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303화
21. 40년 그리고 35년(3)
목 과장님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중간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제 미스터리가 풀렸네. 그동안 솔직히 네가 괴물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기억을 읽는 쪽이 더 괴물 같아 보여야 맞는 거 아닌가? 목 과장님이 씩 웃으며 책상 위에 둔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내민다.
“새끼, 좀 일찍 말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함의 열쇠는 간단함이란 말 모르냐?”
“죄송합니다, 과장님.”
“형님, 인마.”
“아, 예 형님.”
“이거나 봐.”
아이러니하다. 나는 오늘 목 과장님을 찾아오며 오늘은 이 이야기로 아주 긴 대화를 나눌 것이라 생각했는데 목 과장님은 의외로 너무 간단하게 넘어가 버린다. 보통 사람은 믿기 어려운 능력인데 왜 이렇게 쉽게 넘어가 버리시는 걸까?
나는 목 과장님 눈치를 보며 서류 봉투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미카엘 신부의 가족 몰살 사건 조사 자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1983년의 자료. 이걸 찾으려면 어디부터 뒤져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목 과장님이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목 과장님이 서류를 눈짓하며 말했다.
“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친분이 있는 형님이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현직 경찰입니까?”
“음.”
“혹시, 당시 수사 담당자입니까?”
“음…… 담당자까지는 아니고. 담당 팀의 막내였다고 하던데.”
“지금 어느 서에 계십니까?”
“노원 경찰서 과장이다. 경감이고.”
경감이면 나보다 두 단계 낮은 계급이다. 아주 오랫동안 경찰 생활을 하셨음에도 아직 경감이라는 건 순경부터 올라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 현재 계급으로 은퇴하게 될 공산이 크다.
“제가 만나봐도 될까요?”
“안 그래도 말해놨다. 자료에 명함 끼워놨으니까 전화하고 만나봐.”
“고맙습니다, 과…… 아니, 형님.”
“살펴봐라. 난 커피 좀 가져올 테니까.”
“예.”
목 과장이 일어나 사무실을 나선다. 문을 열고 다시 닫히는 문 안쪽에 있는 도경을 바라보는 목 과장이 싱긋 웃는다.
복도로 걸어 나와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목 과장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예, 청장님. 접니다. 방금 도경이가 왔습니다.”
-어, 뭐래?
“청장님이 말씀하셨던 능력에 대해 말하더군요.”
-모르는 척했지?
“예, 물론입니다. 처음 듣는 시늉 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목 과장이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은 후 벽에 등을 기대고 물었다.
“처음 청장님께서 녀석의 능력에 대해 말씀해 주셨을 때 믿겨지지가 않았는데. 녀석을 지켜보며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이제 본인 입으로 고백까지 들었으니 더 확실해졌군요.”
-목 과장. 그렇다고 도경이 놈 머리 열어서 뇌 연구하겠다고 할 건 아니지?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 사망 후 시신 기증에 동의한다면 또 몰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농담입니다, 하하.”
-하여간 녀석에게 미리 알고 있었던 티 내지 말도록 해. 지 비밀 떠벌리고 다닌 거 알면 삐쳐. 생각보다 속이 좁쌀만 한 녀석이라니까, 에잉.
“하하, 그래도 청장님이 제일 자신을 아껴주는 분임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건 그거고. 이놈 이거, 내가 예전에 정신과 의사 선생에게 지 비밀 말했다고 얼마나 노발대발했는데. 날 포장마차에 혼자 30분이나 두고 가버렸다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제 놈이 다시 왔지. 둘이 앉아서 소주를 다섯 병이나 까고 다음 날 눈 떠보니 현관문 앞에서 신발도 안 벗고 자고 있었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나네.
“하하, 것 보세요. 잘 화해하고 술도 양껏 드시고 오셨으면서 엄살이 너무 심하십니다.”
-후, 내가 그래도 청장인데 눈치 보며 사느라 힘이 드네. 은퇴하면 더 심하겠지?
“후후, 서류는 구청에 올리신 겁니까?”
-이틀에 한 번씩 확인하고 있는데 도경이 이놈이 도무지 구청에 가질 않아. 입적 신고를 하기 싫은 걸까?
“아닐 겁니다. 시간이 없는 거 아닐까요?”
-시간은 젠장, 휴가를 줘도 안 간다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몰라, 일단 끊어.
“하하, 마음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청장님. 그럼 들어가세요.”
목 과장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보며 씩 웃었다.
사실 강혁이 자신에게 도경의 능력을 알려준 것은 장진수가 탈옥한 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경의 연락을 받고 부산 교도소에 다녀온 후에 들었다.
강혁은 자신이 도경을 도와줄 중요한 장기 말이라며 비밀을 공유해 주는 대신 더 열심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도경이 지 입으로 직접 고백하기 전에는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는 약속을 했다.
그래서 목 과장이 도경의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목 과장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한 모금 마신 후 눈웃음을 짓는다.
“본인이 직접 말했다. 그건 날 완전히 믿겠다는 뜻이겠지. 허허, 별거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군그래.”
목 과장이 다시 사무실 방향으로 돌아가며 중얼거린다.
“진심으로 다가온다면 나도 진심으로 도와야지.”
목 과장이 커피를 들고 사무실 문을 열자 소파의 테이블에 서류를 놓고 볼펜으로 열심히 체크하며 자료를 읽고 있는 도경의 모습이 보인다.
빙긋 웃은 목 과장이 집중하고 있는 도경을 보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도 전에 없던 최고의 경찰이지만, 넌 더 대단한 경찰이 될 수 있다. 지켜봐 주마, 그리고 도와주마. 사람에게 실망하고, 믿음을 잃은 나지만 너라는 존재는 내게도 희망이다, 도경아.’
* * *
노원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미리 전화를 드리고 와 그런지 당시 형사였던 선배 형사가 마중 나와 있다.
아무리 후배라도 계급이 두 개나 높은 후배이고 국가수사본부 명함까지 달고 있는 사람이 온다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키가 작고 배가 나왔으며, 머리는 반쯤 벗겨진 전형적인 아저씨. 그는 멀리서 한눈에 날 알아본 눈치였지만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다.
나는 강혁 아저씨에게 배운 대로 먼저 나를 낮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날 보며 약간 당황한 눈치를 보이는 선배님. 아마도 어리고 계급 높은 후배 놈이 찾아와 강짜를 부릴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 아아…….”
나는 허리를 숙이고 악수를 청했다.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현도경입니다. 목 과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배 형사가 어정쩡한 포즈로 내 손을 붙잡는다.
“아, 예…….”
“성함이 주영권 선배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과장님.”
“아이고 과장은 무슨. 그냥 후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영권은 형사답지 않게 상당히 푸근한 인상을 가진 형사였다. 그는 내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래도 되겠나, 후배님?”
“그럼요. 한참 선배님이신데.”
“허허! 아주 시원시원한 후배님이시네. 아주 좋아. 식사는 했고?”
“예, 했습니다. 선배님도 식사하셨습니까?”
“어, 나야 아까 설렁탕 한 그릇 했지. 들어가지, 내 방에서 이야기하자고. 이야, 자네 아주 키도 크고 덩치도 좋네. 신수가 훤한 걸 보니 아주 잘될 사람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내가 이 선배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경찰은 본능적으로 예전에 종결된 사건을 재조사한다고 하면 거부감부터 갖게 마련이다.
이 사람은 당시 수사 관련자이기 때문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공산이 크므로 미리 저자세로 나가 최대한의 호감을 얻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권은 날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자리를 권한 그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야, 아직 삼십 대라며? 그 나이에 총경까지 올라간 사람은 내 평생 처음 봐. 진원이에게 듣자 하니 자네가 해결한 사건 중에 굵직한 것만 추려도 한 시간은 이야기해야 될 거라던데.”
순간 진원이가 누군가 했다. 목 과장님 이름이지, 참. 누군가 그분 성함을 막 부르는 걸 처음 들어서 적응이 안 된다.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이 사람 겸손은. 진원이 말대로 사람이 아주 됐어. 요즘 것들은 조금만 활약해도 모가지에 힘부터 주고 다니는데 말이야.”
나는 절대 먼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상대가 자연스럽게 물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포인트이다. 조급해 보이면 저자세로 나간 보람이 없다.
“선배님도 인물이 아주 좋으십니다.”
“나? 나야 뭐.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인데 뭘. 우리 딸은 맨날 나 징그럽다고 도망 다녀.”
“설마 그렇겠습니까? 농담일 겁니다.”
“허허, 용돈 주면 폭 안기긴 하지. 역시 돈이 최고야.”
“하하, 그렇습니까?”
나는 영권의 장단을 맞춰주며 한동안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영권은 한참이나 농을 늘어놓다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가 바쁜 사람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 미안하군그래. 이제 본론으로 가 볼까?”
“괜찮습니다, 선배님. 더 이야기하셔도 괜찮습니다. 선배님 같은 분과 대화하니 재미있네요.”
“허허, 사람 참.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네. 그래, 1983년 사건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영권이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말하게. 재조사인가?”
“…….”
“단순히 참고하기 위한 조사인지, 사건을 재조사할 건지 좀 알았으면 해서.”
나는 순간 어떻게 위기를 넘겨야 할지 고민했다. 여기서 재조사를 한다고 말하면 조금 전까지 쌓아둔 호감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 차라리 처음부터 정면 돌파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영권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오랜 세월 경찰 생활을 한 사람답게 내 눈빛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눈빛이 바뀌었군, 그래.”
“선배님.”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게 자네 진짜 모습이군.”
“…….”
“최연소 총경 자리를 딱지치기해서 딴 게 아닌 건 확실해.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의 사과. 그는 내 사과를 듣고 바로 상황을 짐작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영권이 씩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암, 다시 조사해야지, 그렇고말고.”
“예……?”
뭐지, 이 반응은? 자신이, 혹은 자신의 팀이 종결했던 사건을 재조사하는데 좋아한다고?
영권은 의문스러운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다시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군다.
“당시 막내였던 내 눈에도 억지스러운 수사였으니까. 그 사건이 그렇게 끝나면 안 되는 거였어. 내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사건인데…… 그때 그냥 그렇게 끝내선 안 되는 거였어.”
영권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네가 해주게. 내 평생의 후회를 좀 지워주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