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시나리오
달이 떠올랐지만 우리의 일은 지금이었다
로딘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으으.... 떨려.”
캐서린은 회의실이 서서히 다가오자 긴장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평정심을 되찾았다기보다는 생각을 아예 내려 놨네.’
차라리 저게 더 좋을 것이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감독님들한테 횡설수설 실수를 범할 수 있으니, 차라리 생각을 내려놓고 필요할 때만 반응하는 것이 좋으리라.
-똑똑.
“제임스 작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게.
로딘이 방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마그누스 감독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감독님들이 모두 모여 서류철을 들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오게나, 먼 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옆쪽에 있는 아가씨는 누군가? 자네 여친인가?”
“그럴리가요. 친구 여동생인데 경험이나 하라고 매니저 역할 겸 데려왔어요.”
내가 캐서린의 어깨를 툭 치자, 멍때리던 캐서린이 서둘러 말을 내뱉었다.
“아, 안녕하세요! 캐서린 휴즈라고 합니다!”
“반갑네. 마그누스라고 하네, 아 이쪽들 소개가 필요하겠지.”
감독님은 옆에 있는 조명, 미술, 카메라 감독님 등 그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며,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나, 나도 앉아도 돼?”
캐서린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 옆에 마그누스 감독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앉아도 되네.”
“가,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조심스레 내 옆에 앉았다.
“우선 자네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 시나리오에 대한 최종검토를 맞췄네. 자네만 허락한다면 바로 이 시나리오로 영화에 돌입할 걸세.”
마그누스 감독님은 지금까지 감독님들이 살펴보고 있던 시나리오들을 차례대로 모아 나한테 주었다.
“확인해보게나.”
“네.”
영화 한 편을 만들 정도의 분량이다 보니 서류철은 굉장히 두툼했다.
제임스가 시나리오를 받아드는 모습에 캐서린은 약간 의아했다.
‘본다고 뭘 알 수 있나?’
캐서린이 알기론 시나리오와 소설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기에 소설 작가인 제임스가 시나리오를 잘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여기 이 부분이요. 에단이 아내의 무덤에 꽃을 올리는 부분이요.”
“말하게나.”
“해바라기로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가 있나?”
“사소한 차이긴 한데, 에단의 아내는 해바라기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흐음..... 그래도 무덤가인데 해바라기는 좀 아니지 않나?”
“글쎄요? 저는 오히려 에단이 얼마나 아내만을 사랑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거든요.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아내만을 사랑하는 남자.....로 표현하기에 좋다는 거죠.”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관객들이 눈치채리라 보는가?”
“영화로 처음 접한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눈치채지 않을까요?”
“흐음..... 그러면 진중한 분위기가 흐트러질 걸세.”
“그렇다면 씬 중간중간에 해바라기를 많이 노출시키는 게 어떨까요? 아내가 죽은 뒤에 해바라기 그림이라던가, 사진을 많이 넣는 거예요.”
최대한 해바라기를 많이 보여줘서, 무덤가에 놓이는 해바라기에 대한 거부감을 의미있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에단이 테러 조직원을 죽일 때마다 속 시원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 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으면 해요.”
“흐음..... 자네는 에단이 갈피를 잘 잡지 못하는 장면을 원하는 건가?”
“네. 맞아요. 복수를 하곤 있지만 이 복수가 과연 아내가 원하는 걸까? 라는 식으로요. 작중에서 에단은 아내가 죽고 술에 빠져 살아요. 하지만 오직 테러 조직원들을 죽일 때만 술을 마시지 않죠. 냉정해지기 위해서요. ”
“술.... 술인가.... 하긴, 무언가를 잊고 싶어 하는 장면에서 술은 항상 필수지.”
“그리고 제가 작중에서 말했던 총들을 실제로 사용해주시면 좋겠어요.”
“총을? 굳이 이유가 있나?”
“그냥 디테일....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총들을 조사할 때 정말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니까요. 총의 특징 같은 걸 찾으며 그에 맞는 암살법 등을 조사했었거든요.”
“호오..... 그냥 재미삼아 그렇게 적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하지만 이 부분도 작품을 읽은 관객들은 알지 못할 걸세.”
“하하.... 그렇죠?”
“하지만 참고는 하지.”
이렇게 원작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들은 2차, 3차 저작물을 진행하며 많이 생략되거나 삭제되기도 한다.
원작자 입장에선 제 살을 깎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러닝 타임을 고려해야하니 어느 정도의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간단히 끝날 거라 생각했던 시나리오 마무리 작업은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은 처음에 느꼈던 긴장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나리오를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랄까.....’
존경스럽다고 해야할까?
제임스는 전문적으로 글 쓰는 방법을 익히지 않았다.
소설도 오랜 노력 끝에 경험에 이루어지는 경우를 적었고, 시나리오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전문지식이 적고 오직 ‘경험’ 하나로 이루어진 집합체가 ‘경험과 지식’을 둘 다 가지고 있는 명장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은 어딘가 섹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캐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존경이라......’
과거에 길가의 쓰레기 보듯 보던 오빠의 친구가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벽으로만 보였다
아직까지 성공한 작품이 하나밖에 없다고 겸손을 유지하고 있지만, 캐서린을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춘다고 해도, 주머니 안에 있는 송곳마냥 뚫고 나오는 재능을 말이다.
“캐서린.”
“......”
“캐서린?”
“으, 응?”
“가서 커피 좀 사다줄 수 있어?”
“커피?”
“응. 커피. 여기 인원수 대로 사와줘.”
제임스는 몰래 캐서린의 손에 카드를 쥐어줬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으니까, 부탁할게.”
평소라면 카드를 냅다 제임스의 얼굴에 던질 캐서린이지만, 이렇게나 많은 감독님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회의 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달라던 제임스의 부탁도 있었다.
제임스는 언제 카드를 쥐어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시나리오를 보며 감독님들과 계속 소통했다.
“조엘 감독님 혹시 이 장면에서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있나요?”
감독님들 중에서 그나마 나이가 젊어 보이는 음악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궁금해?”
“네. [사막의 전갈]을 집필할 때 장면의 분위기를 잘 어울릴 만한 음악을 상상하면서 써내려갔거든요. 이 부분이요.”
“테러 조직 수장을 죽인 후인데?”
“네. 이 부분에는 조금 신나는 노래를 틀어주셨으면 해요. 팝송 같은 걸로요.”
“팝송? [사막의 전갈] 분위기하고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을까?”
“잔잔한 팝송으로 같은 느낌으로 깔아주셨으면 해요. 이때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은 ‘희열’도 ‘분노’도 아니거든요.”
“아니라고? 그럼 뭔데?”
“네.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에단은 아내의 여동생을 만나는 것으로 삶에 작은 희망을 가지게 돼요. 그 희망은 여러갈래인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수장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이에요.”
“으음..... 잘 이해가 안 되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네. 우선 테러 조직 수장을 죽인 이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쉽게 말하면 아내가 원하는 행복을 위해 ‘복수의 해방감’ 같은 느낌으로.... 네. 그렇게 해주......”
“으음.... 이 부분을.... 이렇게라.....”
캐서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실 것을 사러갔다.
****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들 말하지만, 학교는 사회를 가르쳐주진 않는다.
캐서린은 제임스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생각하고, 손수 적었던 사회라는 것을 조금이지만 느끼기 시작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네.’
제임스는 감독들이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음에도 무엇 하나 놓치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의상 감독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에 나온 의상을 봤는데요. 조금 더 야한 의상은 어떨까요?”
“......야하게?”
“네. 스트립 클럽에서 막 도망쳐 나왔으니까요.”
“여기서 노출을 더 많이요?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잠시만요. 제가 과거에 참고했던 사진이 있거든요? 이 부분을 참고해주셨으면 해요.”
제임스는 아예 노트북까지 가지고와 감독님들한테 과거 참고했었던 자료와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그누스 감독님은 유심히 자료를 보더니 이내 눈을 꾹꾹 눌렀다.
“이건..... 거의 끈이군. 자네 그 나이 때에 이런 거에 흥미가 있었나?”
“크흠!”
“R등급 이라 가능은 하겠지만, 이러면 오히려 여배우 몸에 더 시선이 갈 걸세.”
“저도 마그누스 감독님 말에 동의합니다. 너무 야한 복장은 영화 시청 시에 몰입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흠흠.....”
“그래도 제임스 작가님이 최소한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없다는 건 알겠군요. 이런 사진을 참고할 정도니 말이죠.....”
“그건....”
“하하. 그래도 이 자료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임스 작가님의 어느 분위기를 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것 참..... 검은색 프론트 후크 브래지어에 가터벨트 정도가 좋을 것 같군요. 취향 하나는 확실한 작가님이라 한결 편하군요.”
“다, 다른 사진으로 넘어가죠.”
올리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모았던 의상 자료들을 확인해 보았다.
마그누스 감독님은 회의가 끝날 기미가 없자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흐음. 아무래도 더 이상 일을 진행하다가는 저녁밥도 못 먹겠군.”
“그러게요. 제가 너무 늦게 와서..... 아침 비행기를 탈 것을....”
“그걸 탓하려면 블루스타게이트를 탓해야지. 예약을 늦게 잡았으니까, 지금이라도 온 게 다행이지.”
“하하.....”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여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시나리오는 완성이 된 것 같고, 부족한 건 자잘한 것들이니 영화를 진행하는 동안 조금씩 맞춰가면 좋겠지.”
마그누스 감독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 여기까지만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지. 내일 보자고.”
그러더니 간단한 굿바이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잽싸게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나와 캐서린이 마그누스 감독님이 급하게 사라져서 약간 당황스러워하자 이내 옆에 있던 조엘이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은 배고픈 걸 가장 싫어하시거든. 징크스 같으신 건데, 배가 고프면 뇌가 굳어진다고 항상 말씀하셔.”
“하하..... 같이 저녁식사나 할까 했는데.....”
“참고로 마그누스 감독님은 저녁식사는 무조건 부인분하고만 드셔, 그곳이 다른 나라던 간에 말이야.”
그러고 보니 마그누스 감독님은 애처가로 유명하셨지.
“혹시 엄청 배고픈 거 아니면 나와 대화 좀 할까?”
조엘의 말에 나는 힐끔 캐서린을 바라봤다.
“캐서린 먼저 1층에 내려가 있어줘.”
“응. 알겠어.”
회의실에 다른 감독님들도 전부 사라지자, 그제야 조엘은 한숨을 쉬며 본론을 꺼냈다.
“아까 요구했던 거 말이야.... 솔직히 제임스 작가의 말을 전부 수용하고 싶거든, 하지만 내 능력만으론 부족해. 정확히 뭘 원하는 건지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가요?”
“응. 미안해.”
“할 수 없죠 뭐.”
하지만 조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제임스 작가의 요구사항을 내가 잘 알고 있는 선생님한테 전달해 봤거든?”
“선생님?”
“응. 그런데 선생님이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너도 만나면 도움이 될 거야.”
“누구시길래요?”
그러자 조엘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전 월드 미션 컴퍼니 음악 총책임자.”
“......!”
“그분이 널 뵙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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