두운 것뿐이지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다.

나는 모은 무릎 위에 일기장을 올려둔 후 입에 문 플래시로 일기장을 비추고 다음 장을 넘겼다. 일기는 매일 쓴 것이 아닌지 이틀을 넘어간 13일 목요일의 일기였다.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그는 마치 나의 내면에 꼭꼭 숨겨둔 슬픔을 들여다 보는 듯 했다.

나는 홀린 듯 눈물로 그에게 간청했다.

제발 나를 구해달라고, 나를 수렁에서 건져 달라고.

그는 하느님이 보낸 사자이며, 하늘의 군대를 지휘하는 수장.

나를 구해줄 이는 그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늘 하느님의 사자가 나를 구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의 구렁텅에서 나는 오늘 빠져 나왔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에 털이 삐죽 섰다.

그가 진정 하느님이 나를 구원하시려 보낸 사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카엘. 천사가 나에게로 와 주었다.

그가 오늘 내 원수를 처단하고, 귀머거리를 죽였다.

나는 외로운 자유를 얻었다.

마지막 글귀를 보는 순간 나는 입에 물고 있던 플래시를 툭 떨어뜨렸다.

“미카엘이…… 장진수의 부모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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