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08화 (308/328)

살인의 기억 308화

21. 40년 그리고 35년(8)

병실 앞. 나는 문을 열고 나와 병원 복도에 우두커니 섰다.

‘살인의 추억. 그게 저에게만 있으란 법이 있습니까? 내가 미카엘에게 공포심을 가지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지금 한 말. 두 가지를 조합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두 가지의 말.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로 친절한 힌트를 못 알아먹을 리 없다.

장진수 녀석이 말한 힌트는 미카엘 신부에게 살인을 추억할 장소나 물건이 있다는 뜻이고, 그것을 본 어린 장진수는 공포심 때문에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미카엘이…… 단지 장진수 부모님만 살해한 게 아니라는 뜻도 된다.”

살인을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장진수처럼 시신들이 전시된 아지트가 있을지도 모르고, 몇 가지 증거물들을 보관해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앨범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부모님 사건과 연관이 있는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집에서 오래된 전화기를 통해 기억을 읽었을 때도 그 목소리가 미카엘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아버지가 실종된 대구에서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내가 그를 의심하는 이유는 단 하나. 현중이와 이동하며 여인숙이 있던 자리를 보며 예전에 여기서 했던 일이 생각났다는 그 말. 딱 그 하나다.

나는 순간 편두통이 오는 것을 느끼고 한쪽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저…… 과장님.”

옆에서 날 부르는 순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나 괜찮으니까 일 봐요.”

“그게 아니고. 치킨이 왔는데.”

고개를 들자, 하얀 봉투에 담긴 사각형 박스에 치킨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한쪽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안에 포장 용기 제거하는 플라스틱 칼 같은 거 없나 확인하시고, 안에 넣어주세요. 가능하면 한 분이 먹는 거 지켜봐 주시고.”

“예, 과장님. 그런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괜찮아요, 귀찮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여기 카드.”

“예, 감사합니다.”

나는 신용카드를 받아 지갑에 넣은 후 일단 병원을 벗어났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옆에 있는 보도블록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장진수 놈과의 대화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어린 장진수는 미카엘 신부가 가진 살인의 추억이 저장된 공간, 혹은 물건을 보았고 공포심이나 혹은 경외심 때문에 그에게 순종했다. 미카엘은 자신의 첫 살인이 장진수와 같다고 했다. 그건 자기 부모를 죽였다는 뜻이 된다. 미카엘은 장진수와 함께 그의 부모도 죽였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이 저장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살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증명할 수 없다. 냅다 미카엘을 체포하면 나는 반드시 그를 다시 풀어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위험인물인 그의 곁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수녀님과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랫니로 윗입술을 여러 번 깨문 후 오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접니다. 출발하셨습니까?”

-이미 광진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주교 회의에서 보낸 사람들이 미카엘 신부를 대하는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꼭 우리가 범죄자를 체포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수갑만 안 채웠지 신부 대접을 전혀 안 해주는 것 같은데.

나는 간략히 요셉 신부님과 했던 대화를 공유했다. 미리 공유 했어야 하지만 워낙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닥치는 바람에 말을 못 했다.

내 말을 들은 오 선배가 말했다.

-그럼 미카엘 신부는 파면당하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주교회의에서 결정이 되겠죠.”

-음, 아! 잠시만요. 저기 누가 나오는데.

핸드폰에서 잡음이 들린다. 아마 전화를 내리고 달려가는 모양이다. 수화기를 막고 있는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린다.

조금 더 기다리자 오 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이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방금 우리와 여기까지 같이 온 협회 사람이 다녀갔는데 미카엘 신부가 구금된답니다.

“예?”

-여기 갇힌다고 하는 것 같은데. 교회법에 따라 처리한다는데 교회는 기독교 아닙니까?

교회법. 가톨릭도 교회법이라는 단어를 쓰긴 쓴다. 규율 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지금은 단어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가톨릭 협회가 미카엘 신부를 구금한다는 거죠?”

-예, 맞습니다.

“언제까지 구금한다는 이야기는 없고요?”

-어, 뭐. 주한 교황 대사관이 어쩌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일단 종교 단체라 영장 없이 미카엘 신부를 데리고 나오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한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만, 구금 해제가 되면 미리 경찰서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중요한 경호 대상자라고 둘러댔고요.

“잘하셨습니다, 선배님. 그만 복귀하세요.”

-진짜 저대로 둬도 될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없어요. 대신 그쪽에 형사들 파견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도록 해주세요.”

-갑자기 구금 해제가 되는 일 말이죠?

“예, 반드시 미카엘 신부를 혼자 두면 안 됩니다. 거기서 나오는 순간 형사가 24시간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치 취해두고 복귀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잘됐다고 해야 할까? 체포할 수 없다면 떨어뜨려 놔야 하는 상황. 그런데 이 부분이 해결되었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경찰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 하겠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 다시 핸드폰에 불이 들어온다. 이번엔 문자다. 수신인은 목 과장님이고 매우 짧은 메시지다.

[KCSI로 와.]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차에 올랐다. 목 과장님이 용건도 남기지 않고 무턱대고 KCSI로 오라고 하는 문자를 보내신 건 처음이다. 뭔가 잡아내신 거다.

무엇인지도 묻지 않은 나는 바로 곧 가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 차를 몰아 KCSI로 향했다.

* * *

“영권 형님께 당시 사건의 검시 보고서를 받았다. 너무 오래전에 진행된 부검 자료라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었어.”

목 과장님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온 과장님이 서류 몇 장을 내민다. 받으려 하니 서류를 다시 걷어 간 과장님이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냐?”

“…….”

“왜, 무슨 일인데?”

나는 과장님을 가만히 바라보다 장진수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말했다. 이제 이 사람도 완전히 나와 한배를 탔으니 모든 수사 내용을 공유해 주는 것이 맞다.

내 말을 다 들은 과장님은 그제야 서류를 건네준 뒤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음, 놈이 그런 말을 했다 이거지. 그렇다면 어딘가 미카엘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있다는 뜻인데. 장진수 그놈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건 자기도 위치를 모른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하지만 과장님 말씀은 일리가 있다.

장진수 놈은 엉뚱한 질문을 하는 나를 다시 붙잡아 자기가 알리고 싶은 정보를 알렸다. 본인의 일기장을 찾아내라는 미션을 낸 전적이 있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본인의 물건이나 장소가 아니며 결정적으로 내게 그것을 찾는 것이 게임의 일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입니까?”

목 과장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연쇄살인범의 특징 중 하나야. 자기를 쫓고 있는 형사가 능력 있고 계급 높은 사람이길 바라는 것. 그리고 점점 얼굴도 본 적 없는 형사에 대한 우정과 애착을 느껴가지. 도경이 네 경우는 얼굴도 알고 대화도 나눴다. 장진수 놈이 네게 느끼는 유대감은 예상보다 클지도 몰라.”

범죄행동분석 심리 쪽도 공부한 과장님답게 장진수 놈의 심리를 꿰뚫어 보신다. 나도 어렴풋이 놈이 내게 의지하고 있음을 눈치채긴 했다.

나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찾아주는 게 예의겠지요. 이건 뭡니까?”

“아, 그거. 울산 일가족 살인사건 검시 보고서 재확인한 서류다.”

나는 서류를 넘겨 보다 마지막 부분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살인?”

검시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 그곳에 살인이라는 단어가 써 있다. 그런데 가족 중 어머니만 사인이 살인으로 써 있고, 아버지와 딸은 자살이라고 써 있다.

“미카엘의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검시 보고서에 사인을 암으로 인한 병사로 기록한 것도 확인했고.”

차라리 아버지와 딸 쪽의 죽음을 의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쪽이 살인이라고? 목 과장님이 서류를 눈짓하며 말했다.

“1983년은 고 병리학(paleopathology) 분석 기법이 존재하던 시절이 아니었어.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건 법의학적 실수로 보기보단 시절의 한계로 봐야 하겠지.”

목 과장님이 내가 보던 서류를 가져가 앞 장으로 넘긴 후 다시 돌려준다.

“당시 부검을 진행했던 의사의 기록이다. 읽어봐.”

나는 과장님이 짚어준 부분을 중얼거리며 읽었다.

“명치끝을 기점으로 하여 좌, 우 늑골 변연부를 따라 절개하고, 좌측 옆구리와 우측 옆구리는 수직으로 절개한 후 회음부로부터 약 15㎝ 상방의 하복부를 절개하여 복벽을 한 덩어리로 제거하였다. 노출된 복강을 통해 횡격막을 제거한 후 흉강 내 장기를 관찰하였고, 두개골은 절개하지 않았다. 절개 시 칼끝에 저항은 거의 없는 정도였으며, 쉽게 절개가 가능하였다. 절개된 복벽은 경화되었으나 탄성이 있었으며, 무게는 매우 가벼웠다. 두꺼운 복벽은 황색 또는 황갈색을 띠었고 피부, 피하지방, 근육, 복막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거의 대부분의 문장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과장님을 바라보았다.

싱긋 웃은 과장님이 말했다.

“그냥 쉽게 말해서 미이라 상태로 발견된 시신을 대충 잘라 안을 확인했다. 이 정도로 보면 돼. 중요한 건 바로 아래 써 있는 기록이다.”

나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겨 나머지 글을 읽었다.

“좌, 우측 옆구리 부위가 함몰되었다. 배는 오랜 기간 앉은 상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팽창된 소견이었으며, 중앙부만 역삼각형 모양으로 위아래로 길게 함몰되었고 좌·우측 복벽은 비대칭으로 융기되어 있었다. 특히 우측 복벽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융기되었다?”

목 과장님이 볼펜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다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손가락을 튕긴다.

“그래, 당시 미이라가 무릎을 모으고 앉은 자세로 3년을 있었다는 이유로 함몰된 부위가 관절에 의해 눌려 생긴 것이라 본 거지. 하지만 그건 그때 통하던 이야기고, 발전된 현대의 법의학적 관점으로 시신의 자세를 3D 스캔으로 돌린 후 3년간 미이라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이게 말이 안 돼.”

“어떤 부분 말입니까?”

“복부 중앙이 역삼각형 모양으로 위아래로 길게 함몰되었다는 이 부분.”

“이게 왜 이상한 겁니까? 저도 이런 시신 본 적 있습니다. 미이라까지는 아니지만 오래전에 살해된 시신 중에 복부에 역삼각형 모양의 함몰이 있는 시신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목 과장님이 씩 웃으신다.

“그래, 그렇긴 하지.”

응? 그렇다고?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목 과장님이 볼펜을 들고 말했다.

“누워서 발견된 시신이라면 가능해. 하지만 3년간 앉아 있던 시신의 복부 중앙이 역삼각형으로 함몰된다? 게다가 좌, 우측 복벽이 비대칭으로 융기된다고? 절대 불가능해.”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과장님을 바라보았다. 과장님은 서류를 볼펜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거야. 상대는 신장암에 걸린 50대 여성이었고 그런 사람에게 외부 충격이 일정 이상을 넘을 경우 치명상이 될 수 있어.”

나는 천천히 서류를 내리며 과장님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카엘의 어머니 사인이 타살이다…….”

순간적으로 장진수의 일기장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정화를 시행하셨습니까?

천사가 답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처음 정화한 이는 누구였습니까?

천사가 답했다.

너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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