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06화 (306/328)

살인의 기억 306화

21. 40년 그리고 35년(6)

가스 라이팅(gas lighting).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녀석은 미카엘 신부에게 지배당했던 걸까?

장진수가 물어왔다.

“사람이 죽으면 뭐가 남는지 아십니까?”

“…….”

사람이 죽으면 뭐가 남느냐? 질문의 의도에 따라 여러 대답을 할 수 있다.

옛 성현들의 말씀을 빌리면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길 것이고, 유가족의 입장에 된다면 슬픔과 추억이 남을 것이고, 살인마의 입장이라면 쾌락이라는 기억이 남을 것이다.

놈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지금 우리는 놈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를 죽인 자식이 그들의 죽음 후 무엇이 남는지 묻고 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몰라.”

장진수가 슬픈 미소를 걸고 자기 손을 바라본다.

“좋은 기억이 남습니다.”

“……?”

무슨 말이야, 그게? 넌 의부에게 폭행을 당했잖아. 그리고 네 엄마는 폭행당하는 아들을 보고도 못 본 척했어. 그런데 좋은 기억이 남는다고? 아니, 애초부터 좋은 기억이란 게 있기는 해?

장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저울에 달면 나쁜 일이 훨씬 더 많은데. 당사자가 죽고 나니 이상하게 굳이 얼마 없는 좋은 기억들이 생각나더라 이 말입니다.”

“…….”

그러니까 부모를 죽이고 나자 굳이 몇 없는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괴로웠다는 말이야, 지금? 나는 미간을 좁히고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보육원에서 수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와 통화를 하고…… 갑자기 그 사람이 신부님께 달려들었고…… 큰 소리가 나면서 피, 피가 튀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굳어 있었어. 그리고 헬멧을 쓰고 총을 든 경찰특공대가 들어와 그 사람 목을 만져본 뒤에 아직 살아 있다고 소리 지르며 구급차를 불렀고.’

‘따로 신부님께 말한 건 없고요?’

‘신부님께 말한 건 없는데. 쓰러진 후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뭘 중얼거려요?’

‘엄마……라고.’

나는 당시 수녀님의 말을 흘려들었다.

사람은 크게 다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 그건 꼭 엄마를 떠올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 시절. 다치면 울면서 불렀던 엄마라는 단어가 커서도 습관처럼 입에 남아 그런 것이다.

나는 그때 수녀님이 총에 맞은 장진수가 엄마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저런 상황을 떠올렸다.

“무슨 기억?”

장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때가 1998년일 겁니다.”

1998년. 놈이 일곱 살 때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모자는 무척 힘들게 살았습니다. 생일 파티?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죠. 생일날도 엄마는 공장에서 새벽까지 일을 하고 늦게 돌아왔습니다. 늘 며칠이나 지난 후에 사과했죠. 생일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못 챙겼다.”

녀석은 주먹으로 이불을 꽉 말아 쥔다.

“일곱 살 생일 때였습니다. 그때도 평소의 생일처럼 그냥 나 혼자 지내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일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자는 날 깨워서 내일이 내 생일이라며 일 하루 쉬고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순간 이게 꿈인가 싶었죠. 나는 엄마에게 그 말을 듣고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아주 짧은 찰나, 불쌍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겐 매년 생일을 챙겨주는 수녀님이 계셨는데. 이놈은 옆에 엄마가 있어도 그런 걸 못 하고 살았구나.

생일 파티를 단독으로 챙겨 받은 적은 없어도 그달에 함께 생일을 맞은 여러 친구들과 동시에 고깔모자를 쓰고 케이크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내 쪽이 좀 더 낫게 느껴진다.

“그래서? 엄마와 놀이공원 간 기억이 났나?”

“…….”

장진수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그날. 회전목마에서.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에 몸을 싣고, 몸을 뒤로 젖히고 화려한 회전목마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난생처음 놀이공원에 온 거라 정신없이 신나게 노는 와중에 나는 문득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아빠가 없어도. 엄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도중 고개를 들어 엄마가 서 있던 자리를 봤죠.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회전목마가 한 바퀴 돌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날 때 나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엄마에게 인사가 하고 싶어서.”

“안 계시던가?”

“아뇨, 계셨습니다. 단지 옆에 처음 보는 아저씨가 함께 서 있었죠.”

의부. 놈을 상습 폭행했던 의부와의 첫 만남이 일곱 살 생일 무렵이었던 모양이다. 장진수가 주먹을 꼭 쥐며 말을 잇는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웃는 얼굴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처음 먹어본 피자의 맛. 그 모두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피자?”

“예, 그날 처음 피자를 먹어봤습니다. 그 사람이 사줬습니다.”

그 사람. 의부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아버지란 말은 나오지 않는 모양이구나. 장진수가 자기 배를 문지르며 자조적인 웃음을 입에 건다.

“조그만 놈이 그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더군요. 셋이 먹었다고 하지만 엄마와 그 사람이 한 조각씩 먹고 나머진 다 제가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엄마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와 발견한 솜사탕을 또 뚫어지게 봤었죠.”

장진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그때 엄마 손을 잡고 솜사탕을 바라보던 일곱 살 녀석이 된 듯.

“배불리 먹고 또 다른 놀이기구를 타러 가려고 내 손을 끌던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솜사탕을 바라보던 날 발견하곤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습니다.”

장진수는 마치 엄마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투명한 누군가와 눈을 맞춘다.

“솜사탕 먹고 싶니?”

“그게 뭔데? 저거?”

“응, 저게 솜사탕이야. 먹을래?”

“비싸지 않아?”

“비싸지만 오늘은 사줄 수 있어. 내 아들 생일이니까. 먹을래?”

“응!”

엄마와의 대화를 혼자 중얼거리는 장진수.

“조금 떼어 손에 움켜쥐니 손이 끈적끈적해졌지만 부드러운 분홍색 구름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사라지며 달콤한 맛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게 꼭 웃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장진수의 눈빛이 다시 돌아온다. 초점이 맞은 놈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기억을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었습니다.”

“…….”

그때 만난 남자와 재혼을 한 뒤, 처음 얼마간은 행복했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무슨 이유이든 의부의 상황이 나빠졌고, 그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풀었다.

아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엄마와 보낸 좋은 기억마저 차츰 잊어갔고, 결국 엄마를 죽였다. 그러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말이 믿겨진다.

“언제 다시 생각나던가?”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 이따위 녀석의 감정을 왜 신경 써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말 그대로 문득 궁금해졌을 뿐이다.

장진수가 고개를 숙였다.

“교도소에서 생각났습니다.”

“그래.”

놈은 교도소에서 성당에 나가 진짜 신부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삐뚤어졌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살인이 처음 시작되었던 부모의 사건 생각이 난 것이다.

장진수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아니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잊었습니다.”

“음.”

놈의 눈가가 붉어진다. 무표정하던 놈의 얼굴에 표독함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게 그걸 잊게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미카엘이다. 나는 슬쩍 물었다.

“아까 네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고 했다. 미카엘이 부모를 죽이라 종용한 건가?”

장진수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제발 그냥 말해라, 이 새끼야. 또 게임 타령하지 말고.

장진수는 한참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라고?”

“예.”

“그럼?”

놈이 자기 손을 천천히 든다. 놈의 하얀 손이 달달 떨리고 있다.

“그날. 제 손을 움직인 건 내 의지도. 미카엘의 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뭔데?”

“미카엘의 손.”

“……뭐?”

장진수가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간다.

“놈이 내 손을 잡고 엄마 목을 조르게 했습니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단순한 가스 라이팅이 아니라 직접 살인에 참여했다고?

“어, 엄마가 가만히 있었어?”

“…….”

“말해!”

“…….”

장진수는 눈에 힘을 풀고 슬픈 얼굴이 된다.

“제 살인 방식. 잊으셨습니까?”

살인 방식? 혼자 있는 여성에게 접근. 뒤에서 습격하여 아지트로 끌고 가 사망 시킨 후, 단백질 투명화 표본 진행…….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약물?”

장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손수건에 약물을 묻혀 대상을 기절시킨 후 진행되는 살인. 놈의 부모도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진수는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무릎걸음 자세를 한다. 베개를 가져와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는 놈. 순간 연쇄살인을 하던 놈의 눈빛이 스쳐 간다.

광기에 찬 눈빛으로 베개를 누르는 놈이 중얼거린다.

“죄를 저지르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간 인간을 구제할 이는 신밖에 없다. 보내주어라, 자신의 모든 죄를 씻어 깨끗하고 투명하게 만들어 신에게 보내면 그의 모든 죄는 구원받을 수 있다.”

나는 갑자기 미친놈처럼 구는 장진수가 하는 말을 듣다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미카엘 신부가 한 말일 것이다. 놈은 어린 장진수 옆에서 놈의 손을 잡고 부모의 목을 조르게 하였다. 그리고 죽이는 도중에도 저러한 말로 놈을 세뇌시켰다. 네 부모의 죄를 씻으라고. 신에게 보내 용서받게 하라고.

장진수는 몇 번이나 베개를 누르다 어느 순간 힘을 풀고 엉덩이를 털썩 붙인다.

“두려웠습니다. 몇 번이나 그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에게 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궁금하다. 두렵고 의심하던 녀석이 왜 순종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맞은 거냐?”

“…….”

“미카엘 신부도 널 폭행한 거야?”

아니면 왜 순종하지? 폭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랬던 거야? 장진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린다. 무척 공포스러운 얼굴이 된 놈은 마른세수를 해 공포심을 덜어내려 노력한다.

“죽여야 됩니다.”

“뭐?”

“죽여야…… 죽여야 끝납니다.”

“뭐라는 거야?”

“죽여…… 죽여…….”

상태가 이상하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발작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나는 일어나 멍한 얼굴로 죽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놈의 어깨를 붙잡았다.

“똑바로 말해, 이 새끼야. 정신 차리고!”

장진수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죽여야 돼, 죽여야 돼! 그 자식은 악마야.”

“장진수!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소리를 버럭 지르며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자, 놈이 강하게 내 손을 뿌리치며 고함을 지른다.

“고작 의부의 폭행도 견디지 못했던 내가! 살인마의 속삭임에 반항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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