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출판사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지금까지 적어놓았던 습작들을 전부 확인해보기로 했다.
“많네..”
어린 시절부터 하루에 한 시간씩 적어왔던 소설들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다.
“완결이 나지 않은 것들도 있고, 내용이 너무 단순한 것들도 있고.”
전부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적은 작품이었다.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 대충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났다.
“끄응. 어렵네.”
이사벨한테 물어보니 투고한 작품은 오직 [사막의 전갈]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작품들은 왜 투고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건 내일 아침에나 물어보고.
‘일단, 가볍게 손 좀 풀어볼까?’
군대에 가기 전까지 하루에 한 시간씩 글을 썼던 나다.
돈을 벌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피곤하더라도 노트북으로 꼭 한 시간씩 글을 썼다.
하지만, 군대에 간 21개월 동안은 키보드에 손을 대본 적이 드물 정도로 사지방에도 가지 않았다.
내 딴엔, 생각보다 적지 않은 요금을 내야했기에, 정말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손이 무뎌졌다.
‘시놉시스를 먼저 적어야지.’
쉽게 말하면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시작부터 완결까지 러프하게 적어놓는 건데, 연재를 하다 혼란스럽거나 혹은 갈피를 잡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무슨 내용으로 할까.....’
메모장을 켜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무난한 건.... 역시 판타지인가?’
판타지의 장점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적는다는 것이다.
유치하기도, 무섭기도, 부끄럽기도 한 자신의 상상력을 가장 많이 발휘할 수 있는 소설이 바로 판타지가 들어간 소설이었다.
‘세계관은 어떻게 할까.’
무슨 주제로 글을 적을 것인가를 정했으니 이제 세계관을 정할 차례였다.
이세계로 가는 퓨전 판타지, 과거의 이야기를 변색한 대체역사 판타지, 현실세계에 몬스터가 등장하는 현대 판타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연습용이니까 판타지보다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세계관을 그리자.’
현실에서 마법이나 초능력을 사용하는 판타지 소설로 세계관을 잡았다.
‘마법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설화를 배경으로 적어볼까?’
세계 어딜 가나 존재하는 요괴나 마물, 몬스터에 관한 설화를 현실 세계에 결합해 보면 어떨까?
“음. 괜찮은데? 주인공은 남자가 아닌 여자로 하자.”
제목은 대충 [몬스터 세계]라고 적은 다음 나는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평범한 고등학교를 다니는 에나는 소포모어에 진입한 순간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갑자기 머리에 여우귀가 돋아나고, 허리에는 9개의 꼬리가 나타났다.
손톱은 더욱 길어졌으며, 백인인 피부가 더 하얘져 오히려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에나는 꿈이라고 생각하며 팔을 꼬집고, 소리도 질러보았지만 그건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머리에 난 여우 귀와 허리에서 나타난 꼬리를 어떻게든 감추려 해봤지만, 결국에는 감추지 못하고 가족들한테 들켜버렸다.
외관마저도 바뀌었는지 가족들은 에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에나는 가족이 부른 경찰들을 피해 집에서 나가야 했다.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집히는 게 없었다.
그냥 평소와 같이 잠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머리와 몸에 이상이 생겼다.
너무 생생한 현실에 제발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에나는 곧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찾았다.’
에나의 앞에 나타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동양인 남성.
동양인 남성은 에나를 보자마자 묻지도 않고 곧 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꺄아아아아아아!’
대체 왜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이유를 알지 못한 에나는 도망치기 바빴다.
‘뭐, 뭐지?’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에나는 달라진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100m를 달리는데 17초나 걸릴 정도로 저질체력이었던 에나는, 신기할 정도로 몸에 기운이 넘치고 발이 빨라졌다.
다만, 몸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뭐야. 하프 몬스터였나?’
넘어져 있는 에나를 바라보던 남성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에나를 일으켰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마치 염력이라도 사용하는 것처럼 몸이 강제로 일어나지자, 에나는 당황하며 남성을 바라보았다.
‘나, 나를 죽일 건가요?’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하프니까.’
‘하, 하프?’
‘뭐야. 그것도 모르고 있어?’
남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에나를 보며 말했다.
‘네 조상 중에 몬스터가 있다는 거야.’
‘.....!’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 일단 따라와. 너 같은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게.’
에나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저 남자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남아있는 선택지도 없었다.
집에 가면 경찰이 나를 잡을 것이니, 차라리 변화된 몸을 아는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같이 가.’
에나는 조심스레 남성을 따라갔다.
****
“내용이 조금 조잡하네.”
막상 내용을 적고 보니 상당히 조잡한 구석이 있었다.
“남성은 홀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닌, 조직이 있는 걸로 표현하자. 그리고 그 조직 안에는 에나와 같은 하프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요원들이 있는 걸로.”
동양인 남성은 하프 몬스터가 아닌 순수한 인간이지만, 몬스터로부터 부모를 잃어 조직에 들어온 것으로 스토리를 잡았다.
“에나의 조상은 6.25 전쟁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간 이민자 중 여자로 변한 구미호로 하자.”
그렇다면 백인이라는 설정보다는 혼혈이라는 설정이 맞겠지.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을 것 같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수정만 간단히 하고 자야겠다.”
창문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작가를 도전한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냥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면 몸 여기저기가 뻐근했기 때문에 짧더라도 부모님 일을 도와드렸다.
“하하하하하! 제임스! 너는 작가가 될 줄 알았어!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고모부의 모습에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저녁도 안 됐는데 술 마셨어요?”
내 말에 고모부는 식겁했는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쉬잇! 얌마! 와이프 앞에서 절대 술 마셨다고 하지 마! 요즘 내 입에 술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얼마나 화내는지 모르지?”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입대하고 예쁜 공주님 또 출산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그러자 고모부는 똥 씹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 아들하고 함께 낚시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사벨은 낚시 좋아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에휴. 또 낚싯대를 강가에 빠트려서 말이야.”
미국 아니 북미에 사는 물고기들은 하나같이 크기가 크고 거칠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사벨은 잉어 낚시에서도 낚싯대를 놓쳐 잃어버리기 일수였다.
뭐. 이곳 잉어는 한국과 다르게 씨알이 굵어서 화살이나 총으로 잡아야 할 정도였지만.
“그나저나 글은 어때? 잘 써져?”
“글쎄요.... 군대 갔다 오느라 많이 쉬어서 그런지 몇 화 끄적였다고 정신이 멍하네요.”
“뭐. 천천히 해봐. 젊을 때는 도전해도 금세 일어날 수 있잖아? 늙어서 도전하다 실패하면 그게 바로 현실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도전해봐야지, 언제 도전하겠어?”
고모부는 말을 하면서 가방에서 갈색 표지의 책을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너 지금까지 사인 아무한테도 안 해줬지?”
“당연하죠. 어제 알았는데 누가 저한테 사인을 요청하겠어요?”
“그럼 내가 1호네?”
“......”
왤까? 고모부한테 만큼은 1호 사인을 해주기 싫었다.
“부모님 먼저 해드리고, 고모부 해드릴게요.”
“칫. 알았어. 대신 3호는 나다?”
“네. 숫자까지 적어드릴게요.”
대충 고모부가 하는 일을 다 도운 나는 일터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모부 또한 더운지 내 옆에 앉았다.
“네가 글로 먹고산다니까 아버지는 뭐라 안하셔?”
“네.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시더라고요.”
고모부는 혀를 차며 저 멀리서 트렉터를 끌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저 양반도 참, 미국에 온 뒤로 쉬는 걸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사업이 망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을 전부 아메리카로 데리고 와야 했던 불안감 때문인지.... 아무튼 간에 글 열심히 써. 망하면 농장에 취직시켜줄게.”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근데 너. 여자는 있냐?”
“......갑자기 왜 여자가 나와요?”
“쯧쯧 그 나이 먹고 여자 한 번 안 만나봤냐? 나 때는 말이야.....”
-띠리리리리링!
고모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냐?”
“음. 일단 여자요.”
약속했던 이틀이 채 되지 않았는데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다는 말에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는 30~40대로 보이는 여성과 중년의 남성이 함께 서 있었다.
나는 일단 그들을 집으로 들였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빌 에이든 미디어 대표 로건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 네? 대표라고요?”
“그렇습니다.”
빌 에이든 미디어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어젯밤에 나와 계약한 곳이니 조금 찾아본 정도였다.
‘대표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한 회사의 대표가 찾아왔다는 것은 나한테 기대할 게 있다는 말이었다.
“우선 전역 선물입니다. 한국에선 군인이 전역하면 선물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로건은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작은 상자를 나에게 내밀었다.
‘롤렉스!’
시계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왕관 브랜드가 적혀있는 상자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가의 시계 브랜드인 롤렉스를 선물로 줬다는 말은 로건 에이든이 나를 존중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좀. 갑작스럽네요. 당혹스럽기도 하고, 과하다는 생각도 들고.”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제임스 작가님은 아직 자신의 위치를 모르시나 보군요.”
“21개월 판매 부수가 300만에 달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근데 이 정도면 웬만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벌어들이는 수치 아닌가요?”
“작가님처럼 신인이! 아무런 인지도도, 명성도 없는 신인이! 21개월 판매 부수 300만에 달한다는 건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거기에 미국 한정이지 않습니까? 아직 수출도 되지 않은 책인데 이 정도면 정말 놀라운 겁니다!”
두 주먹을 불끈쥐고 말하는 열렬한 자세에 나는 당황했다.
“미국 대통령이 쓴 자서전이나 가능할 법한 수치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은퇴 후 글을 쓰면 일단 신인이긴 하니까.
“네.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흠흠.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저희는 작가님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 전화하고 오늘 도착했으니, 아마 전화가 끊기자마자 이곳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우선 오늘의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에밀라가 말씀 드렸다시피 영화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영화화는 작품에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제작사와 투자자만 잘 고른다면 득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로건은 가지고 온 서류를 꺼냈다.
“우선 저희 측에서 분류해온 제작사 명단입니다. 혹시 작가님이 따로 원하시는 제작사가 있으십니까?”
“그런 건 없지만..... 우선 제작사의 비전을 보고 싶긴 하네요.”
“그러실 것 같아서 제작사 별로 비전을 적어놨습니다.”
서류를 펼치자 제작사 별로 어느 유형의 영화를 만드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감독에 따라 영화에 대한 느낌이 변하다보니 보니 내용보다는 그들의 비전을 알고 싶었다.
“음. 아는 사람 좀 불러도 될까요?”
“네. 상관 없습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숙취로 아직까지 잠에 취해있는 메디슨 누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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