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01화 (301/328)

살인의 기억 301화

21. 40년 그리고 35년(1)

장진수의 일기가 사실이라면 미카엘 신부의 부모와 여동생을 죽인 건 신부 본인이다.

물론 당시 그가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알리바이가 있으나,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80년대 초반. 주먹구구식 수사를 하던 시절이니 약간만 머리를 써도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던 시절이다.

당시 형사들이 용의자를 무조건 잡아들여 골방에 가둬놓고 패서 없던 죄도 불게 만들던 시절이라 해도 상대는 사제다. 가톨릭 협회의 보호를 받는 종교 사제에게 함부로 신문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미카엘은 그러한 이점을 활용해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나는 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인생은 과거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지만

전향적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

마음속에 간직한 과거에 대해 더 많은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란 더욱 어렵다.

과거는 우리의 욕망이나 기획에 따라 이용되어야 한다.

과거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 또한 예전에

정해진 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재가공하는 것은 나의 몫이며

나는 나의 과거를 오직 나에게 유용한 방법으로만

이용할 수 있다.

즉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가에 따라 과거의

의미는 달라진다.

세 번째 정화를 한 직후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천사의 처음이 나와 같다면

그에게도 지금의 나처럼

발전하는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 너무나도 완벽한 존재라 나와 같은 심화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읽고 있던 나는 숨을 멈췄다. 또 다른 살인의 기록,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살인의 기록이 이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가를 떨며 다음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천사는 아주 오랫동안 정화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희망이 사라진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욕심과 희망을 비축해 두어라.

내가 낚시를 하지 않을 때는 그물을 고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했다.

얼마나 완벽한 정화를 시행하면 오랜 시간 동안 또 다른 정화를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그래서 물었다.

당신의 손으로 시행한 마지막 정화는 언제였는지.

천사가 내게 말했다.

1989년 3월 10일였노라. 하느님과 가장 먼 곳에 사는 이들의 집과 가까운 곳에서 마지막 정화를 했노라.

나는 마지막 날짜를 보는 순간 굳었다. 1989년 3월 10일. 나의 어머니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바로 그 날이다.

뒤에 아직 보지 못한 많은 글들이 있었지만,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마지막 문구에 시선이 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 * *

쾅!

“장진수 일기장 나왔다며!”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국. 발로 문을 차고 뛰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세 사람이 일어났다.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오진규가 말했다.

“오셨습니까?”

중대범죄 수사과를 찾은 이는 KCSI 목진원이다. 목 과장이 오진규의 어깨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어디 있답니까?”

“단양에서 발견됐습니다.”

오진규가 시계를 힐끔 본 뒤 말했다.

“과장님이 발견하셨고, 한 시간 전에 올라오신다고 전화 왔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목 과장이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40분이다. 바싹 긴장한 얼굴이 된 목 과장에게 관우가 의자를 가져다주자 털썩 주저앉은 그가 말했다.

“내용 확인은?”

연주가 볼펜을 물고 말했다.

“과장님이 대략적인 내용만 보셨는데, 아무래도 미카엘 신부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 것 같아요.”

목 과장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미카엘 신부?”

“네, 장진수 사건 때 단양 상진 성당에 근무하던 사제입니다.”

“아, 장진수 놈이 탈옥해서 죽이려고 갔던 성당에 있던 신부 말이지?”

“네.”

“음.”

목 과장은 노련한 사람이다. 탈옥까지 해서 그를 찾아가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직감적으로 미카엘 신부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알아챈 그는 일기장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에 놀라지 않았다.

“도경이는 뭐래?”

“울산 일가족 몰살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지시입니다.”

“그건 또 뭐야?”

목 과장은 KCSI 소속이다. 우리 팀이 아니니 수사 정보는 공유되지 않는다. 연주에게 공개 가능한 부분에 대해 간략한 브리핑을 들은 목 과장이 눈동자를 흔들며 설명을 듣다가 턱을 쓸며 혀로 입술을 핥는다.

“그러니까, 1983년도, 아니, 어머니 쪽은 1980년도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재조사한다?”

“네, 맞습니다. 당시는 KCSI가 출범하기 전이긴 하지만 혹시 그쪽에 사건 데이터가 남아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실래요?”

목 과장이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음, 일단 그 사건은 미제가 아니라 자살로 종결된 사건이라는 건데.”

관우가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쉰다.

“내부에서 안 좋아할 겁니다. 당시 수사하셨던 선배님들 입장도 곤란해질 거고.”

당연한 이야기다. 만약 도경이 재수사를 해 당시의 사건이 살인으로 밝혀지면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경찰들은 징계를 받게 된다.

아직 경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은퇴한 사람도 있다. 경찰로 재직 중인 사람들은 징계를 받고, 은퇴한 사람은 불명예를 짊어지게 되는 사건이니 당연히 반기지 않을 거다.

목 과장이 짧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래도 해야지.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이 우리 숙명이니까. 나는 바로 자료 찾아보고 KCSI 선에서 할 수 있는 조사를 해볼 테니까 도경이 오면 전화 줘. 일기장 그거 KCSI로 보낼 거래?”

연주가 어깨를 으쓱한다.

“안 보내지 않을까요? 미세 증거 채취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일기장에 적힌 이야기들 검증이 주목적이니까.”

목 과장은 내용이 궁금한 눈치였지만 수사에 방해를 줄 수는 없으니 입술만 삐죽거린다.

“알았다, 궁금한 건 도경이 녀석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난 그만 갈 테니 수고들 해.”

목 과장은 연주와 관우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오진규에게는 목례를 한 뒤 사무실을 나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진규가 연주에게 물었다.

“연주야.”

“예?”

“목 과장님은 모르지?”

“뭘요?”

“우리 과장님이 기억 읽는 거.”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때 청장님 말씀으로는 우리와 청장님, 본부장님 정도만 아시는 것 같던데.”

관우가 끼어들었다.

“아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다 들었는데 과장님 중학교 때인가, 사건 하나 있었는데 그거 같이 해결했던 형사들 중에 몇이 더 알고 있다고 했어.”

연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세히는 몰라요. 어디 가서 너도 아냐고 떠벌릴 내용도 아니니 물어볼 수도 없고.”

오진규가 턱을 쓸며 목 과장이 나간 문을 바라본다.

관우가 넌지시 물었다.

“목 과장님께 말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시는 겁니까?”

관우 말을 들은 연주도 오진규를 바라본다. 오진규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물론 과장님이 결정하실 문제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건 없지만, 목 과장님은 과학수사의 스페셜리스트이고, 과장님과 막역한 사이로 보여. 지금도 같은 편이지만 저런 사람을 완전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단 말이지. 막말로 기억 읽은 것 중에 과학수사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거 아냐? 차라리 말을 하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될 것 같은데.”

연주가 말했다.

“그건 과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하지만 오 선배 말씀엔 동의해요.”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든다.

“뭐 그건 나도 동의하는데. 과장님 입장에서 목 과장님을 완전히 믿을 수 있냐는 건 또 다른 문제겠죠.”

그때, 수사국 문이 벌컥 열린다. 또다시 수사국을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나 경례를 한다.

“충성!”

두 번째로 수사국을 찾은 이는 청장, 강혁이다.

“어, 쉬어. 도경이 아직 안 왔냐?”

오진규가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좀 전에 전화 와서 좀 오라고 하던데?”

“…….”

오진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볼일이 있으면 청장을 찾아가는 게 옳다. 어떤 미친 경찰이 감히 청장에게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 밤에 말이다.

하지만 강혁은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만에 중대범죄 수사국 사무실에 와본다는 듯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다.

“야, 관우야. 저거 에어컨 아직도 저런 거 쓰냐? 벌레 나오겠다, 이놈아.”

관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찬 바람은 잘 나옵니다.”

“내가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새 걸로 바꿔. 저런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 맡고 일하다 폐병 걸리겠다, 이놈들아. 미련한 과장 밑에서 일을 하니 근무 환경이 이 모양이지. 얼씨구? 이 의자는 또 왜 이래?”

자리에 앉으려던 강혁이 약간 삐걱대는 책상 의자를 손으로 마구 흔든다.

“허리 나간다, 이놈들아. 설비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야지, 실적도 좋은 놈들이 요구하는 건 더럽게 없어. 실적도 없는 팀 놈들은 맨날 이거 바꿔달라, 저게 불편하다 하는데 네놈들은 뭐야? 막말로 중대범죄 수사과만큼 실적 올리는 팀이 대한민국에 또 있냐? 네놈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의자 바꿔달라고 해도 바꿔줄 텐데 왜 이렇게 거지처럼 사냐, 미련한 놈들아?”

시어머니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하나같이 걱정해 주는 말만 하는 청장 덕에 중대범죄 수사국 세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얼라? 웃어? 내가 웃겨?”

관우가 웃음을 참으며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아침에 생긴 웃긴 일이 생각나서.”

“뭔데? 나도 같이 좀 웃자.”

“그, 그게.”

“갑자기 생각해 내려니 생각이 안 나지, 이 새끼야?”

“…….”

“내가 인마, 경찰이다. 경찰. 어디서 거짓부렁이야. 왜들 서 있어, 다리 아프게. 앉아.”

놀러 온 옆집 아저씨처럼 제대로 된 의자를 찾아 질질 끌고 구석에 털썩 앉는 강혁.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무실 가운데 앉았겠지만 강혁은 다르다. 단순히 도경이 불러서 온 것이라 수사국 인원들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게 구석에 앉는 것이 그의 인성을 나타내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세 사람이 연신 강혁 눈치를 보았지만 강혁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집중한다.

세 사람이 눈빛을 교환한 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개인 업무를 보기 시작한다.

약 삼십 분이나 조용한 사무실에서 도경을 기다리던 강혁이 밖에서 들리는 구두 소리에 핸드폰을 놓고 시간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감히 과장 나부랭이가 청장을 삼십 분이나 기다리게 해? 포차에서 고등어구이 안 쏘면 대가리를 세로로 갈라서 뇌 구경을 시켜주겠어.”

강혁의 농담에 세 사람의 웃음이 터진다.

강혁이 사무실 문 방향으로 의자를 빙글 돌려 다리를 꼰다. 점점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 강혁은 도경이 들어오자마자 농담 섞인 윽박을 지르려 준비하는 눈치다.

벌컥.

문이 열리고 도경이 들어온다.

하지만 강혁은 준비했던 농담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얗게 질린 도경의 얼굴. 식은땀이 잔뜩 나 이마에 머리카락 몇 올이 붙어 있다. 강혁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강혁을 마주한 도경의 눈가가 가늘게 떨려온다.

“아저씨…….”

“왜, 이놈아. 무슨 일이야?”

“…….”

잘게 떨리는 도경의 몸. 강혁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경에게 달려가 손을 붙잡았다.

“이 자식 이거. 손이 왜 이렇게 차? 야 인마. 너 무슨 일이야?”

도경의 눈빛.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똘똘한 녀석의 눈빛이 아니다. 뭔가 텅 비어버린 처음 보는 눈빛의 도경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부모님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낸 것 같습니다…….”

잠깐 의미를 깨닫지 못해 멍한 얼굴이 된 강혁의 눈이 점점 커진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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