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블루스타게이트
‘의인화라.’
에밀라가 권유한 방식은 인간 형태의 동물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툰툰이나 둔깡을 미어캣이 아니라 사람으로 변화시키라는 것.
‘나쁘지 않아. 하지만..... 후우.....’
뭔가 석연치 않다.
‘[사막의 제국]은 일단 휴재하자. 나중에 생각이 정리됐을 때 그때 다시 판단하자.’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곳에 온 이유부터 해결해야지.
****
다음 날이 밝고 나와 에밀라 그리고 메디슨 누나는 블루스타게이트로 찾아갔다.
“누나도 가게?”
“응. 영화계약도 확인해줄게.”
“그럼 나야 좋고.”
이쪽 세계는 처음이다 보니 메디슨 누나가 있어서 든든했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자 우리는 블루스타게이트라 적힌 제작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에밀라는 우리를 블루스타게이트 대표실로 데려갔다.
대표실 안으로 들어가자 덩치 큰 백인과 익숙한 얼굴인 로건이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대표인가.’
로건과 대화하고 있는 근육질에 덩치 큰 사나이가 블루스타게이트 대표로 보였다.
우리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자 대화하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문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로 꽂혔다.
“오셨습니까? 작가님!”
멍하니 있는 나에게 로건이 살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네.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블루스타게이트 대표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블루스타게이트 대표 한스입니다. 팬입니다. 악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하면서도 딱딱한 말투 안에는 존경심이 담겨있었다.
‘뭐랄까. 곰 같네.’
거대한 몸을 가진 한스의 목소리는 몸처럼 굵직했지만,
그의 말투 안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대감이 배어나왔고, 어서 악수를 받아주길 바라는 안절부절함이 섞여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네. 반갑습니다. 제임스 권입니다.”
나는 한스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한스의 얼굴이 그제야 활짝 펴졌다.
“정말 팬입니다! [나인 드래곤]에서 최우수 회원은 무리였지만 우수 회원을 맡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최근에 좋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한스는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자리로 이끌었다.
“하하하하! 정말 최우수 회원이 되기 위해서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하는데 무리더군요! 대체 최우수 회원들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딱딱해보였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한스는 푸근하게 대했다.
“이야..... 정말 궁금했습니다. 제임스 권 님의 실물이요.”
“그런가요?”
“하하하하! 어제 카페 사람들한테 제임스 권을 만난다고 하니까 전부 부러워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로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최우수 회원이 되지 못했다고?’
대체 조건이 어떻게 되기에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되지 못한 걸까?
한스는 웃으며 수박만 한 손으로 작은 찻잔을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좋은 차라고 들었지만 나는 차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내심 콜라로 줬으면 했다.
하지만 딱봐도 운동하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콜라로 달라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마시기로 했다.
“어떠십니까?”
“향이 좋네요.”
“하하하하! 당연하죠! 이건 제가 중국에 갔을 때....”
한스는 처음 했던 긴장은 온데간데 없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흐르자 한스는 무언가 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대화하느라 일에 대한 걸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네.’
귀가 얼얼할 정도로 내 칭찬을 하는데 마주 앉아 듣기가 엄청 부끄러웠다.
“우선 메인 스태프들에 관한 서류입니다.”
서류에는 미술, 음악, 녹음 등을 맡은 감독들이 적혀 있었다.
“전부 확정인가요?”
“물론입니다. 작가님한테 연락을 받자마자 [사막의 전갈]에 가장 어울리는 감독님들을 섭외했습니다.”
나는 서류를 읽다 말고 조심스럽게 서류를 메디슨 누나한테 내밀었다.
메디슨 누나는 안경을 쓰고 서류에 적힌 메인 스태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촬영 감독은 마그누스 하르트만님이 맡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호오?”
독일계 미국인인 마그누스 하르트만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별명이 분명 추격의 대가였던가?
“빠르네요.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수준의 감독들을 섭외하다니.”
메디슨 누나도 살짝 놀랐는지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하! 사실 그리 빠른 건 아닙니다. 저는 작가님이 [사막의 전갈]을 블루스타게이트에 맡길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님한테 확정받기 전부터 감독들을 섭외하고 있었죠.”
“아.... 그래서....”
근데 약간 불안한 점이 있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마그누스 하르트만 감독님은 원작 작품의 영화화를 싫어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설득하셨네요?”
제작, 시나리오까지 영화 전반에 손을 대는 것을 좋아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보니 소설이나 만화의 영화화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 참고로 마그누스 감독님은 제가 섭외한 게 아닙니다. 저희가 영화화를 맡게 되었다고 소식이 퍼지자마자 가장 먼저 저희한테 연락해오셨습니다.”
“.....호오?”
“거기에 시나리오까지 전부 적어서 가져오셨더군요. 조금 이따 감독님이 오신다고 하니 그때 시나리오를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시나리오라.....”
내가 생각에 잠기자 한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가 실례되는 짓을 한 겁니까?”
“아뇨. 애초에 전 시나리오는 정말 못 적으니까요.”
“아. Q&A에서 듣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입니까?”
“네. 농담이 아니라 제가 읽어서도 정말 못 적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소설과 시나리오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소설은 내 상상 속에 있는 걸 글로 옮긴다면, 시나리오는 상상 속에 있는 ‘현실’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현실이라는 차이가 나한텐 꽤나 어려운 숙제로 다가왔었다.
“그래도 시나리오는 확인하고 가야겠죠..”
“그건 물론입니다!”
영화의 모든 것은 제작사와 감독님들한테 맡겨두겠지만, 가장 중요한 시나리오만큼은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키가 작은 중년의 남성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남성은 대표실을 쓰윽 훑어보더니 동양인인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갑소. 제임스 권 아니 이 경우에는 드래곤 원인가?”
“제임스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드래곤 원은 별로.....”
“허허. 어째서 필명을 드래곤 원이라 지은 건지 모르겠군. 처음 필명을 봤을 때 웬 미친놈인가 했소.”
“뭐... 어린 시절의 흑역사죠. 지금이라도 바꾸고 싶네요. 하하.”
드래곤 원이 동양인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마그누스는 농담을 던지며 한스 옆에 앉았다.
“시나리오를 확인하고 싶다고?”
“예. 아무래도 제 작품이니까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각색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건 당연하지. 여깄소.”
마그누스는 자신이 적었던 시나리오를 프린트하여 나한테 내밀었다.
“지금 읽어봐도 되나요?”
마그누스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펄럭.
‘이게 명장의 반열에 오른 시나리오인가.’
시나리오의 시작은 주인공 에반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에서 출발했다.
할렘가에서 테러조직을 죽이는 것부터 진행되는 내 스토리와는 반대로, 스토리 전반부터 불운한 상황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됐다.
나는 시나리오를 읽을수록 흥미로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영화 각색은 총 3종류로 나뉜다.
충실, 다원, 변형.
충실한 각색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충실하게 시각화하는 것이다.
다원적 각색은 원작 소설의 구현된 분위기를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능력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로 바뀐다.
변형적 각색은 원작 소설을 그저 영화의 원료로 취급하는 것으로 작가가 원하던 생각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변형적 각색을 좋아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
자신이 생각한 걸 영화화하는 걸 허락한 것이지, 자신이 생각한 걸 영화의 원료로 취급하는 걸 좋아하진 않으리라.
‘내가 좋아하는 건 다원적 각색인데.....’
충실한 각색으로 유명한 건 일본의 만화 실사화 영화였다.
내용과 캐릭터를 충실히 살리는 거로 유명하지만, 자국 내에서의 인기는 많아도 해외 팬들 입장에서는 실사화를 해서 작품을 망친다는 소리가 많다.
‘개인적으로 강철의 대장장이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실사화를 본 뒤로 만화책을 보지 않았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감독의 시선으로 보는 다원적 각색이었다.
시나리오 작가를 한때 꿈꿨기 때문에 감독의 입장에서 각색되어 만들어지는 영화가 좋았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마그누스 감독님이 적은 시나리오는 일단 과하지 않았다.
너무 살인에 치중되어 있지도 않았고, 추격의 대가라는 별명치고는 추격전도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토리를 중점으로 두며 하나하나 추리해 가는 과정이 너무도 디테일했다.
‘내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지.’
하나하나 추리해가는 부분과 테러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과정.
글을 쓸 때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다 보니, 감독님이 이러한 부분을 캐치하고 디테일하게 만들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떤가?”
“좋네요. 하지만 이 부분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어느 부분 말인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약간 실망했던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아내의 비밀을 찾는 장면을 조금 더 늘려주셨으면 해요.”
“어째서?”
“이건 저만의 생각이지만, 저는 에단이 아내의 정보를 찾을 때마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느꼈으면 해요. 아내가 처음부터 매춘부가 아니라 테러 조직 때문에 부모님이 희생돼서 어쩔 수 없이 매춘부가 됐으니까요.”
“흐음.”
“그리고 이 부분도요.”
나는 에단이 아내의 여동생을 만나기 직전의 모습을 가리켰다.
“여긴 더욱더 좌절하는 모습으로 그려주셨으면 해요.”
“좌절?”
“네.”
원래는 아무런 생각도 없던 부분이지만, 팬카페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나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테러조직에 복수하려고 살아가는 에단의 모습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주셨으면 해서요. 이 부분은 미술 감독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그 정도야 어려운 것 없지. 그뿐인가?”
“아뇨. 이 부분도.....”
계속해서 진행되는 대화에 마그누스 감독의 얼굴은 감탄으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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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시나리오를 적지 못할 뿐. 시나리오를 보는 눈은 명확하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을 만든 작가로서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깜빡하거나, 조금 주저한 부분들을 전부 알고 있군.’
마그누스가 소설이나 만화를 영화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다. 하지만 작품을 적었을 때의 배경을 생각하라고 하면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그날 떠올린 영감이라는 쾌락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날마다 들쑥날쑥해지는 영감 때문에 작품을 적었음에도 그 배경을 자세히 서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오로지 감독의 역량이 전부가 되지만, 막상 영화를 제작하고 난 뒤에 작가가 컴플레인을 걸 때가 많다.
왜 이 부분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시놉시스를 계속 수정하면서 적는 건가?’
그날의 감동을, 그날의 행복을 잊지 않기 위해 시놉시스를 수정한 다음 행동하는 작가.
각색이란 감독과 제작사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닌 작품을 적은 작가도 함께 하는 것이다.
작가가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영화의 완성도는 천차만별로 변한다.
“그럼 이제 캐스팅한 배우들을 보겠나?”
“예.”
마그누스는 오랜만에 재밌는 영화가 만들어지겠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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