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팬카페
6화 팬카페
로건은 오늘 저녁 가족들과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에 에밀라가 보낸 메일을 저녁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드래곤 원.....’
-짹짹!
아침이 밝았다는 듯 조잘거리는 새소리가 로건의 귓가에 들려왔다.
별다른 수정작업도 없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로건은 책을 탐독했다.
‘[사막의 전갈]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막의 전갈]은 읽을 때마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감이 흐르는 소설이었다.
과격하면서도 섬세한 액션과 수많은 반전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몬스터 세계]는 그 반대였다.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는 느낌? 아니, 내가 남자인데도 여주인공에 빙의되어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소설 속에 내 영혼을 각인시키는 악령이 있는 느낌이었다.
“악마.... 마치 악마가 적은 소설같군.”
달콤한 과육으로 유혹하여 빠져나갈 수 없는 철창에 가둔 뒤 영원한 여운에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잠도 자지 않고 책을 읽었는데, 책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되는 여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고 싶다.
봤던 내용이지만 다시 보고 싶다.
아니, 그냥 오늘 하루는 일이고 집안일이고 다 내버려두고 이 여운에 녹아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겠지...
“끄응..... 가야지.”
어제 있었던 가족담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근해야 했다.
“.....에너지음료라도 마시고 가야하나?”
로건은 힐끔 시계를 확인하더니 미련있는 얼굴로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되고, 날이 다시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잤다.
지금까지 과부하 걸렸던 몸을 리셋시키는 것 마냥 달콤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졸립다. 그냥 자고싶다.
더..... 더..... 더.....
-삐리리리리~♪
“자, 잘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삐리리리리~♪
“.....응? 아.... 꿈인가.”
군대에서 전역한지 며칠이 지났다고, 군대 가는 꿈을 다시 꿀 줄이야.
최악이다.
“몇 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어?”
수신인에 아주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보세요.”
-헤이! 제임스! 전역했다면서 왜 연락 한 번 없어?
“아, 최근에 좀 바빠서 말이야.”
수신인은 월리라는 내 친구였다.
군대에 가자마자 연락이 끊긴 놈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지금 전화할 줄이야.
-나와! 펍에서 술 마시자고!
“난 무리.”
-......네가? 서, 설마 군대 갔다오면서 술 끊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지금 막 자다 일어나서 술 생각 없어.”
-그렇지? 하하하하하! 네가 술을 끊는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어!
“그보다 제임슨 너 지금 술 마셨어?”
-아니? 너희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후아암~ 그래?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뭔데?
“Best buy에 데려다줘.”
-.....뭐래 이 퍽킹한 새끼가.
Best buy는 전자제품 판매점으로 컴퓨터를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노트북으로 글을 오래 쓰니 시야가 좁아지고, 손가락도 아파서 이왕 일어난 김에 월리 차를 얻어타고 데스크탑을 사올 생각이었다.
갔다오면 술 마실 생각이 들겠지.
“데려다 주면 술 사줄게.”
-10분이면 도착하니까 얼른 옷 입고 내려와 새꺄.
“오키”
나는 대충 물 한 잔으로 목만 축이고 방에서 나왔다.
“지금 일어났냐?”
“네.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몸이 마치 로봇처럼 삐꺽거리네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부모님은 내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셨다.
“글 쓰는 것도 좋지만 몸 관리 좀 하면서 해라. 그 꼴이 뭐냐?”
“죄송해요. 한 번 쓰니까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만족은 했어?”
“네. 만족할 정도로 썼네요.”
“에휴. 이놈아..... 쯧. 아니다. 어린아이도 아니니 네 처신은 네가 알아서 하겠지.”
아빠는 뭐라 한 마디 하려고 했는지 잠시 노려보시다 이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내가 무리해서 글 쓴 것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하려고 하셨던 것 같았다.
“아들. 피곤한데 집에서 좀 더 쉬지 어디가게?”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요. 컴퓨터 좀 사오게요. 아무래도 노트북만 사용하니까 좀 피곤하더라고요.”
“친구? 월리를 말하는 거야?”
“네. 연락 왔더라고요. 컴퓨터사고 술 좀 마시고 올게요.”
“많이 마시고 와. 친구와 마시는 건데 한두 잔만 마시면 섭하지. 내일 까지만 들어오고.”
보통의 엄마라면 조금만 마시고 오라고 하실 테지만, 엄마도 술을 좋아해서인지 딱히 말리지는 않으셨다.
“네. 알겠어요.”
어차피 월리가 마시는 수준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집에서 나오자 픽업트럭 한 대가 집 앞에 서 있었다.
****
“너는 왜 따라온 거야?”
“집에 있기 심심해서.”
차에 올라타자 뒷좌석에 월리의 동생인 캐서린이 타있었다.
월리는 흑인이지만 캐서린은 백인으로 의붓동생이다.
월리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돌아가셨고, 이후 캐서린의 어머니랑 재혼하셨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서먹했지만, 금세 같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캐서린은 이제 성인이지 않아? 생일 지났지?”
“응.”
만 18세가 지나면 성인이 되기에 캐서린도 이제 성인이었다.
다만, 만 21세가 되지 않으면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술 마시자며? 왜 데려온 거야?”
“우리 집에서 마셔야지, 그보다 캐서린! 차에서 책보면 금방 멀미하니까 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빨리 안 집어넣어?”
“칫. 대머리 주제에.”
“너, 너, 너, 너, 뭐, 뭐라 했냐? 내가 대머리 아니라고 몇 번 말했어! 내가 원해서 자른 거라고!”
“시끄러 대머리! 내가 책볼 때 말 걸지 말라고 수십 번이나 말했잖아!”
“이 년이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야! 얼른 책 안 집어넣어!?”
“자자. 그만해.”
더 이상 내버려두면 대판 싸울 게 분명해서 나는 서둘러 중재했다.
참고로 월리는 대머리가 아니다. 흑인들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에 머리가 심한 곱슬이다 보니 불편해서 전부 밀어버린 것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캐서린. 월리의 말도 틀리지 않아. 차에서 책보면 멀미온다?”
대체 무슨 책을 읽느라 월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지?
“어?”
캐서린의 손에 아주 익숙한 갈색 표지의 책이 들려있었다.
“[사막의 전쟁]?”
“응? 이 책 알아?”
“뭐.... 안다면 알지만.”
내가 적은 소설이니까.
캐서린은 그러자 흥분한 듯 책을 나한테 들이밀며 말했다.
“봤어? 읽어 봤어?”
“응? 뭐. 읽어는 봤지.”
수정할 때 몇 번 읽었지?
그러자 캐서린은 몽롱한 눈빛으로 책을 품에 끌어안았다.
“하아.... 드래곤 원 작가님은 내 신이야.”
“......뭐?”
“첫사랑이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하아.... 처음 문장을 읽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어. 최고의 작품이야. 아니, 최고라는 말도 부족해. 신의 소설이야.”
“.....미친년.”
그 말에 월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몇 달 전에 학교추천도서로 저 책을 추천받고나서 아주 빠져산다. 잘 때도 끌어안고 자고 미치겠어.”
‘매춘부하고 암살이 나오는데 학교추천도서가 됐다고?’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긴, 성인이 된 캐서린이니까 읽어도 상관없겠지.
“이 책을 욕하지 마! [사막의 전갈]에서 나오는 묘사력이 얼마나 섬세한지 알아? 총격전도 있고 잔인한 묘사도 많지만, 그에 따른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히로인의 사랑이야기가 얼마나 디테일하고 예민한데! 거기에 스토리는 또 어떻고!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라고!”
“미친년아 알겠으니까 그만해.”
“하아.... 얼른 2부 연재해주지 않으려나? 마지막에 주인공이 살아나는 장면으로 본 건데 분명 2부가 나올 거야. 응! 그렇고말고!”
“.....내가 요즘 저년 때문에 미치겠다. 갑자기 자기도 책 쓰겠다고 전공도 바꿔서 가족하고 대판 싸웠다고?”
“전공도 바꿨다고?”
캐서린은 전기쪽으로 공부하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드래곤 원인가 뭐시긴가처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지랄이다. 그것 때문에 집안 아작날 뻔 했어. 결국 바꿨지만.”
“대머리! 나를 욕해도 드래곤 원은 욕하지 말랬지!”
“지랄 마! 이름도 촌스러운 녀석이니까 안 봐도 뻔..... 잠깐만.”
월리는 무언가 생각난 듯 운전하는 것도 잊고 나를 바라봤다.
“야! 야! 앞에 봐!”
“너..... 설마.....”
어린시절부터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적응시켜준 친구였다.
그 때문에 내가 하루에 한 번 책을 적는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필명도 포함해서 말이다.
“네 생각이 맞다.”
-끼이이이이익!
월리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뭐해 대머리?”
월리는 캐서린의 말을 무시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원...... 저, 정말?”
“그래. 그러니까 컴퓨터 사러가자는 거지.”
“뭔데? 무슨 일인데?”
나는 캐서린의 말에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드래곤 원이라고.”
“.....뭐래 군대에서 대가리에 총 맞고 왔어?”
하긴, 존경하던 드래곤 원이 오빠친구라고 하면 어이가 없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내 SNS 계정을 보여주었다.
“.......”
“참고로 사인은 안 해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거짓말이야아아아아-!!!”
“.....풉.”
진저리칠 정도로 싫어하는 모습에 내가 더 황당했다.
****
“훌쩍.... 내 드래곤 원님이.... 드래곤 원님이.... 오빠 친구라니.... 그럴 리가.....”
“내가 작가인 게 그렇게 충격인가?”
“.... 나도 충격이다. 캐서린한테 들어보니까 너 장난 아니더라? 무슨 영화로도 만든다며?”
“응. 나도 최근에 알았어.”
“최근에?”
“이사벨이 나 몰래 출판사에 투고했더라고.”
“무슨 비밀스러운 이유 때문에 작가가 잠수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네가 군대 가서 그런 거였구나?”
“출판사에서 나 군대 갔다고 SNS에 올렸다고 들었는데?”
“한국 군대인지는 말 안했잖아. [사막의 전쟁]으로 돈도 많이 벌었는데 누가 군대에 가겠어.”
“하긴.”
“그보다 네가 군대 간 것도..... 씁. 아니다. 이건 다음에 얘기하자.”
월리는 마치 첫사랑한테 차여 시련에 빠진 것 같은 캐서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튼 어떻게 된 건데? 자세히 좀 말해봐.”
“별거 없어.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군대 간 사이에 이사벨이 몰래 투고해서 출판했는데, 그걸 연예인이 추천해준 덕분에 유명세를 탄 것뿐이야. 군대에 있느라 나는 내 소설이 투고됐는지도 몰랐던 거고. 그보다 너 연락 한 번 안하더라?”
“바빠 죽겠는데 무슨 연락이야. 거기에 번호도 모르고, 한국 군대는 핸드폰 반입 금지라며?”
“.....생활관 공용 휴대폰으로 전화해 달라고 문자 보냈잖아.”
“한글로 나한테 무슨 문자가 오던데, 그게 너였어? 스팸 문자인 줄 알고 차단했지.”
“그래 너 잘났다. 그나저나 캐서린은 안 달래도 돼?”
“괜찮아. 요즘 저년 좀 심하긴 했거든, 밥 먹으면서도 책보고, 목욕하면서도 책보고, 공부하면서도 책보고, 드래곤 원 작가는 신이라면서 이상한 팬카페에도 들어갔거든. 집에서도 그것 때문에 골치였는데 차라리 저게 더 편해.”
“.....방금 뭐라고?”
“밥 먹을 때도, 목욕할 때도 책 본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팬카페? 내가 펜카페가 있어?”
리얼인가?
“참고로 네 팬카페에 등급이 있거든? 거기 최우수 등급 녀석들은 정체조차 알 수 없다고 하더라.”
“......실화냐.”
“저 녀석도 네 소설 본 뒤로 팬카페 활동에 열심히던데, 최우수 등급엔 못 들어가더라.”
그러더니 또다시 차를 멈추고 캐서린이 떨어트린 책과 팬을 들어 나한테 건넸다.
“그런 의미로 사인 해줘. 팔아먹게.”
“꺼져.”
나 아직 사인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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