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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318화 (318/328)

살인의 기억 318화

21. 40년 그리고 35년(18)

울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

나는 관우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상황을 전달받았다.

“언양 휴게소에서 내려서 그다음은?”

-이 미친 새끼가 고속도로에서 무단 횡단을 했습니다.

“휴게소에서 제일 가까운 시내 어디야?”

-휴게소 맞은편으로……. 아, 이 새끼 시내로 가려고 길을 건넌 거네요. 고속도로 벗어나서 1㎞만 가면 나옵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오면 바로 축사가 하나 나오는데 축사 앞길로 계속 내려가면 시내는 아니지만 민가가 나오고요.

“버스 정류장 있어?”

-잠시만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난 후 관우 목소리가 들린다.

-고종 마을 입구라는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축사 앞길로 쭉 내려가면 바로 앞이네요.

“교통상황실에 요청해서 그 정류장 CCTV 확보해.”

-예, 과장님. 아, 그리고 하나 더.

관우가 장진수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놈이 CCTV 화면에 보여주었다는 글귀를 들은 나는 혀를 찼다.

“하, 미친놈이 내가 반성을 하라고 했지, 언제 지 손으로 해결을 하라고 했냐.”

-예?

“아니다, 추적하면서 미카엘만 보지 말고 장진수 놈도 같이 봐.”

-왜요? 어차피 미카엘 추적하면 장진수 놈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글귀 보면 모르겠어? 장진수 놈이 지금 우릴 도와주고 있는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살인범이 왜 우리를 도와줍니까?

관우는 장진수 녀석이 병원에 있을 때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그토록 무섭고 소름 끼치던 연쇄살인범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관우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놈. 달라졌어.”

나는 간단히 놈의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내 말을 듣는 시종일관 놀라워하던 관우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럼 진짜 그 새끼가 반성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반성? 아니, 이건 좀 다르다. 녀석은 피해자나 유가족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었다. 놈의 변화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뀐 것에서 비롯된 거다.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지금 놈이 우리에게 도움 되는 건 맞을 거다. 그러니 놈을 잘 지켜봐.”

-예, 알겠습니다.

“장진수 차림새 어떻게 돼?”

-검은 모자, 검은 바람막이 점퍼, 마스크에 청바지 차림입니다. 안에는 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데 지퍼를 끝까지 올려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안 보일 겁니다.

“알았다, 특이사항 있으면 다시 연락해주고. 휴게소로 경찰들 보냈어?”

-예, 보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무단횡단 한 것도 알렸으니 맞은편 도로도 수색할 겁니다.

“수고했다, 계속 추적해.”

-예, 과장님.

관우와 통화를 끝내고 약 한 시간이 흐른 후 도착한 언양 휴게소.

미리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휴게소를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차피 놈들이 경부고속도를 건너 맞은편 시내로 갔다는 것을 모든 경찰이 알고 있지만 도주자가 휴게소에 뭔가 버렸을 수도 있으므로 수색은 필수다. 버린 물건을 통해 범인의 목적지에 대한 힌트를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휴게소를 그대로 지나쳐 제일 먼저 빠지는 길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난 후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고종 마을 정류장 앞에 차를 세웠다.

한적한 시골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류장 하나. 놀러 왔다면 참 고즈넉한 풍경이다 싶었겠지만 지금 나는 살인자를 추적 중이다.

정류장으로 가 노선을 확인해 보니 이 정류장에 오는 버스는 딱 한 대다. 눈으로 노선을 읽어보며 미카엘이 내렸을 만한 정류장을 가늠해 보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

‘어디냐, 어디로 간 거야 도대체.’

그때 정류장 옆에 놓인 공용 휴지통에 뭔가 끼어 있는 것이 보인다. 동그란 휴지통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철제 휴지통이었고, 안에 검은 비닐 봉투가 씌워져 있었다.

휴지통의 겉면, 구멍이 뚫린 곳에 종이가 둘둘 말려 꽂혀 있는 것을 본 나는 얼른 가서 종이를 빼 펼쳐 보았다.

78고 66XX, 온양 운수.

익숙한 필체. 나는 몇 날 며칠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던 장진수 놈의 일기장에 써 있던 필체와 동일한 글을 보며 종이를 구겼다.

“힌트를 남겼다.”

장진수가 힌트를 남긴 거다. 자기도 미카엘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버스 넘버를 써둔 것이다. 나는 얼른 운수 회사 전화번호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예, 온양 운수입니다.

“경찰입니다, 78고 66XX 차량 현재 위치 확인 부탁드립니다.”

-경찰이요?

“예, 서울경찰청 중대범죄 수사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울산 경찰서에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차량 현재 위치만 확인 부탁드립니다.”

보통 운수 회사에 협조 요청을 하려면 공문을 띄우거나, 경찰서 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하나, 요청한 정보가 차량의 현재 위치 정도라 그런지 상대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잠시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키보드 소리가 들리고 곧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8분 전에 차고로 들어왔네요.

“차고 위치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기사분께 말씀드려서 절대 차 내부 물건에 손대지 말아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내부 물건이라고 하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분실물이나 쓰레기. 하나도 손대지 말라고 해주세요. 제가 지금 갑니다.”

-아, 일단 알겠습니다.

차로 몰아 버스회사 차고로 가자 서른 대가 넘는 버스들이 줄지어 주차된 것이 보인다. 다행히 시골이라 버스가 많지 않아 다행이다.

금세 번호판을 보고 목표 차량을 찾은 나는 버스로 다가갔다. 미리 데스크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버스 앞에서 담배를 태우던 기사님이 날 보고 묻는다.

“경찰이요?”

신분증을 보여준 나는 버스 앞문을 두드렸다.

“여세요.”

두말없이 문을 열어주는 기사님. 내가 먼저 버스에 올라타자 따라 올라온 기사님이 말했다.

“저기 맨 뒷자리에 분실물 하나 있어요. 전달받고 혹시나 해서 살펴봤는데 쓰레기 몇 개랑 분실물이 하나 있더군요. 만지지 말라고 해서 그대로 뒀습니다.”

“분실물이 뭡니까?”

“모자 같던데.”

“검은색입니까?”

“예, 맞습니다.”

장진수 놈의 모자다. 또 힌트를 남겼다. 이 녀석이 지금 우리를 미카엘 신부에게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놈은 지금 미카엘의 행선지를 모른다는 뜻도 된다.

급히 버스 맨 뒷자리로 가니 의자 위에 구겨진 검은 모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모자를 뒤집어 보자 안쪽에 다시 글귀가 있다.

공업 탑 역.

나는 기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노선 중에 공업 탑이란 역 있죠?”

“있죠.”

“거기서 사람 내렸습니까?”

“어…….”

잠깐 기억을 더듬던 기사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내렸습니다. 신부님이 내리셨는데.”

“신부만 내렸습니까?”

“아뇨, 버스 출발하고 몇 미터 갔는데 누가 갑자기 뒷문 두들기며 내려달라고 하더군요. 다음 정류장에 내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거기 못 내리면 다음 정류장이 너무 멀다 싶어서 그냥 내려줬습니다.”

“검은 점퍼에 청바지, 마스크를 쓴 남자. 맞습니까?”

“어…… 맞는데.”

“그 정류장, 여기서 멉니까?”

“아뇨, 별로 안 멀어요. 차로 가면 15분?”

“협조 감사합니다.”

나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차로 달렸다. 놈의 행선지를 모르는 상태로 뒤쫓기만 하면 나는 항상 뒤처질 수밖에 없다. 되도록 빨리 따라붙어야 불상사를 막아낼 수 있다.

차에 올라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 도착한 공업 탑 정류장. 이곳도 역시 한산한 정류장이다.

여중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가방을 메고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급히 정류장을 살폈다. 이번에도 장진수 녀석이 단서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류장에는 휴지통이 없다. 정류장 간이 건물 어딘가에 뭔가를 써놓았을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단서로 보일 만한 것은 없다.

나는 인상을 쓰며 두 개의 길을 번갈아 보았다. 버스가 온 길, 그리고 버스의 진행 방향. 둘 중 어디로 갔을까? 아니면 혹시 다른 버스를 탔을까?

노선이 적힌 안내판을 노려보고 있자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옆을 보니 정류장에 앉아 있는 여중생이 날 빤히 보는 것이 보인다. 그래,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니야.”

여중생은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앳된 아이다. 책가방을 고쳐 멘 아이가 말했다.

“이상해 보이는데요.”

나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경찰.”

“오, 이거 레알?”

“어, 레알. 너 여기서 수상한 사람 못 봤냐?”

여중생이 지그시 날 바라본다. 인상을 쓴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나 말고.”

“아저씨보다 수상한 사람은 없었는데요.”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노선을 바라보다 이 정류장도 버스가 한 대뿐이라는 것을 보고 다시 여중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여중생이 손목시계를 본 뒤 말했다.

“어, 한 30분 정도요.”

“신부님 못 봤어? 버스에서 내렸는데.”

“어? 아까 정류장 올 때 놓친 버스. 거기서 내리는 거 멀리서 봤어요.”

“어떤 아저씨가 뒤따라 내렸지?”

“네, 맞아요. 저쪽으로 가던데.”

아이가 가리키는 곳. 그냥 아무것도 없는 도로다. 주변에 민가도 없고 논과 밭만이 늘어져 있다.

“고맙다. 밤길인데 조심해서 집에 가고.”

나는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빠르게 뛰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밖에 아는 것이 없다. 나는 무턱대고 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 백 미터를 뛴 후 나는 내가 어디로 뛰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길가에 있는 나무의 가지에 장진수 녀석의 찢어진 환자복 쪼가리가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길 안내를 제대로 하고 있다.

신호는 매우 간단했다. 직진은 길가에 있는 나뭇가지에 환자복이 묶여 있었고, 우회전은 우회한 뒤 십 미터 안쪽에 있는 나뭇가지에 찢은 환자복 쪼가리를 묶어놨다.

나는 직선으로 뛰며 우회전 코스가 나오면 그쪽 나뭇가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정류장에서 약 6㎞는 뛴 것 같다.

전력 질주를 하다 도저히 몸이 버티질 못해 걷다 뛰기를 반복하던 바로 그때 우측 통로 안쪽 십 미터 지점에 묶인 환자복이 보인다.

물론 여기까지 오면서 우측으로 방향 전환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전과 지금이 다른 점 하나가 있다. 바로 우측 외길의 끝에 커다란 축사 건물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미카엘이 건물 내부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총을 꺼냈다.

“후우, 후우…….”

일단 턱까지 찬 숨부터 좀 돌리며 건물 전체를 확인했다. 건물은 총 두 개. 하나는 약 삼백 평 규모의 넓은 축사 건물이고, 하나는 옆에 조그맣게 지은 창고 건물이다.

핸드폰 GPS로 현 위치 정보를 찍어 관우에게 보낸 나는 문자로 지원 요청을 보낸 후 최대한 몸을 낮추고 공장 건물로 다가갔다.

다행히 사위가 어두워 내 몸을 숨기기 용이한 시간. 시골의 밤은 생각보다 더 어둡다.

나는 총을 들고 일단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창문을 찾았다. 겉으로 보이는 창문은 두 개. 하지만 둘 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내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나는 건물을 크게 한 바퀴 돈 후 결국 다시 제자리로 와 철문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수칙대로라면 지원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지만 미카엘이 장진수를 죽이는 일이 생기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철문을 슬쩍 밀어보았으나 무거운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시 힘을 주어 문을 밀어내려던 바로 그 순간 내 시야가 서서히 흑백으로 변했다.

긴박한 순간이지만 나는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에 중요한 힌트를 주곤 하는 기억을 읽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에 손을 올린 채 서서히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있는 세상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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