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15화 (315/328)

살인의 기억 315화

21. 40년 그리고 35년(15)

사가정 지하철역 4번 출구 앞.

차가 없어 택시를 타고 온 나는 차 문을 박차고 내려 미친놈처럼 뛰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연주와 오 선배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만약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

오 선배와 통화를 했다고 안심할 순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안다. 내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총을 맞아도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할 양반이다. 게다가 연주는 의식도 없다고 했다.

문득 장진수 놈이 수녀님과 미카엘 신부를 덮쳤을 때가 기억났다. 그때도 이랬다.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시야가 좁아진 느낌.

오직 내가 달려가고 있는 병원만 보인다.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병원 외의 다른 건물들 모습도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오 선배와 연주, 그리고 함께 동승하고 있던 형사 둘이 한 번에 사고를 당해 그런지 병원 앞은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온몸이 땀에 젖은 내가 뛰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경례를 하는 형사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야!!”

초면인 형사도 있는데 대뜸 반말을 지껄여 버렸다. 나는 그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형사 중 한 명이 뛰어가는 내 등을 보며 외쳤다.

“613호입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정신적 여유가 없던 나는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6층이 꼭 60층같이 느껴진다. 평소 이 정도 높이는 전력 질주를 해도 숨도 차지 않았는데 지금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다.

“헉, 헉!”

6층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뛰어나와 두리번거렸다. 몇 호라고 했었지? 조금 전에 들었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때 뒤에서 오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장님.”

고개를 획 돌렸다. 잔뜩 충혈된 눈, 땀에 젖은 얼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링거를 꽂은 밀대를 붙잡고 계면쩍게 웃고 있는 오 선배.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긴 하지만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나는 달려가 눈으로 선배를 살핀 후 외쳤다.

“연주는! 연주는 어떻습니까?”

오 선배는 죽일 듯이 달려드는 날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커피잔을 입에 물고 굳어 있는 연주의 모습이 보인다. 오 선배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붕대를 감고, 한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깁스에 목발을 한 연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과장님!”

오 선배가 급히 부축했지만 나는 병원 복도 바닥에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오 선배가 내 팔을 잡고 끌어 올리려 했지만 그럴 힘도 남아 있지가 않다.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다.

바로 그때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내가 열고 들어왔던 비상구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주야!! 오 선배!!”

울고 있는 듯한 목소리. 나는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목소리 주인을 확인한 뒤 실소를 지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쪽팔린 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관우는 비상구 문을 열고 튀어나오다 발을 헛디뎌 반대쪽 벽에 몸을 부딪치고 중심을 잃었지만 어찌나 급한지 네발로 기며 소리를 질러댄다.

“오 선배! 연주야!!”

연주가 바로 뒤에 있는데 반대편을 보고 울부짖고 있는 관우. 깁스를 하고 종이컵을 물고 있던 연주가 그 모습을 보고 목발로 녀석의 엉덩이를 툭 밀어버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있던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으헉!”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바닥에 고꾸라진 녀석이 뒤를 돌아보자, 무표정하던 연주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시끄러워, 인마. 여기 병원인데 환자들 휴식 방해되게 뭐 하는 짓이야.”

관우는 엉덩이가 밀려 넘어진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 와 연주 다리의 깁스를 만진다.

“너, 너 괜찮은 거냐? 다리 이거 부러진 거야? 어? 어?”

“시끄러워, 금 간 거야. 안 부러졌으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머리는? 머리 붕대는 뭐야? 너 의식 없었다며. 머리 정밀 촬영 해봤어?”

“아 쫌! 조용히 좀 하라고, 이 자식아.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나 괜찮다고.”

관우는 연주 말이 못 미더운 것인지 한참을 살피다 얼른 물었다.

“오 선배는!?”

오진규는 내 옆에 서서 관우를 보며 실실 웃고 있다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도 묻는다, 이놈아.”

관우가 오진규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몸을 살핀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 괜찮다. 뭘 여기까지 오고 그래.”

“하…… 진짜 놀랐습니다.”

관우는 오진규를 살피다 바닥에 누워 있는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과장님? 왜 여기 누워 계세요?”

“…….”

하…… 쪽팔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도 관우 이 녀석처럼 보였을까?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 그냥 뭐.”

관우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준다.

녀석은 상황을 짐작했는지 싱글싱글 웃었지만 감히 과장을 놀리지는 못하고 웃기만 한다.

오진규는 웃음을 참으려 얼굴이 빨개져 있고, 연주는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중이다.

좀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한 나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들의 몸에 감긴 붕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연주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

“미카엘 그 새끼가 갑자기 운전하던 형사를 공격하는 바람에. 설마 그 새끼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다 제가 방심해서 생긴 일이에요.”

오진규도 죄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리다 멈칫했다. 그리고 말없이 연주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뒤 몸을 돌려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관우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상황 파악하고 움직이시죠, 과장님.”

“쪽팔려서.”

“…….”

관우가 힐끔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러다 계면쩍은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 옆에 선 뒤 말했다.

“저도 좀 그런데 같이 잠깐 도망가죠.”

“자꾸 말하지 말고 그냥 따라와.”

“예.”

“두 사람 계속 우리 보고 있냐?”

“예, 계속 보면서 웃음 참고 있는데요.”

“제길.”

“전 이런 상황 익숙한데. 과장님은 처음인가 봅니다.”

“살면서 처음이다.”

“계속 겪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계속 겪기 싫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탄 후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연주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 귀여워!”

오진규도 빙긋 웃으며 닫힌 문을 바라본다. 연주가 한참 웃다가 말했다.

“미카엘 이 새끼 놓쳤다고 잔뜩 혼이 날 줄 알았는데 과장님이 저러시니까 사과도 제대로 못 하겠네요. 아, 왜 이렇게 귀엽지?”

오진규가 연주 어깨동무를 하며 몸을 돌린다.

“어찌 됐건 우리가 폐를 끼친 것 맞아. 최대한 빨리 회복해서 복귀하자고.”

“예, 선배님.”

* * *

한 시간 후 병실. 담배도 안 태우는 나와 관우는 창피함에 흡연 구역에서 한 시간이나 서성거리다 들어왔다.

여성 전용 병실을 쓰고 있던 연주가 절뚝거리며 오 선배의 병실로 온 뒤 그들의 상황 설명이 시작되었다.

오 선배가 침대에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먼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저희 잘못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사하시니 사과는 그걸로 받은 셈 치겠습니다. 상황 설명해 주세요.”

오 선배가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천주교 주교회의에 도착해 신분증과 영장을 보여주고 미카엘 신부 신병 양도를 요청했습니다. 구금 중이다 보니 절차가 꽤 까다로웠지만 영장이 있는 이상 그들도 거부할 명분이 없겠죠. 한 시간쯤 기다리니 사제들이 미카엘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신병 양도받을 때 미카엘 상태는 어땠습니까?”

“초췌한 얼굴이었습니다. 며칠 구금되어 있어 해를 보지 못했는지 밖에 나와서 하늘을 보고 눈을 잘 뜨지 못하더군요.”

“계속하세요.”

“예, 영장을 제시하고 미란다 원칙을 읊은 후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체포 사유에 대해 듣더니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더군요. 그대로 차에 태웠습니다.”

“뒷좌석에 태웠을 텐데요.”

“예, 앞에 운전하는 형사가 타고, 조수석에 연주가 탔습니다. 저와 다른 형사가 놈의 양옆에 앉았고요.”

오진규가 입술이 마르는지 물을 찾자, 눈치 빠른 관우가 얼른 물을 따라준다. 시원하게 물을 한 컵 비운 오진규가 말을 잇는다.

“차에서 그 자식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래전 사건인데 이제 와 다시 수사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시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던 교수가 양심선언을 했으므로, 당신은 사건의 용의자로 다시 수사를 받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말없이 조용히 가더군요.”

오진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그때 나는 놈이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점을 수긍하고 어느 정도 포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꾸도 없이 고개를 숙였으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놈은 역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가 좌회전을 하는 동시에 수갑 찬 손으로 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형사의 목을 졸랐습니다.”

연주가 깁스한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끼어들었다.

“놀라서 놈을 제압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코너를 돌고 있었다는 겁니다. 놈을 떼어내다 운전 중인 형사의 목이 더 졸려졌고, 결국 코너를 도는 도중 핸들이 꺾여 차가 전복됐습니다.”

오진규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차가 뒤집어지고 잠깐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보니 차에서 연기가 나고 있고 사람들이 몰려와 있더군요. 뒤늦게 주변을 보았지만 미카엘이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관우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난다.

“지하철역 근처이니 CCTV가 잔뜩 있을 겁니다. 수거해서 동선 추적하겠습니다.”

“부탁한다.”

“예.”

관우가 급히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지금껏 선량한 신부의 가면을 쓰고 있던 자가 드디어 가면을 벗었다. 본 모습이 나온 이상 도주 중에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연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과 그만해, 이제 됐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이 녀석아. 너만 무사하면 그깟 녀석 백 번을 놓쳐도 된다. 다시 잡으면 되니까. 물론 놈이 다른 사고를 치기 전에 잡아야 하겠지만.

그때 오진규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을 들고 잠시 전화를 받겠다는 눈빛을 보낸 오진규가 전화를 받았다.

“어.”

전화를 받는 오진규의 눈이 커진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오진규가 고함을 친다.

“뭐야!!! 장진수가 병원에서 탈출을 해? 이 미친 새끼들이 경계를 어떻게 섰길래!”

나는 오 선배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탈옥에 이은 또 한 번의 탈주.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것 같아 보이던 녀석이 또다시 도주했다.

하지만 나는 놈에 대한 실망보다 놈과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떠올렸다.

‘장진수 녀석은…… 병원에서 오 선배와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

놈은 미카엘 신부가 탈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이 다시 한번 놈을 움직이게 한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