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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323화 (323/328)

살인의 기억 323화

22. 악(惡)의 필름(3)

여덟 살 때. 횡단보도에서 보았던 아저씨의 기억. 바람을 피우던 아저씨의 그 기억을 읽은 이후로 수많은 기억들을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내가 본 기억은 단연코 가장 짧은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구부러진 나뭇가지에 팔을 걸고 빙글 돌아 방향 전환을 하던 그 순간. 나는 이 나무 뒤로 올라가 수풀 속에 숨는 미카엘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어두운 숲, 언덕 위에 있는 시커먼 수풀을 향해 총을 겨누고 나직하게 말했다.

“듣고 있는 거 안다, 구종식.”

나는 미카엘이란 호칭을 하지 않았다. 세례명은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이며 세례 때 새 이름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뜻한다. 놈은 그런 세례명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셋 센다. 나오지 않으면 수풀 속에 총알부터 몇 발 박아줄 거야. 총알에 눈 없다. 어디 한군데 구멍 나도 내 탓은 아냐. 널 보고 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수풀에 실수로 발사한 거니까.”

여전히 검은 수풀은 미동이 없다. 나는 총을 장전하며 말했다.

“하나.”

“둘.”

그때 수풀이 약간 흔들린다. 검은 수풀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내 장전 소리를 들었는지 양손을 하늘로 들고 있다.

나는 그림자를 노려보며 총구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내려와.”

머뭇거리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언덕길을 내려온다.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했다 하더라도 형사도 추적이 힘들 만큼 전력으로 도주한 만큼 체력적인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다.

그는 다리가 풀렸는지 야트막한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휘청거린다.

놈이 언덕 중간까지 내려오자 드디어 얼굴이 보인다. 나는 장전된 총을 살짝 떨었다. 쏴버리고 싶은 충동이 머리를 지배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구종식, 너를 2027년 1월 13일 23시 54분 부로 살인, 존속살인, 사체 훼손 및 유기 혐의로 체포한다.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 질문 있나?”

“…….”

놈은 여전히 양손을 들고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총구로 방향을 지시하며 말했다.

“뒤로 돌아, 손은 계속 올리고.”

“…….”

놈이 천천히 뒤로 돈다. 나는 쉽게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이곳은 깊숙한 산속이고, 지금은 매우 어두운 밤이다. 이놈에게 불의의 공격을 받을 경우 놈을 놓칠 확률이 높다.

나는 총구를 겨눈 채 천천히 다가가 발로 놈의 오금을 밀어 무릎을 꿇렸다.

“욱!”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옅은 신음 소리를 내는 구종식.

나는 다시 발로 놈의 등을 밀어 엎드리게 한 다음에 총을 집어넣고 수갑을 꺼내 놈의 손을 결박했다. 그제야 놈이 입을 연다.

“형제님이 몰라서 그런 겁니다.”

“형제라고 부르지 마, 이 구역질 나는 새끼야.”

“정말입니다, 백 년만 지나보십시오. 아니, 당장 십 년만 지나도 작금의 내 행위가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세상도 알아줄 겁니다. 이것은 현재의 법률과 종교적 율법의 차이가 빚어내는 오해일 뿐입니다.”

“무슨 오해? 네가 사람 죽인 게 오해라는 뜻이냐?”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놈의 뒷목을 잡은 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나는 놈을 노려보다 몸을 돌려 건물이 있던 곳을 보게 했다.

“저기, 죽어서도 하늘로 가지 못하고 저 자그마한 원통의 액체 속에 갇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나?”

구종식은 멀리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육신은 껍질입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지요. 그들의 혼은 가장 완벽하고 깨끗한 형태로 신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가 도왔고요.”

나는 놈의 멱살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금방 코가 닿을 정도의 위치까지 가까이 당긴 채로 놈의 눈을 노려본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까 말한 거 진짜냐?”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1989년 3월에 네가 죽인 남자. 내가 서 있던 곳의 바로 뒤에 있던 원통에 그 사람이 있다는 말.”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권총의 손잡이 부분으로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어억!”

수갑 찬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는 구종식. 나는 놈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눴다.

“내가…… 내가 말이다.”

놈은 수갑을 찬 손을 들고 손바닥을 편다.

“왜 이러십니까?”

놈의 관자놀이에 닿은 총구가 바들바들 떨린다.

“내가 말이다, 인내심이 지금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야. 그러니까 내 성격 테스트 그만하고 말해.”

“무얼 말입니까?”

“네놈이 죽인 남자. 그 사람이 그 원통 안에 들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도…….”

다시 같은 말을 하려다 관자놀이에 겨눠진 총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구종식이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이 거기 있는 건 맞습니다.”

“…….”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든다.

신의 사제라는 인간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연달아 여러 명을 죽이고 그들의 시신을 훼손했다고? 그리고 그중에 내 부모님이 계신다고?

이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기억 속에 있던 내 다정한 아버지. 거칠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 속에 사랑이 가득했던 어머니.

어딘가 성격이 서로 바뀐 것 같지만 또 따로 잘 어울리는 두 분의 사랑 속에서 나는 남들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모든 걸 이놈이 망친 거다.

순간 내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며 방아쇠에 걸고 있는 검지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만큼 관자놀이에 대고 있던 총구에 가해지는 힘도 강해진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에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곳은 성당에 딸려 있는 곳이었다.”

구종식이 손바닥을 편 채로 곁눈질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던 쌍문동 성당이 아닙니까?”

“…….”

나는 놈의 관자놀이를 밀며 말을 이었다.

“나는 종교가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때 수녀님의 가르침은 기억이 난다. 사랑의 하느님은 나와 타인을 모두 사랑하라 하셨다. 간음하지 말라 하셨고, 살인하지 말라 하셨다.”

구종식은 내 말을 듣고 살짝 인상을 썼다. 나는 놈의 관자놀이를 더 밀며 손을 떨었다.

“네 행위가 정화라는 소리를 한 번만 더 하면 대가리에 바로 구멍을 내줄 거다, 이 호로 새끼야.”

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제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욕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욕은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욕이다. 본래는 호래자식이 맞는 표현인 이 욕은 홀아비, 혹은 홀어미 밑에서 자라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이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고아로 자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욕이며, 아이러니하게 가장 많이 들은 욕이다.

사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기도를 할 때 그들은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말로 시작을 알린다. 그런 사제에게 아버지 없이 자란 놈이라 부르는 것은 너의 신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절대 사제들 앞에서 이런 욕을 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전후 사정을 정확히 알면서 이 욕을 썼다.

구종식은 화를 간신히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옳습니다, 형제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형제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

“예,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형사.”

“예, 형사님. 그럼 묻겠습니다. 세상에 단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구종식은 그런 날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바이러스? 범죄? 아닙니다. 단시간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건 전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묻지 말고 그냥 말해, 이 새끼야.”

“기사들의 난, 독일 농민전쟁, 카펠 전쟁, 뮌스터 반란을 비롯해 슈말칼덴 전쟁, 제후 전쟁과 각종 종교 전쟁, 30년 전쟁과 삼왕국 전쟁,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이 신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아닙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인간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그것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음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미련한 행위입니다.”

“네가 저지른 살인이 그런 종교 전쟁과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그럼?”

“신의 뜻을 확립하기 위한, 악마들과 이단의 죽음은 신의 뜻과 같다는 말입니다.”

“…….”

대충 미친 새끼인 줄 알았는데 구체적으로 또라이 새끼였다.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

나는 총을 잡은 손을 바꾸며 놈의 관자놀이를 다시 밀었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백성도, 일반 신도도 아니다. 최고 상위 지휘자다. 놈들이 자기 이권을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 종교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억지를 부린 것이 종교 전쟁이고. 지금 네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누가 그런!”

나는 놈의 머리를 총구로 밀며 외쳤다.

“아가리 닥쳐!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땐 내 인내심이 바닥날 거야.”

내가 진짜 쏠 듯한 기세를 뿜어내자, 구종식은 오히려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눈을 감는다.

“대화가 되지 않는군요. 좋습니다, 쏘고 싶으시다면 쏘세요.”

“……뭐?”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는 자. 천국의 문 앞에서 주님의 환대를 받을 것이다.”

“…….”

놈의 마지막 말이 내 이성의 마지막 끈을 놓치게 하였다. 놈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믿고 있다. 자신 때문에 세상에 남겨진 수많은 유가족들의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놈이 자신이 이 행위로 인해 천국에 갈 거라 믿고 있다.

결국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오냐, 죽어라. 너 같은 새끼는 살 가치가 없으니까.”

그래, 쏴야 된다. 이런 새끼는 살 가치가 없다.

건물에 불이 켜지고 쓰러진 장진수 녀석을 부축할 때 힐끔 보았다. 건물 내부에 있는 원통의 개수는 언뜻 삼십 개도 넘었다.

그곳에 모두 시신이 있다면 이놈은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인 것이다. 이놈은 신의 사제가 아니라, 악마의 사제이다. 이놈은 죽어야 한다.

“가면 꼭 두 눈 뜨고 봐라. 네놈 앞에 찬란한 천국 문이 있을지, 머리 세 개 달린 개새끼가 지키는 지옥문이 있을지.”

나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새끼가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으며 순교하는 듯이 죽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손가락에 힘을 풀고 말했다.

“구종식.”

“…….”

“고양이를 죽일 때 기분이 어땠지?”

처음으로 놈이 움찔한다. 감았던 눈을 파르르 떨며 뜬 놈이 날 바라본다. 나는 비틀어진 미소를 입에 걸고 말했다.

“개는 어떻고?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내던가?”

“…….”

나는 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입속에 총구를 박아 넣었다.

“너는 종교로 위장을 하고 있어. 네 마음속에 물어라. 너는 종교인으로 살기 전부터 미친 살인마였다.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라. 짐승들을 죽일 때의 너와 종교를 네 멋대로 해석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지금의 네가 어디가 다른지.”

“읍…… 으읍…….”

입에 총구가 박힌 놈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날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놈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깃든 것을 보았다. 물론 지금은 매우 작은 균열일 뿐이지만 그 정도면 됐다. 적어도 순교자의 죽음이란 굳건한 착각에서 깨어나게 한 것으로 내 목적은 달성됐으니까.

“잘 가라. 가서 지옥문이 어찌 생겼는지 확인해.”

놈의 입에 쑤셔 박은 총구가 서서히 떨린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내 품에서 전화기가 진동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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