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동심
“아빠! 누그야?”
“아. 하긴 애니는 제임스를 모르겠구나.”
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사리같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너무 어릴 때 봐서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고모부 빌은 애니를 안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 게 없어서 일이나 도와드릴까 하고 왔어요.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네요.”
“어제 다 하고 BBQ 먹으러 간 거니까. 습관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TV보고 있었어.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재밌는 건 안하지만 말이다.”
“오늘도 바쁘세요?”
“농사일에 안 바쁜 날은 겨울 정도다. 특히 요즘은 온도가 너무 높게 올라가서 해 뜨면 물을 자주 줘야 해.”
빌은 애니의 말랑말랑한 볼을 쪼물딱거렸다.
“하디마! 애니 볼! 만지지 마라고 해써!”
“이렇게 부드러운데 어떻게 안 만질 수가 있어? 하하하하!”
빌은 애니가 예뻐 죽겠다는 듯 계속해서 애니의 볼을 찹쌀떡 만들듯 주물렀다.
항상 아들 한 명은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빌이었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하루종일 잠만 잘 줄 알았는데 일찍 일어났네?”
“좀....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잘 했어. 고민될 때는 제대로 쉬는 게 좋아. 끙끙 잡고 있어봤자 해결 되는 건 없더구나. 쥐어짜는 것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일 때 글을 쓰는 게 좋을 거다.”
“그러려고요. 그나저나 고모부.”
“왜?”
“애니요. 제가 전역파티 할 때 못 온 건 알고 있는데, 어제 BBQ 할 때는 왜 안데려오신 거예요?.”
“BBQ먹을 때는 애니가 이사벨이랑 놀겠다고 안 나왔거든.”
“아.....”
“애엄마가 루니아 돌보느라 바빠서 애니는 이사벨이 돌봐주는 날이 많으니까.”
루니아는 내가 군대 갔을 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었다.
“애니, 유치원은 아직이죠?”
“응. 내년에 들어갈 거야.”
“그럼 오늘 하루는 제가 애니랑 놀아줘도 될까요?”
그러자 고모부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네가 갑자기? 왜? 참고로 돈은 못 준다. 네가 나보다 많이 벌잖아?”
“돈은 됐고 애니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고모부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눈빛으로 애니를 슬그머니 자기 등 뒤로 숨겼다.
“고모부,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푸하하! 농담이다 농담. 아무튼 왜 그러는 건데.”
“애니 나이대 아이들이 볼 법한 글을 쓰고 있는데 막혀버렸거든요... 애니를 보면 뭔가 떠오를 것 같아서요.”
“흐음..... 뭐. 네가 글 쓰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도 좋지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뭔데요?”
“이사벨과 함께할 것. 요즘 이사벨이 방학이라 애니를 돌봐주고 있거든, 애니도 널 익숙지 않아할 테고, 나 역시 너한테만 애니를 맡기는 건 불안하니까.”
“그럼 저도 좋죠.”
“답례로 애들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근데 아마 네 생각대로 안 될 가능성이 커.”
“왜요?”
“보면 알아.”
고모부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애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시간이 흐르자 고모부의 의미심장한 얼굴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자는구나.’
아직 잠이 많을 나이라 그런지, 애니가 자고 있는 모습만 두 시간째 관찰하고 있었다.
“지겹지?”
“응? 아니 뭐.... 어릴 때는 잠자는 것도 일이라고 하니까. 잘 자는 것도 좋은 거지 뭐.”
이사벨은 자고 있는 애니의 포동포동한 볼을 쿡쿡 부드럽게 찔렀다.
“우웅.....”
“애니는 유독 잠자는 게 불규칙적이라서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서 돌아다니거든, 그래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지금 이렇게 자면 새벽에 또 일어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더라고.. 그냥 자기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 같아. 차라리 바쁜 오전에는 이렇게 자주는 게 편해. 셋째 언니를 닮았는지 체력이 넘치던데.”
“.....으.”
셋째 누나를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린시절부터 왈가닥이었던 셋째 누나는 운동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날 이리저리 패대기쳤었다.
이사벨처럼 고모부와 함께 놀 수 있는 낚시, 볼링, 골프 같은 나름 정적인 운동은 좋아하지 않았고 농구나 풋볼같은 동적인 운동을 좋아했다.
그 결과, 체대에 재학 중이다.
“좀 쉬다 와. 애니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일어나면 말해줄게.”
“괜찮아. 어차피 할 것도 없어.”
“우웅...... 시꾸러.....”
이사벨과 속닥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애니가 부스스 눈을 떴다.
“으구.. 누구 동생이 이렇게 귀여워!”
애니가 눈을 뜨자 이사벨은 이때다 싶었는지 애니의 양 볼을 주욱 늘어트렸다. 참다못한 애니는 결국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아암~!”
조그만 입이 찢어질 듯이 하품을 하더니 멀뚱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임뜨 오빠?”
“응.”
“놀자아!”
애니가 신나는 얼굴로 나에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래. 그러려고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당연히 놀아줘야지.
****
애니는 인형을 가져왔다.
소꿉장난을 하자는 뜻이었다.
“그럼 스토리는 대충 이렇게 하자. 이사벨은 엄마, 내가 아빠고 애니는 버림받은 아이인데, 임신을 하지 못하는 이사벨이 애니를 고아원에서 입양해서..... 음. 여기에 출생의 비밀을 숨겨서 K-드라마식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퍼억!
이사벨이 헛소리 하지말라며 내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아이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이 멍충아!”
“우에에에에에엥! 싸우지마아아!”
“커헉.... 자, 잠깐 며, 명치 맞았어....”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냥 대충 하는 척만 하라고! 왜 진지하게 스토리를 짜는데!”
“아니 그게.... 스토리가 있는 게 더 재밌잖아.”
“그리고 애니한테 스토리를 맡겨야지! 네가 스토리를 짜면 어쩌자는 거야!”
잠시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우리는 다시 소꿉장난을 시작했다.
“아빠! 이고 머고.”
“.....응. 잘 먹을게.”
어린아이들의 놀이답게 소꿉장난은 어려울 게 없었다.
평화로운 가정의 일상이나, 아니면 애니가 ‘흥미’를 느끼는 것들로 이어졌다.
소꿉장난은 무려 두 시간동안 지속됐지만 난 지루함보다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흥미......인가....’
자다가 일어났음에도 지치지 않는지 애니는 소꿉장난에 흠뻑 빠져있었다.
시간에 쫒기 듯 살아가는 어른들과는 달리, 애니는 느긋했다.
‘어른한테 두 시간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야. 하지만 아이한텐 굉장히 긴 시간이라는 건가?’
단 두 시간 만에 스토리가 10번이나 바뀌는 소꿉장난을 했다.
그 10번 모두 주인공은 애니였고, 주제는 애니가 ‘돼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였다.
‘부모님한테 요리를 해주어 칭찬을 듣고 싶은 아이, 얼른 어른이 돼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아이, 될 수 없는 꿈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아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런 꿈들을 언제 꿨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무한한 생각을 할 수 있어.’
사회가 어떤지 모르기에, 아직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생각은 무한에 가까워진다.
동경, 우상, 선망.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느끼고 생각한 걸 토대로 성장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희망.
슈퍼 히어로든, 악마를 물리치는 용사든, 한 나라의 대통령이든, 공주든. 아이들은 자기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함..... 동심의 정체는 티끌하나 없는 순수함인가.’
어른들 중에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과거를 추억할 수는 있지만 그 과거를 전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한테 [사막의 제국]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약간 흥미가 생겼다. 애니의 순수한 평가를 받고 싶었다.
“애니야. 이번에는 다른 소꿉놀이 해볼까?”
“다른 거?”
“응. 자 이 왕자님 이름은 툰툰이야.”
나는 애니가 이해하기 쉽게 인형들을 이용해 상황극을 만들었다.애니의 소꿉놀이에 [사막의 제국]의 초기 내용을 입혀 봤다.
처음에 잘 따라오던 애니는 중간부터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우웅..... 재미업따....”
“재, 재미없어?”
“웅.....”
‘아이가 재미없다고 하면 끝이라고 들었는데......’
아이는 솔직하다. 그렇기에 잔혹할 만큼 사실을 말한다.
“어, 어느 부분이 재미없는 건데?”
“몰라. 그냥 재미업떠....”
더 이상 상황극을 보기 싫었는지 애니는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 다시 올라가 누웠다.
“애, 애니야? 졸려서 재미없다고 한 거지? 그렇지? 내용이 재미없는 건 아니지?”
“우웅..... 잘래....”
“애니야? 잠시만? 애, 애니야? 자지 말고 잠깐만.....”
-빠악!
“왜 애를 괴롭혀!”
이사벨이 내 뒤통수를 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재미없다....라는 말을 들은 게 그렇게까지 충격일 줄은 몰랐는데....’
캐서린이 나한테 글을 품평 맡겼을 때가 이런 느낌일까?
갑자기 온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이 외롭고, 쓸쓸해졌다.
“애니가 일어나면 다시 상황극을 보여주던가. 그보다 뭐야? 그 내용은?”
“.....내 세 번째 소설.”
“벌써 세 번째 소설을 쓴다고?”
“응. 아이들이 읽기 쉬운 내용으로 써보고 싶은데, 이게 좀 골치 아프네.”
“그래서 애니한테 품평을 맡겨본 거야?”
“품평이라 하면 그렇기는 한데.... 일단 비슷하지 뭐.”
이사벨은 그 말에 아까 들은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기준이 다른 거 아니야?”
“기준?”
“아직 유치원도 가지 못한 애한테 너무 복잡한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애니는 며칠 전에 겨우 동화책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아!”
하긴, 애초에 애니의 동심만 조금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괜한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하긴, 글씨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애한테 너무 무리한 걸 바랐던 건가?’
그래도 얻은 건 충분했다.
‘아동문학은 상상력과 순수함이야.’
순수함에서 나오는 동심이 아동문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왠지 글이 잘 써질 것 같은데..’
*****
나는 컴퓨터를 켜고 어제까지 적었던 내용을 확인했다.
‘툰툰은 우직할 정도로 정직한 게 좋겠어. 너무 정직하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아이는 심할 정도로 ’직선‘으로 나아가니까.’
툰툰이 우직하게 동료를 구하는 장면은 사용하도록 하자.
‘링링이 가지고 있던 보물지도..... 아니, 이 부분을 조금 수정하자. 링링이 동료를 데려간 이유를 추가하는 게 좋겠어.’
링링의 직업은 도둑이나, 도굴, 사기꾼 같은 악역 느낌이었다.
함정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런 경험이 많은 링링으로선 함정의 위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물.’
보물 지도에 적혀있는 제물을 위해 동료들을 모은 것.
“다시 시작해보자.”
-뚜두두둑!
나는 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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