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311화
21. 40년 그리고 35년(11)
나는 오진규에게 메모를 넘겨주며 말했다.
“1983년 사건 당시 미카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던 교수님 연락처입니다. 당시 수사하셨던 형사님 말로는 사건 발생 후 독일로 발령 겸 유학을 떠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교수직을 계속하시다가 얼마 전에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이분부터 만나보세요.”
오진규가 메모를 받아 물끄러미 본 뒤 품에 넣는다.
“만약 우리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살인사건과 연관된 사건이라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으니 설득이 쉽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오진규가 그런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하지만 틈이 보입니다.”
“예?”
노련하고 경험 많은 오진규. 그에게 작은 틈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오진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사건 발생 후, 만약 이 교수가 승진을 했다면 골치 아파집니다. 그건 옛 유대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독일로 떠났습니다. 돌아왔을 때 다시 교수 일을 했다고 하셨는데, 어디 교수를 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직 거기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진규가 연주에게 메모를 넘겨주자, 컴퓨터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통해 정보를 검색한 연주가 말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연성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습니다.”
나는 연주의 말을 듣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성 대학교? 일반 사학재단 소속이다. 게다가 그 재단 뒤에는 국내 대기업이 있다.
가톨릭 협회 소속이 아닌 일반 대학교로 간 이유는 뭘까? 그는 독일에 갈 때도 일반 유학이 아닌 가톨릭 재단의 발령을 받고 갔다. 그렇다면 돌아와서도 가톨릭 협회 소속으로 오는 것이 옳다.
“연성 대학교?”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인다.
“자, 가톨릭 협회 소속의 교수. 물론 사제는 아니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대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수이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자가 사건 직후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후 재단에서 나와 다른 재단으로 들어갔다? 일반 교수라면 의심할 바 없지만 이런 경우는 다르죠. 종교는 세상 무엇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울타리이니까.”
그의 말이 옳다. 오진규가 날 보며 말했다.
“양이 종교라는 울타리를 빠져나왔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종교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나온 사람. 무언가 그를 종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빠져나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균열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매우 짧은 말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읊어준 것으로 여기까지 예상하는 오 선배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시네요.”
“하하, 별거 아닙니다. 과장님 쪽이 더 대단하죠. 제가 아무리 예상을 해도 직접 남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무슨 수로 쫓겠습니까?”
“그거야, 뭐.”
사실 그게 내 능력인 건 사실이지만 뛰어난 직감과 경험으로 움직이는 면에서는 오 선배를 따라갈 수 없다.
내가 공치사를 하려 하는 눈치를 보이자 오진규가 얼른 연주에게 손짓한다.
“자, 우린 교수를 만나러 가 보자고.”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얼른 나가 버리는 오진규. 나는 칭찬에 약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옆을 보니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관우가 등산 가방에 양말과 속옷들을 쑤셔 넣고 있는 것이 보인다.
“뭐 해?”
관우가 짐을 싸며 고개를 든다.
“대구 안 내려가요?”
“…….”
“과장님 아버님 사건부터 파야 뭐가 진행이 되죠.”
녀석,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젠 알아서 척척 하는구나. 나는 빙긋 웃으며 작은 가방을 챙겼다.
“그래, 짐 싸자. 대구부터 시작하자고.”
* * *
몇 시간 뒤 대구 서문시장 금은방 거리.
여인숙 사장 아들을 만났던 성인 PC방 앞에 서서 건물을 올려 보고 있는 내게 관우가 달려와 지도를 내민다.
“과장님, 대구 경찰서 협조 얻어서 1989년 당시 이 거리에 설치되었던 공중전화 박스 위치가 표기된 지도 가져왔습니다.”
“어, 수고했다.”
나는 길거리에 주차해 둔 차 본 네트 위에 지도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지금 이 건물이 여기 있고, 제일 가까운 공중전화는…….”
관우가 끼어들며 펜을 가져간다.
“미리 확인해 뒀습니다. 반경 50미터 기준으로 여섯 군데입니다.”
관우가 빨간 펜으로 원을 그린다.
“좋아, 일단 동선을 예상하면서 가 보자고.”
“예, 과장님.”
지도를 접어 품에 넣고 다시 관우를 돌아보니 녀석이 한 곳을 쏘아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뭐지?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관우가 약간 거친 말투로 말했다.
“뭐, 이 새끼야. 왜 사람 뚫어지게 보고 난리야?”
응? 관우가 길거리에서 일반인에게 시비나 거는 녀석이 아닌데 왜 저러지?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돌린 난 피식 웃었다. 성인 PC방 앞에 여인숙 주인댁 아들놈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시골 깡패는 왜 다 저런 옷을 입는지 모르겠다. 몸에 딱 붙는 화려한 무늬의 티셔츠에 의자에 앉기도 부담스러운 하얀 바지, 광이 번쩍번쩍 나는 구두를 신은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달려와 굽실거린다.
“그때 그 형사님 맞으시죠?”
“어, 맞아.”
“이야, 긴가민가해서 자꾸 봤습니다.”
녀석이 관우를 보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아는 분인가 해서.”
관우는 깡패 놈이 시비를 거나 해서 날카롭게 굴었다가 상대와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입맛을 다신다.
“아, 뭐. 저도 잘한 거 없으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녀석, 우리 팀에서는 항상 막내에 연주에게 매번 구박받는 캐릭터이지만 밖에 나오면 이 녀석도 영락없는 형사이구나. 그나저나 이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순성이라고 했었나?”
“어이쿠!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나는 저자세로 나오는 순성이를 위아래로 보며 물었다.
“왜 이리 굽실거려?”
“하하, 제가 언제 예의 없게 굴었던 적이 있습니까?”
나는 첫 만남부터 시비가 걸렸던 녀석을 떠올리다 그때 이놈이 형님이라고 불렀던 경찰이 왔다가 내 계급을 듣고 기겁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실소를 지으며 물었다.
“경찰서 형님은 잘 계시냐?”
“…….”
녀석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녀석은 내 팔짱을 끼며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다.
“아이고, 형사님. 그 형님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이게 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 거죠.”
어차피 이런 일로 일선에서 뛰는 형사 나무랄 생각도 없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팔을 빼며 물었다.
“너 어릴 때부터 이 동네 살았다고 했지? 커서 잠깐 다른 지방에 있었던 기간 빼고.”
“예, 완전 토박이죠.”
“몇 살이냐?”
“저 서른아홉인데요.”
제길, 나보다 나이가 많았구나.
“흠, 그래?”
“예, 제가 좀 노인이지만 생각보다 어립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형사님은 엄청 동안이시겠네요. 형님께 들어보니 총경 달려면 경력 엄청 쌓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눈치를 보고 있지만 감히 나이를 묻지는 못하는 녀석. 나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 어릴 때 여기 공중전화 있었냐?”
“어…… 중학교 때까지는 있었습니다.”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
“몇 군데는 기억나는데.”
“여기 지도 봐. 보면 기억날 거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있는 공중전화만 기억해 내.”
녀석이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지도 보니까 기억이 나네요. 확실히 기억납니다.”
“확실히? 어릴 때 공중전화 쓸 일도 많지 않을 텐데.”
“아, 그게. 한번 공중전화가 크게 부서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사님들이 동네 애들 중에 사고 치는 녀석들 두들겨 패면서 범인 나오라고 했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 일 이후로 동네 아저씨들이 애들은 공중전화 근처에 가지도 말라고 얼마나 강짜를 부렸는데요.”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중전화가 크게 부서져?”
관우도 놀라며 바싹 다가온다. 우리 눈빛이 변하자 영문을 모르는 순성이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뒷걸음질을 친다.
“예……. 왜 그러시는지. 저 진짜 그때 아주 어려서 기억도 안 납니다. 커서 동네 형들에게 들은 거예요.”
무슨 상상을 하는지 이상한 소릴 해대는 녀석. 당연하다. 1989년도에 이 녀석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놈의 팔을 꽉 잡으며 물었다.
“어디야?”
“예……?”
“부서진 공중전화. 어디냐고. 기억할 수 있어?”
“어, 그게…… 그러니까 어릴 때 새끼손가락 사 먹으러 가는 길에 있던 공중전화인데. 그때 그 구멍가게가…….”
지도보다는 직접 거리 모습을 보는 것이 편한 토박이. 녀석은 여인숙이 있던 건물에서 약 30미터 떨어진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 작은 골목길 보이시죠? 저 모퉁이에 구멍가게가 있었고 구멍가게 옆으로 돌아가면 바로 있었습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지도를 빼앗은 뒤 성큼성큼 모퉁이로 향했다.
구멍가게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무인 세탁소가 들어와 있다. 모퉁이를 돌아보니 조금 큰 골목길이 나온다.
나를 따라온 관우가 골목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네요. 요즘 공중전화 쓰는 사람이 없어서 대폭 줄였다고 하던데. 여기라고 남아 있을 리가 없죠.”
골목 안쪽은 일반 주택가였다.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는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PC방 앞에 서서 멀뚱멀뚱거리는 순성이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예!”
바람처럼 달려오는 녀석. 나는 골목길을 눈짓하며 말했다.
“정확히 어디야?”
“여기요.”
순성이 놈이 달려가 전봇대 옆에 선다.
“정확히 여기 있었습니다. 두 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동전 넣는 전화기이고 하나는 전화 카드 넣는 공중전화였습니다.”
“전화기 부서진 사건이 생겼을 때 너 아는 형이란 사람도 조사받았어?”
“아니, 뭐 조사까지는 아니고 형사 아저씨한테 불려갔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노는 고등학교 형들이 먼저 불려갔고 그 형은 당시에 중학생이라 나중에 불려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조사였어?”
“그거 부서진 날 뭐 했냐, 요즘 사고 안 치냐, 계속 사고 치면 콩밥 먹는다. 뭐 이런 거였다고 들었습니다.”
“음.”
관우가 나서며 물었다.
“혹시 사건 날짜 기억합니까?”
그런 건 기억 못 하겠지. 특별한 사건도 아니고 고작 공중전화가 부서진 날짜를 기억하는 건 이상하니까. 하지만 순성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합니다.”
나는 기대 없이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녀석을 보았다.
“뭐?”
“그때 형에게 들은 날짜는 제가 잊을 수가 없는 날짜이거든요. 우리 엄마 제삿날이라.”
아,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그래, 어머니 기일이면 잊을 수가 없지.
“언제야?”
순성이 녀석이 하늘을 올려 보며 지 엄마에게 말을 거는 표정으로 말했다.
“1989년 3월 9일입니다. 우리 엄마는 1987년에 돌아가셔서 그날 집에 제사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