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골촌놈인 줄 알았는데 천재작가였다-14화 (14/216)

14화 배우

아내의 여동생 역할을 맡을 후보 중에서 은색 머리카락의 특이한 헤어색을 가진 여성이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오디션을 보러 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주에는 할리우드가 있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신인배우들이 산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주는 북한과 남한을 합친 것보다 2배 크다 보니, 배우들이 많은 것도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내 알바 아니지.’

신기한 인연이긴 했지만 어차피 실력으로 선발되는 오디션에 붙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배우였다.

이곳에서 만났다는 게 놀라울 뿐, 어차피 스쳐갈 인연이었다.

나는 옆에 앉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해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해변이네.’

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해변에는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물놀이를 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바다를 보며 힐링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자 머리가 상쾌해졌다.

‘좋다.’

해변을 보자 나도 모르게 노트를 꺼내들었다.

노트북에 적고 싶었지만 어차피 새로 살 거라는 생각에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노트에 적어놓을 생각이었다.

‘글은 쓰지 말라고 했지만, 떠오른 건 미리미리 적어놔야지.’

이런 스토리는 어떨까?

‘[몬스터 세계] 해변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출발한 거지.’

브레이셔에 들어오고 난 뒤 나름 익숙해진 에나는 조직으로부터 처음으로 임무를 하달받는다.

임무는 해변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에 관한 소식의 진실을 파악할 것.

동양인 남성 케이는 해변에 나오는 몬스터들을 조사하며 에나를 도와준다.

‘바다 몬스터라..... 많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크라켄, 레비아탄, 서펜트, 모비딕 등이 있었다.

‘오? 좋은데?’

이왕 바다에 왔으니 서로 간의 답답했던 이야기도 풀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해변을 걸으며 데이트도 하고

‘그래, 히어로물에 로맨스가 빠질 순 없지.’

로맨스... 그래, 로맨스....

“....시발.”

그러고보니 나 모태솔로였지.

자료를 조사하며 소설을 적는 것보다는, 나는 내가 직접 겪은 영감을 글에 적는 것을 좋아했다.

쓰라면 쓰겠지만 그래도 데이트 경험담을 듣는 것보다는 경험해서 쓰고 싶었다.

“응?”

결국 로맨스 부분에서 콱 막혀 더 이상의 스토리를 적지 못했다.

노트를 접으니 옆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그녀들은 아까부터 계속 적고 있던 노트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혹시.... 무슨 일 하세요?”

책에 시선을 주고 있으니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동양인이 해변을 바라보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어서 신기한 것뿐이겠지.

“작가예요. 평범한 소설 작가.”

“소설 작가요?”

“작가요?”

“네.... 뭐. 그냥저냥 쓰는 작가예요.”

그녀들은 내가 작가라는 말에 놀라워하면서도 뭘 바라는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작가 처음 보나?’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햄버거를 마저 입으로 넣었다.

“필명이 뭐예요?”

“어...... D1이요.”

“D1?”

“좀 촌스럽죠? 인터넷에도 쳐도 안 나올 거예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드래곤 원의 줄인 말이기 때문에, D1을 치면 내 소설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필네임을 왜 물어보지?’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다, 상대가 책이나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필명을 궁금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한 명은 배우인 건 알겠는데, 또 한 명은 뭐하는 사람이길래 작가인 걸 물어보는 거지?’

오이피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두 분은 무슨 일 하시는데요?”

“전 가수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어요. 현재 뮤튜브에서 cover song을 부르고 있어요. 구독자는 적지만요.”

“전 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와아.... 꿈이 크시네요.”

미국에서 가수와 배우를 꿈꾸는 이들은 정말 많다.

하늘의 별들보다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구나 인기 있는 화려한 삶을 원한다.

원하는 만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주역은 커녕 단역이나 잠깐 나오는 상점 주인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배우지망생이 대부분이었다.

가수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 뮤튜브로 가수의 길에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는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거기서 거기였다.

빌보드 200에 오르면 모를까 이름을 알리기 전까진 뮤튜브, 클럽, 버스킹 등으로 이름을 알린다.

“꿈은 클수록 좋은 거니까요.”

나는 오이피클을 우물거리며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한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옆에서 시끄럽게 조잘댔다.

“아! 그보다 통성명이 늦었네요. 저는 엘리나라고 해요.”

“전 엘라에요.”

“용일 권이에요. 그냥 편하게 권이라고 부르세요.”

어차피 캐스팅 때문에 내일 만날 사이인데 오래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이어트 콜라를 목구멍으로 전부 털어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찾고 있잖아요? 이럴 때는 빨리 비켜줘야죠.”

“어디 가실 예정 있으세요?”

“딱히? 글 생각이 안 나서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라서요.”

“그,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한테 글 쓰는 방법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는 황당하다는 듯 엘리나를 바라보았다.

“..... 갑자기요?”

“헤헤.....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지 궁금하거든요. 저희도 꿈을 위해서 글을 조금씩 쓰거나 이해하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배우고 싶어서요.”

“굳이 삼류 작가인 저한테 배우는 것보다는 인터넷이나 무료 강의를 하는 사람한테 배우는 게 더 좋지 않나요?”

그러자 그녀들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랄까 그다지 도움 되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한 번은 무료 강의하는 사람한테 찾아갔는데 질문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각만 말하더라고요.”

“딱히 도움 되는 이야기도 아니다보니 돈을 내고 수업을 들어야겠다고는 생각했는데, 마침 글을 쓰는 작가님을 만났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럽단 말이지.’

미국 여자들이 순진한 동양인을 꼬셔서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 많다.

갱들이 있는 소굴로 데려갈 수도 있었고, 성추행을 했다고 신고할 수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누군지도 모를 상대한테 글을 가르쳐 달라는 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자.’

엘라도 배우지망생인 건 확실히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보니,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 대가도 없이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희가 저녁 살게요.”

“아뇨.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여자들을 상대로 너무 매몰차게 말하는 것 같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마약이나 총기소지가 가능한 나라다보니 이런 건 확실히 거절해야 했다.

내가 거절하자 엘리나가 당황했다.

“어, 어째서요?”

“그야 당신들 같으면 처음 보는 외국인이 뭣 좀 가르쳐달라고 어딜 가자고 하면 가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사실 그녀들로선 저녁 한끼 대접하는 것도 굉장히 큰 지출이었다.

배우 지망생이나, 꽃을 피우지도 못한 신인 가수생활을 하고 있으니 돈이 많을 리 없었다.

근근이 알바와 적은 뮤튜브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들로선 수강을 듣는 것도 어려웠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쉽네요.”

내 말에 둘 다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녀들의 시무룩한 얼굴에 마음이 흔들렸다.

‘매몰차게 말하긴 했지만, 둘 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건 맞는 것 같고.....’

그녀들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라, 시무룩한 얼굴에 내 과거가 생각났다.

나한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도 없었던 그 시절, 시나리오가 적고 싶어 도서관에서 처박혀 있던 그 시절이 말이다.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해야 하나.’

혹시 알겠는가?

그녀들이 나중에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돼서 내 작품 흥보에 도움이 될지.

“에휴.”

난 주변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 카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단..... 읽어는 드릴게요.”

“저, 정말요?”

“진짜요?”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인기가 많은 작가가 아니니 그냥 충고 정도로만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다면 저기 있는 카페로 옷 갈아입으신 다음에 지금까지 적었던 글이나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책을 가져와주세요.”

사방이 뚫려 있고, 시끄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저 카페에서라면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위험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엘리나는 가사를 엘라는 시나리오나 아니면 소설을 적었으려나?’

그녀들도 지금 자신들의 의심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굉장히 자존심 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려운 길을 걸었다.

어느 배우는 꿈을 위해서 포로노 배우가 되기도 했고, 어느 가수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며 꿈을 꾸었다.

고작 의심받고 있다는 것에 창피해 한다면 배우로서 혹은 가수로서의 길은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지고 올게요.”

“저도요!”

****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말보다 ‘흘러가는 인연은 흘러가는대로 놔둬라’ 라는 말에 더 마음이 갔다.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그녀들이 사라진 지금 그냥 호텔로 돌아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엘리나라면 몰라도 엘라는 내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저희 왔어요!”

그녀들은 비키니 위에 티셔츠를 입고 나에게 다가왔다.

엘리나의 손에는 노트북이 엘라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가 들려있었다.

“커피는 저희가 살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아, 읽고 있어도 되나요?”

“상관없어요. 아메리카노면 되나요?”

“스트로베리 스무디가 있다면 그걸로.”

“네에 알겠어요.”

나는 우선 엘라가 가지고 온 서류부터 확인했다.

‘이건... 대본이잖아.’

제목은 적혀 있지 않지만, 분명히 시나리오 대본이었다.

‘아. 내용은 다르네.’

아마 예시 대본인 것 같았다.

[사막의 전갈]과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오디션을 위한 유사한 분위기일뿐 내용은 전혀 달랐다.

‘표시가 잔뜩 있네.’

대본 위에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어떨까?’라는 의문점이 적혀 있었다.

‘이거.... 레제 시나리오인가? 아니 원작 시나리오하고 레제 시나리오하고 반반 섞은 것 같아.’

작품의 원작을 영화화하기 위해 적은 시나리오를 원작 시나리오라고 한다면, 소설처럼 읽을 수 있게 적은 걸 레제 시나리오라고 한다.

‘즉, 이 말인가? 이 시나리오 배경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연기하라고.’

소설처럼 읽기에 각자의 생각이 전부 달라진다.

어느 부분에서 어느 방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해야 하는 연기도 전부 달라진다.

‘누군가한테는 극단적인 대화라도, 누군가한테는 장난스러운 대화가 될 수 있지.’

보통 그런 경우 원작이든 레제든 간에 주변 상황을 적어놔야 하지만, 자유로운 표현을 원했던지, 스토리는 적혀있더라도 상황은 기재돼있지 않았다.

‘배우들의 세계도 복잡하구나. 아니 이 경우는 마그누스 감독님이 고약하다고 해야 하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름값이 아닌 실력이 확실한 배우를 고를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요즘에는 배우들의 애드립이 영화에 실리는 경우도 많으니까.’

애드립에 따라 배우들 실력이 보이기도 한다.

‘다음은..... 음. 가사인가?’

시나리오라면 몰라도 가사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데.

‘으아... 이게 뭐야.’

마치 랩처럼 가사가 자극적이었다.

‘랩퍼였어?’

내용 자체는 여자가 아름다운 부위를 뽐내며 유혹한다. 남자는 그에 홀려 서로 깊은 사랑을 하는 이야기였다.

자극적인 가사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녀들이 음료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스트로베리 스무디가 없어서 키위 스무디로 사왔는데 괜찮나요?”

“응? 아.... 네. 고마워요.”

“뭘요. 저희가 더 고맙죠.”

테이블에 앉은 엘라와 엘리나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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