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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302화 (302/328)

살인의 기억 302화

21. 40년 그리고 35년(2)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죽 일기장을 꺼내 내밀었다. 아저씨는 무척 놀랐는지 일기장을 받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보세요.”

“…….”

“거기 정화라는 단어로 쓴 행위가 살인입니다.”

아저씨는 한참 일기장을 바라보다 나와 눈을 맞춘다.

“누구냐?”

“…….”

“하 선배 죽인 새끼. 누구냐고.”

“아직 추정이지만 미카엘 신부라고 생각합니다.”

“…….”

아저씨는 다시 가죽 일기장을 노려보다 거칠게 빼앗아 간다.

“거기, 껌 종이 끼워둔 곳을 보세요.”

아저씨가 표기해 둔 일기장의 내용을 눈으로 보며 수시로 코를 찡그린다. 그러다 맨 마지막 구절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1989년 3월 10일…….”

아저씨가 나를 보며 눈짓했다.

“기억을 읽은 날짜도 이날이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느님과 가장 먼 곳에 사는 이들의 집 근처.”

강혁 아저씨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보광사.”

중대범죄 수사과 세 사람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다 우리 대화를 듣고 상황을 눈치챈다. 연주가 놀라며 달려왔다.

“세상에! 과장님 부모님 사건의 용의자가 미카엘 신부라는 말씀이세요?”

관우가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감히 청장 손에 있는 일기장을 빼앗아 가진 못하고 물어온다.

“정말입니까, 과장님?”

“…….”

아직 확증은 아니다. 단지 미카엘 신부의 마지막 정화가 1989년 3월 10일이고 절로 추정되는 곳 인근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공통점일 뿐이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오진규가 내게 눈짓한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눈치 같다.

나는 아저씨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기장을 펼치고 굳어 있는 아저씨를 의자에 앉힌 내가 말했다.

“천천히 살펴보세요. 저도 아직 다 못 봤어요.”

“…….”

아저씨는 눈이 붉게 충혈되고 있다. 과격해 보이지만 사건 앞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한 경찰이므로 이걸 보고 달려가 미카엘을 쏘아버리는 짓을 하실 분은 아니지만 심하게 충격을 받은 눈치다.

나는 연주와 관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두 녀석은 강혁 아저씨를 살피라는 신호임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 곁에 선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진규가 사무실 문에 기대 있다 눈을 마주치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를 따라 나가자 사무실 앞 복도에 기대 있는 오진규가 말했다.

“과장님도 꽤 충격받으신 것 같군요.”

나는 쓰게 웃었다. 사실 서울까지 운전해 오는 동안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물론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막상 사실로 드러나자 누군가 강하게 머리를 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시간가량 운전을 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도 지금 강혁 아저씨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뭐, 그렇네요.”

오진규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나를 살피다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상상이 안 가네요. 부모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냈을 때 아들이 어떤 기분일지.”

“…….”

“죄송합니다, 이런 때 수사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라.”

나는 살짝 눈을 감고 말했다.

“기억도 없는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해 마음이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친부모님이 살해당한 경찰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나는 냉정할 수 있다. 나는 내 친부모의 사건이지만 사건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진규는 그런 내 속내를 알고 있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냉정하지 못하셔도 직접 수사하셔야죠. 경찰 관례? 저 안에 청장님이 계신데 누가 뭐라고 할 겁니까? 직접 수사합시다. 돕겠습니다.”

“…….”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한번 확인을 받으니 새삼 눈앞의 사람이 완벽한 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고맙습니다.”

“뭘요, 당연한걸. 그래서 말인데 과장님.”

오진규는 날 붙잡고 목 과장을 확실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팔짱을 꼈다.

“사실 저도 고민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목 과장님은 제가 경찰 내부에서 확실히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분이시고, 무서운 능력을 가진 분이니 반드시 도움이 되겠죠.”

오진규는 고개만 끄덕이고 답은 하지 않는다. 나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던 오진규가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시는 건 두려움 때문이겠죠?”

“…….”

그래, 나는 두렵다. 수사과에서 매일 살 비비며 사는 세 사람에게 사실을 밝힐 때도 나는 두려웠다. 혹시 이들이 날 두려워하면 어쩌지? 나 같은 괴물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 이번에도 역시 나는 망설여진다.

오진규가 그런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목 과장님과 친분이 없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인력들과 반말을 하는 사이지만 제게는 경어를 쓰시는 걸 보면 알죠.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사람을 잘 본 건 바로 과장님을 알아본 것이고.”

오진규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나중에 들어와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목 과장님은 자기 조카 사건을 계기로 과장님 사건이라면 발 벗고 나서 도우시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

그래, 악마 같은 노인 어부에게 살해당한 과장님의 하나뿐인 조카. 그 조카의 사건을 내가 해결했다.

하지만 그걸 해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조카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범인을 잡았을 뿐이다. 그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이 항상 이런 생각을 강요했기에 나는 한 번도 과장님의 고마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오진규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어깨를 두드려 준다.

“목 과장님도 경찰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조카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사건을 의뢰할 때부터 알고 계셨을 겁니다.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 조카의 한을 풀어준 것.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은 이미 넘치도록 하셨음에도 아직 과장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와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께 더 숨기는 것도 예의는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오진규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예, 과장님.”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뭡니까?”

나는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질문을 슬그머니 꺼냈다.

“제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나는 사람의 기억을 읽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오진규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빙그레 웃는다.

“나는 과장님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니 상관없잖아요?”

“…….”

“과장님이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 통제되지 않는 기억을 읽는 것은 본인과 관계된 기억에 한한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전 자유롭네요. 공개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여전히 숨길 수 있습니다. 그건 목 과장님도 마찬가지겠죠.”

“…….”

오진규가 팔짱을 끼며 웃는다.

“저는 두려움 대신 강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와 함께한다. 그런 이상 우리가 해결 못 할 사건은 없다. 나는 두려움보다 이런 생각이 앞서 오히려 힘이 납니다. 목 과장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안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아시죠?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저씨와 상의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오진규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안을 고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과장님.”

내 쪽이 더 고맙다. 나를 이렇게 믿어주고, 두려운 부분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팀원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나는 눈으로 수십 번 감사 인사를 던졌다. 부디 입으로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기를 바라며.

* * *

다음 날.

밤새 일기장을 분석하다 잠시 쪽잠을 잔 후 KCSI를 찾은 나는 미리 연락을 받고 로비에 나와 서성거리는 목 과장님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과장님.”

과장님은 날 보고 얼른 뛰어와 물었다.

“일기장 분석해 봤어? 어때?”

얼굴을 보자마자 득달같이 일기장에 대한 것부터 묻는 과장님.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분량이 많습니다. 약 20년간의 일기가 띄엄띄엄 적힌 것이고, 편지를 보셔서 알겠지만 놈의 글은 직관적이고 일반적인 문체가 아니라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입니다.”

“하, 그래?”

“보시겠습니까?”

“응?”

목 과장님이 날 빤히 본다.

“KCSI에 증거물로 보내겠다는 뜻이냐?”

“아뇨.”

“그렇겠지, 누가 쓴 건지 뻔히 다 아는 증거물인데 과학수사가 필요할 증거물은 아니잖아.”

“그냥 내용 보시겠냐고 묻는 겁니다.”

목 과장님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도 경찰이다. 하지만 경찰 조직은 생각보다 폐쇄적이다.

바로 옆자리, 같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팀 간에도 수사 내용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 조직에서 중요한 증거물을 함께 보자 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목 과장님이 무척 궁금하지만 선뜻 보여달라 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목 과장님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은데?”

“하하, 함정은 무슨.”

“왠지 그거 보고 나면 낚싯바늘에 걸린 우럭 꼴이 될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하하.”

“뭘 웃어, 이놈아. 꿍꿍이가 있는 거지? 숨기지 말고 말해라.”

나는 주변을 슬쩍 바라보았다. KCSI 로비라 그런지 사람이 붐빈다.

“여기 말고, 과장님 사무실에서 이야기하시죠.”

“뭔데 그래? 중요한 이야기야?”

“예.”

“음, 알았다. 가자.”

과장님 사무실에 온 나는 문을 잠근 후, 최대한 자세히 내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기도 할 텐데 과장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경찰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

목 과장님은 손깍지를 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물었다.

“내 조카의 기억을 읽었기에 바다에서 건진 카메라를 확인한 거냐?”

나는 극도로 조심하며 말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조카분의 기억이 아니라 남자친구의 기억이었습니다.”

“어쨌든. 내 조카가 죽기 전의 모습을 읽은 거네.”

“예…….”

“행복해 보였냐?”

“예?”

“내 조카 말이야, 죽기 전에 배에서 데이트했다며. 행복해 보였냐고.”

“……예.”

목 과장님이 슬픈 웃음을 머금는다.

“그래, 그럼 됐다.”

“예?”

목 과장님이 내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

“너 근데 좀 서운하다? 네 말대로라면 강 청장님, 장 본부장님, 너희 팀원들까지 전부 다 아는데 나만 몰랐다는 거 아냐?”

“…….”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목 과장님은 처음부터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는 듯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는다.

오진규의 말대로 나는 괜한 기우 때문에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릴 때 나 때문에 죽은 아저씨의 기억 때문에 모두를 밀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목 과장님이 깍지 낀 손으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네 녀석이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나더러 완전히 그 팀의 수사에 지원하라는 거겠지? 좋아, 한다. 까짓거 기억 읽는 놈이 옆에 있는데 뭔 사건을 해결 못 해. 하자, 이놈아!”

하하…….

생각보다 허무하네, 이거.

난 나름 엄청 큰 용기를 내서 온 건데.

나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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