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19화 (319/328)

살인의 기억 319화

21. 40년 그리고 35년(19)

‘헉, 헉, 헉…….’

숨이 차고 몸의 모든 근육에 통증이 올라온다. 종아리 근육에 금방이라도 쥐가 날 것 같은 강한 압박이 느껴지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허리를 숙인 자세로 한쪽 손으로 뭔가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간은 새벽녘. 아직 태양이 고개를 내밀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슴푸레 떠오르고 있어 서서히 사위가 밝아지고 있다.

‘헉, 헉…….’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지만 괜찮다. 그 옛날 데이빗 가레자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던 수도자들에 비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은 엄살일 것이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에 고립되어 자신을 연단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일에 힘썼던 수도사들.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두레박에 의존해 살던 그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질질 끌고 가던 무거운 짐은 점점 더 무게를 더해가고 있지만, 이것은 천로역정 속 크리스천이 등에 메고 고행하던 죄와 같다.

나는 이 무거운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십자가 언덕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 하루가 무척 고단했지만 기분이 좋다.

나는 언덕을 올라가다 바위 턱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바위에 앉아 내가 들고 오던 죄를 바라보니, 양복을 입은 남자의 시신이 보인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남자는 언뜻 무척 선하게 보이지만 나는 안다. 나의 정화 작업을 보고 놀라던 그의 눈빛을.

그것은 악마의 유혹에 당해 정화 작업을 혐오하는 눈빛이었다.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남자도 함께 정화하기로 했다.

나는 가만히 남자의 시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멀리 건물을 바라보았다. 나의 안식처, 나의 십자가 언덕. 심판의 날 그분께 바칠 모든 것이 있는 죄의 정화조가 바로 저 앞에 있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남자 시신의 발목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이리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둘을 정화하는 도중 그를 목격한 하나를 추가로 정화했다.

또한 하나를 정화하는 도중 전화로 상황을 전달받은 또 하나를 정화하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왔다.

가까운 대구와 달리 서울에서 여기까지 죄를 옮기기에는 너무 멀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많은 죄를 보관하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죄를 묻어두었다. 그곳에도 신의 자애로운 음성이 닿기를 바라면서.

남자의 시신을 끌고 십자가 언덕에 도착해 두꺼운 자물쇠로 잠가둔 문을 밀자, 나의 십자가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태생부터 죄를 짓고 태어난 이들이 신에게 갈 완벽한 준비를 하고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 나는 경건한 얼굴로 손을 모았다.

여호와 하느님이 창조하신 동물 중에서 뱀이 가장 교활했다.

뱀이 여자에게 ‘하느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하고 묻자 여자가 뱀에게 대답했다. ‘우리가 동산의 과일을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은 하느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뱀이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느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였다.

여자가 그 나무의 과일을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가 그 과일을 따서 먹고 자기 남편에게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인간의 시작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인간은 태초부터 죄를 짊어지고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그리고 그 계획 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

나는 경건히 기도를 올린 후, 남자의 시신을 질질 끌고 원통 사이를 걸었다.

약 사십여 개의 원통 속에 깨끗하게 정화된 죄들이 둥둥 떠 있다. 이 얼마나 찬란한 모습인가?

원통 사이를 걸어 맨 안쪽으로 들어가니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는 제단이 나온다. 그리고 제단 앞에 남자와 여자의 시신이 누워 있다.

나는 새로 가져온 남자의 시신을 그들의 옆에 눕혔다.

나란히 누운 세 사람은 오늘 내가 정화를 위해 데려온 어린 양들이다. 나는 세 사람을 나란히 눕히고 그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거룩하신 하느님. 내 안에 거하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내가 소멸하지 않기 원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 맘대로 본 것에 대해 그들의 눈을 용서해 주소서. 그들 맘대로 생각한 것에 대해 그들의 머리를 용서해 주소서. 그들 맘대로 먹은 것에 대해 그들의 혀를 용서해 주소서. 아버지 하느님, 그들에게 영적 감각이 없는 것은 성령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말을 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보고 듣고 우리 안의 주님을 너무 학대했기 때문에 영혼이 해골같이 말라 죽은 상태에 있어서 육신은 그저 껍데기를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 구의 시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잡초와 같은 악은 돌보지 않아도 그냥 잘 자랍니다. 세상 임금이 마귀이고, 이 세상 신이 사단이기 때문에 악은 가만두어도 잘 자랍니다. 하느님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 주변의 모든 죄는 곧 나의 죄입니다.’

나는 다시 높이 달린 나무 십자가를 보며 두 팔을 들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시옵소서. 주여 옳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님의 품꾼으로 개와 같은 자들을 주님 품에 안길 어린 양으로 탈바꿈시키려 합니다.’

나는 원통 속에 든 수많은 시신들을 돌아보며 정화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세 명의 남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들을 보세요. 신을 믿는 자들은 삶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뀝니다. 언어가 바뀌며 모든 것이 바뀝니다. 가정이 달라지고,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됩니다. 얼굴이 빛이 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당신들 눈앞에 그러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장님과 다름없습니다.’

나는 천천히 세 구의 시신에 입혀져 있는 옷들을 벗기고 그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부끄러워 마세요, 당신을 세상에 보낸 주님께서 처음 주셨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포르말린, 알시안 블루, 알리자 레드 에스, 트립신이 든 약병을 준비한 나는 먼저 그들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나의 수건이 그들의 몸을 스칠 때마다 그들이 지은 죄의 무게가 덜어지는 기분이 든다. 평소와 다르게 한 번에 세 구의 시신을 정화하느라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그때.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신 십자가에서 환한 빛이 느껴진다. 눈이 부셔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보았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나는 수건을 내동댕이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나의 길은, 나의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셨으니.

* * *

나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휘청거렸다. 어지러움은 없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상태로 세상에 돌아왔다.

나는 철문의 잠금장치를 붙잡고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이 미친 새끼가…….”

미카엘. 도대체 무슨 짓을.

나는 기억 속에서 보았던 엄청난 수의 원통을 다시 떠올렸다. 장진수의 아지트에서 보았던 원통과 같은 형태였으며, 불투명한 액체들 속에 사람으로 보이는 실루엣들이 있었다. 그게 다 시신이라고? 정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나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잡았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단순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점 때문은 아니다.

놈이 처음 건물로 들어갈 때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던 시신. 검은 뿔테를 쓴 남자의 시신과 내가 보았던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이 겹쳤기 때문이다.

“아버지…….”

기억 속에서 본 시신은 분명히 아버지였다. 기억 속 놈의 생각에서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갔다 왔음도 알아냈다.

가장 죄가 많은 곳에서 가까운 데에 어머니를 매장했다는 생각은 유명한 사찰인 보광사 인근에 시신을 묻었다는 뜻이다.

나는 무릎에 댄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개새끼가.”

나는 고개를 돌려 철문을 노려보았다. 미카엘이 살인자라는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기억이 진실이라면 이 건물 안에 모든 증거가 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거대한 철문을 밀었다. 윤활유가 잔뜩 발라 있는지 그 큰 철문이 열리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둠에 몸을 숨긴 나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틈만 연 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컴컴한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은 아니다. 어렴풋이 사주 경계를 할 수 있는 어둠이다. 십 미터 내에 누군가 서 있다면 실루엣 정도는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나는 발에 뭔가 딱딱한 것이 차이는 것을 느끼고 멈췄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니 매끈하고 동그란 아크릴 같은 것이 만져진다. 손으로 크기를 가늠한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억 속에서 본 원통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건 분명히 원통이다. 이 안에 미카엘이 정화했다고 믿는 인간의 시신이 단백질 표본화되어 보관 중일 것이다.

나는 총을 겨눈 채 원통을 피해 걸었다. 중간에 또다시 원통에 발이 걸렸지만 피해가며 조금씩 전진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가던 그때, 내 귀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고가 워낙 컸기에 소리가 윙윙 울린다.

나는 한 원통 뒤에 숨어 몸을 낮추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토마스.”

미카엘. 그 자식의 목소리다. 그런데 방금 장진수 녀석의 세례명을 불렀다. 역시 그 녀석도 여기 있는 거다.

“미카엘.”

장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짐작했을 때 둘은 꽤 떨어진 상태로 마주하고 있는 모양이다. 서로 적어도 10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너는 변함이 없구나. 여전히 의심하고, 경계하였어.”

“나는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죄를 지은 것이다.”

“내가 너의 세례명을 토마스로 지은 이유를 아느냐? 토마스는 예수님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반응을 한 가장 열성적이고 강직한 제자였다. 그는 부활을 의심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야 믿겠다고 했지. 널 처음 보았을 때 넌 토마스와 같이 나를 의심했었다.”

“…….”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마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본 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외친 그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냐?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말씀하셨다. 잊었느냐?”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나는 뛰어나갈 타이밍을 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리는 미카엘의 정확한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 무턱대고 뛰어나갔다가 놈에게 무기라도 있으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그때 이를 가는 장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님 손을 잡고 절벽을 따라 걸으면 나도 장님을 따라 절벽에서 떨어진다고 배웠다. 그걸 미카엘 너에게 배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장님은 세상의 목자들이 아니라 바로 너임을. 나는 적어도 마지막에는 사람으로 죽을 거다. 너와 같은 악마로 죽지 않을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