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320화
21. 40년 그리고 35년(20)
나는 자세를 낮추고 원통 옆으로 몸을 내밀었다. 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적어도 30미터는 떨어진 곳이다.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제단의 위치쯤 될까?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전진했다. 걸어가면서도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결국 이름대로 살게 되는구나. 그 이름을 내가 지었으니 이 또한 나의 죄이다.”
“더 이상 개소리하지 마! 넌 틀렸어, 네가 하는 짓은 정화가 아니야! 네가 내 어머니를 죽였을 때도 나는 수십, 수백 번 의심했다. 정말 이것이 옳은 거냐고! 너는 내게 수백, 수천 번의 거짓말로 날 현혹했고!”
“아이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울타리를 벗어난 어린 양에게 사악한 뱀의 혀가 닿았구나.”
“…….”
“토마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어린 시절 너를 학대하던 양아버지가 죽었을 때 네가 느꼈던 해방감을. 그것은 내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었다. 너도 인정하지 않았느냐?”
“…….”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계속 전진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원통들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실루엣. 서로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대화하고 있는 둘이 보인다.
나는 총구를 겨누고 왼쪽의 사람을 겨냥했다. 미카엘 신부의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카엘이 다시 말했다.
“너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내 다리를 붙잡고 구원에 감사를 표했다. 내 말이 틀렸느냐?”
“…….”
“나는 신의 음성에 따라 너를 구원했다. 그 대가가 이것이냐?”
“개소리. 넌 죄 없는 우리 어머니까지 죽였다.”
“아담을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만든 것은 이브였다. 그러나 알면서도 하느님을 거역한 이는 아담이다. 남자 혼자의 죄도, 여자 혼자의 죄도 없다. 모든 죄의 대가는 함께 받는 것이다. 네 어미는 자식이 학대당한 것을 못 본 척했다. 너도 알지 않느냐?”
“나는……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는 양아버지 그 개새끼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날 키워내기 위해 모른 척했던 거야!”
“그것을 지금에 알았다고 무에 달라지겠느냐, 이미 너는 네 손으로 그녀를 죽였는데.”
“이…… 이이…….”
“잊었느냐? 네 손을 움직인 건 나였지만, 그 손의 주인은 너였다는 것을.”
“으…… 으아아아아!!!”
오른쪽의 실루엣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공중으로 공포탄을 쏘았다.
타앙!
“둘 다 멈춰!”
어둠 속 실루엣이 멈칫한다. 두 사람 모두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총구를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구종식. 너를 연쇄살인사건 및 친족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긴급체포한다.”
어둠 속 두 실루엣은 움직임 없이 내 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총구를 하늘로 향한 뒤 공포탄을 쏘았다. 총알이 천장에 맞으며 잠깐 불꽃이 튈 때 보았다. 왼쪽에 있는 이가 미카엘이 맞다.
나는 다시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말했다.
“장진수.”
“…….”
“대답해.”
“……네.”
“불 어디 있는지 알아?”
“모릅니다.”
“찾아서 켜.”
“…….”
“불 켜라고.”
머뭇거리던 장진수의 신형이 조금씩 미카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보인다. 다행이다, 둘이 붙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서. 안 그랬다면 둘 중 한 명은 시신으로 발견했을 거다.
나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미카엘의 실루엣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신형이 약간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는 즉시 하늘로 총구를 들고 발포했다.
타앙!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
“신부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다 알아. 경찰의 공포탄은 세 발까지야. 방금 쏜 게 마지막 공포탄이고 이제부터 실탄이다.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대가리에 총알 구멍 내준다.”
“…….”
어둠 속 실루엣의 양손이 서서히 들리는 것이 보인다.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지만 일단 저건 공격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나는 놈의 실루엣을 노려보며 청각을 돋우었다. 어둠 속을 걸어 다니며 조명 스위치를 찾고 있는 장진수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미카엘의 실루엣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말했다.
“미카엘.”
“…….”
“대답해.”
“……네.”
“네 부모님. 울산에서 죽은 네 부모님과 여동생. 그거 네 짓이지?”
“…….”
“다시 묻는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죽였나?”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개새끼가 끝까지 거짓말을!”
나는 울컥했지만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호흡을 했다.
“좋아, 그건 경찰서 가서 이야기하고. 하나 더 묻겠다.”
“…….”
“1989년 3월. 대구에서 남자를 죽였나?”
“…….”
“검은 뿔테, 대구 서문시장 앞 공중전화에 있던 남자다.”
“…….”
“남자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확인한 주소지로 가 아내도 죽였다. 맞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순간 검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내가 아무것도 못 봤다면 모를까 놈의 기억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겨우 내 손가락을 심리적 제어 안에 두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후…… 다르게 묻지.”
나는 어둠 속 실루엣을 노려보며 말했다.
“1989년 3월에 대구에서 한 남자를 정화한 적이 있나?”
“…….”
“대답해.”
“당신 뒤에 있습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숨어 있던 거대한 원통이 내 등 뒤에 있다. 여기 아버지가 계시다고? 1989년부터 이곳에. 이 차가운 곳에 계셨다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창고 내부에 불이 켜졌다. 오래된 전등은 천장에서 내려와 머리 위 4미터 상단에 떠 있으며, 비슷한 전등은 열 개가 넘었다.
백열등의 불이 켜지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시력이 상실되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원통 속에 참혹한 모습으로 투명화되어 약품 속을 부유 중인 시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게 내…… 아버지라고?”
바로 그때 장진수의 고함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형사님!”
나는 분명 녀석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총을 들고 있던 모습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눈앞에 그토록 존재를 알고 싶었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 내 사고는 그대로 정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정화!”
미카엘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울린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피가 잔뜩 엉겨 붙은 부서진 십자가를 든 미카엘이 내 머리 쪽으로 십자가를 망치처럼 휘두르고 있다.
빠악!!!
“커헉!!!”
뒤늦게 돌린 총구.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미카엘이 아니라 장진수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미카엘이 휘두른 십자가에 머리를 강타당한 녀석이 피를 뿌리며 오른쪽으로 쓰러지고 있다.
“장진수!”
나는 쓰러지고 있는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파 넣고 부축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지원 요청한 경찰들의 요란한 사이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진수!!”
나는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녀석을 안전하게 바닥에 눕히고 바로 총구를 들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창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는 미카엘의 뒷모습이었다.
뒤늦게 발포했지만 총알은 놈이 닫고 나간 철문을 맞고 튕겨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을 뒤쫓으려 일어났다가 쓰러져 있는 장진수를 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다.
나는 다시 주저앉아 녀석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인마! 정신 차려! 정신 잃으면 안 돼!”
얼굴의 반이 정수리 부근에서 울컥거리며 흘러내리는 피로 덮여 있는 장진수. 녀석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미…… 미카엘을…….”
“그래, 계속 말해, 정신 줄 잡고 있으라고!”
“혀, 형사님…….”
“그래, 말해, 말!”
“저는…… 인간으로…… 죽을 수 있을까요?”
“…….”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미카엘의 공격에서 나를 지켰고, 악마를 쫓아 증거를 잡고 체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지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은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어떨까? 신도 이 녀석을 용서해 주지 않을까? 나는 결국 녀석의 가늘게 뜬 눈을 보고도 답을 해주지 못했다.
녀석의 눈이 점점 감기고 있다. 나는 놈의 상체를 붙잡고 볼을 때렸다.
“야! 정신 잃으면 안 돼!”
그때 철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나며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119! 빨리! 119 불러요!”
총을 들고 달려오던 형사들 중 한 명이 상황 파악을 하고 얼른 핸드폰을 드는 것이 보인다. 나는 장진수를 다시 흔들며 말했다.
“죽지 마라, 너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이 새끼야. 감옥 가서 정당하게 죗값 받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 그래야 사람으로 죽을 수 있다, 이렇게 쉽게 죽기만 해봐!”
이미 의식을 잃은 놈을 흔들고 있을 때, 울산 경찰서 형사가 달려와 놈을 살핀다.
“의식 잃었습니다. 더 흔들면 위험합니다, 과장님!”
“119 불렀습니까?”
“예! 도착까지 7분 걸린답니다. 그런데…….”
형사가 그제야 놀란 눈으로 창고 내부를 바라본다. 엄청난 수의 원통이 세워져 있는 창고. 오래되어 불투명해진 원통이지만 그 안에 시신이 있음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이게 다 뭐…….”
형사가 의식을 잃은 진수 놈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거 이놈이 한 짓입니까?”
“…….”
나는 조심스럽게 장진수를 내려놓은 뒤 다시 한번 미카엘이 아버지 시신이라고 했던 통을 노려보았다.
“아니요, 이 녀석 짓이 아닙니다.”
“그, 그럼 누구 짓입니까?”
나는 미카엘이 사라진 창고 뒷문을 노려보며 남은 총알을 점검한 뒤 말했다.
“지금 그 새끼 잡으러 갈 겁니다.”
총을 든 채로 달려가려던 나는 멈칫한 뒤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는 장진수를 내려 보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나는 형사에게 말했다.
“반드시 이 새끼 살려놓으세요.”
“예……?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만.”
“그 새끼 죽으면 너도 내 손에 죽어.”
갑자기 반말을 하는 날 보며 움찔하는 형사. 하지만 그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아는지 침만 꿀꺽 삼키며 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형사를 노려보다 재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총구를 들고 뛰어가는 날 눈치챈 형사들이 뒤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용의자는 사제 복장을 한 70대 초반의 남성! 흉기를 소지 중이며 체포 중 반항 시 발포 허가합니다!”
뒤에서 달리는 형사들이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철컥철컥 들려온다.
철문을 발로 차고 밖으로 나오니 건물 뒤 어둠에 싸인 산이 시커멓게 보인다. 나는 총구를 겨눈 채 검은 숲으로 뛰어들었다.
‘넌 내가 잡는다, 이 악마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