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외면받는 자들
라울의 말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독자들하고 약속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더이상 [사막의 전갈]에 손을 대고 싶진 않긴 해요.”
“어.... 제가 기대했던 답변이 아닌데요? 하하.....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를 남은 한 방울까지 목 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하나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이미 가치를 다 했다고 생각해요. 괜히 건드렸다가는..... 작품에서 느꼈던 감동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음..... 작가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게임이나 드라마들도 시즌2가 제작되면 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망한다는 말 보단...... 아니다. 맞죠. 그 말이.”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시즌1의 성공으로 속편이 제작되면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시즌1의 명성조차 떨어트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물론 거대한 세계관을 한 권에 담기 어려운 스토리는 2부, 3부까지 생각해보겠지만, [사막의 전갈]은 테러 조직 수장을 죽이는 것을 끝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박스오피스 목표 달성 수익을 넘는다면요?”
“그땐 그럼 외전을 적을까 해요.”
“외전?”
“네. [사막의 전갈]은 애초부터 복선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2부에선 복선을 회수하면서 풀어나가는 형식으로 적을까 해요.”
“호오.....”
“거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여기까지만 알려드릴게요.”
“하하..... 이것 참, 작가님 거기서 끊으시다니요.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네요.”
“궁금하시면 이번 영화 성공하시면 되죠.”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네요. 그래야 작가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라울은 호탕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들어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 저한테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
“네. 근처에 제가 분위기 괜찮은 Bar를 아는데 거기서 한 잔 하시겠습니까? 물론 제가 내겠습니다.”
“저야 좋죠. 파티도 지겨웠는데 잘 됐네요.”
지겨운 파티에서 벗어날 탈출구가 생겼다.
****
아무도 우리의 행방을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마그누스 감독님은 투자자들과 대화 후 곧바로 집에 가셨고, 우리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인원들이 파티장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캐서린을 호텔로 보내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Bar로 향했다.
‘Bar는 처음인데.....’
값싼 펍은 가본 적이 많았지만, Bar는 비싼 술값때문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좋네.’
Bar라고 해서 약간 어두운 느낌을 생각했지만, 라울이 추천한 곳은 생기가 있는 나무들이 많이 있어 마치 숲 같은 분위기를 주는 곳이었다.
“마티니로.”
“아. 저도 마티니로.”
칵테일은 잘 몰라도 마티니는 알고 있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술이자, 바텐더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술로 유명했으니까.
바텐더가 만드는 술을 기다리며 나는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어쩐 일로 부른 건가요?”
“.....눈치채셨습니까?”
“갑자기 Bar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데 눈치 못 채면 그거야말로 머저리죠.”
“하하.....”
라울은 겸연쩍은 얼굴로 지으며 바텐더가 주는 잔을 받았다.
“아까 캐서린양과 나누시던 말을 들었습니다. 투자자들한테 기부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네. 아직 기부에는 뜻이 없어서 거절했죠.”
“잘하셨습니다. 애초에 기부라는 건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남의 강요로 해봤자 별 의미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세금 내기 싫어서 하는 것뿐이죠.”
“세금.....”
“제가 제임스 작가님을 부른 건 도움.....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도움?”
라울은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저희집은 기독교 집안입니다. 근데 어린 시절부터 교회는 가지 않았습니다.”
“.....특이하네요.”
기독교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많은 미국인들이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교회에서 기도할 시간에 하느님한테 행동으로 보여라. 라는 말을 부모님이 자주 하셔서요. 그래서 교회보다는 자원봉사에 자주 가게 되었죠.”
선행이 많기로 유명한 라울이다보니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저는 ‘경계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계선이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게 편할 것 같군요.”
라울의 자원봉사는 고아원이나 성당도 있지만, 희귀병에 걸린 아이들, 치매 걸린 노인 등 봉사활동을 함에 있어 한계를 두지 않고 경계선 자체가 없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아이는 자신이 죽을 날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한테는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게 죄가 되더군요.”
죽을 날을 아는 아이한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게 과연 위로일까?
죽을 날을 아는 노인한테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건 과연 독려일까?
죽는다는 것이 사실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고, 어쩌면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더 무섭지 않을까?
그 사실을 일찍 깨달은 라울은 그 이후부터 편견을 두지 않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근데 뭐하십니까?”
라울은 이야기를 듣다 말고 갑자기 노트를 꺼내서 한글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제임스를 바라봤다.
“아뇨..... 계속 해주세요.”
“뭐.... 제가 말한 경계선은 삶과 죽음이라는 애매한 경계 위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정도입니다.”
“철학자 같으시네요.”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았습니다. 어린 마음엔 막연히 죽음은 좋지 않다라고 생각했었죠.”
“어렸을 적엔 그렇게 생각했다라....”
“근데 아까부터 뭘 적으시는 겁니까?”
“별거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아무튼 나이가 드니까 미처 생각지 못한 점들이 보이더군요.”
“어떤 점이요?”
“그냥.... 봉사활동에 이유를 담는다는 것이 안 좋다는 걸 말입니다. 그저 마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 누군가한테 동정심을 가지고 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입니다.”
“흐음.”
제임스는 라울의 마지막 말까지 노트에 적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제 눈치채셨을 겁니다.”
“라울도 결국 기부해달라는 겁니까...?”
“하하. 아뇨. 그보다 더 힘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뭔데요?”
“그들을 위한 책을 써달라는 겁니다.”
노트 위에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예?”
라울은 바텐더한테 마티니를 한 잔 더 시키며 말했다.
“아무리 TV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이나, 가난한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떠들어봤자 요즘에는 효과가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깐의 측은지심 뒤에 그저 자신과는 먼 얘기라고 생각할 뿐이죠. 왜 그러신지 아십니까?”
“글.....쎄요?”
“지겹기 때문입니다.”
“지겹다라.....”
“매일 방송에 나오는데 지겹지 않겠습니까? 불쌍한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광고를 보다보면 사람의 감정은 무뎌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그랬네요. 어린 시절에는 광고에 이산화탄소 문제나 아프리카 기아 문제가 나오면 심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월마다 돈을 내주는 방식으로 저희도 돕자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광고를 봐도 딱히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아졌다.
“세월이 지나도 항상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총?”
“.....물론 그것도 맞지만, 문화입니다. 그러니 작가님께서 그런 류의 글을 써주시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노트에 적는 걸 멈추고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흥미롭게 듣긴 했지만 상당히 난처한 부탁이네요.”
“하지만 작가님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기내서 말한 겁니다.”
“음... 제가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잘 녹여낼 수 있을지...”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내기?”
라울은 바텐더가 가져다주는 칵테일 잔을 들며 말했다.
“8월 12일에 [블랙 & 월드]가 발매된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500만 부를 달성하면 사인회를 연다고 하셨지요?”
“네.”
“저는 5개월 만에 500만 부를 달성하는 것으로 걸겠습니다.”
“5개월? 아무리 당사자가 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닙니까?”
라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최근 본 한국 영화에서 ‘쫄리면 뒤지시던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쫄리십니까?”
“이야..... 미국 놈한테 그걸 들을 줄은 몰랐는데....”
현재 영화화로 [사막의 전갈]이 잘 팔리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아직까지 500만부는 달성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5개월 만에 500만부는 무리였다.
“사회에 버림받은 자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자들,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차별받는 자들의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적으면 되는 건가요?”
“예. 그들의 이야기를 주로 전면에 내세웠으면 합니다.”
“다크 판타지가 된다고 해도요?”
“오히려 환영입니다.”
“하하.... 좋습니다. 대신, 500만부 달성 내기에 실패하면 라울 당신은 제 영화에 평생 ‘무료’로 출연하세요.”
“하하하하하! 좋네요! 대신 인기는 가져가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주문한 마티니를 들어 약속의 건배를 나눴다.
****
마티니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잔은 충분하고, 두 잔은 넘치며, 세 잔은 부족하다.
나는 진이라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두 잔 정도 마시니 딱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책을 써주기로 했다고?”
“내기에서 지면 써주기로 했어, 아직 확정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류의 소설을 적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하긴, 다크 판타지나 다크 히어로 물은 꽤 재밌으니까.”
“게다가 작가로서 그런 대화 자체가 영감으로 작용하니까 나도 땡큐지. 라울이 말한 문화의 힘도 보고 싶기도 하고.”
“오빠는 한국 사람인데 문화의 힘도 몰라?”
“그게 대체 뭔데?”
“MTS나 골든핑크, OTT에서 방영된 갑오징어 게임이라던가, 요즘 그걸로 난리잖아. 한류라는 힘이 세계를 침공한다고 뮤튜브나 뉴스에서 난리인데 그런 것도 모르다니... 역시 Nerd Kwon...”
“그 정도야?”
“공항이 마비되고, 굿즈가 팔리고, 드라마에서 나온 게임도 따라하고..... 아무튼 장난 아니야.”
“헤에.....이제 나도 억지로라도 좀 봐야겠다. 아무튼 라울이 말한 건 한 번 적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영향력이 있을 때 말이지.”
“근데 내 방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나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 내일 공항에 가기 전에 백화점 한 번 더 들리자고.”
“백화점? 왜?”
“돈도 벌었는데 부모님 선물을 깜빡하고 있어서 말이야. 나는 이런 쪽에 약하니까”
“그 정도야 뭐.....”
“그리고 네가 연재하고 있다던 인터넷 소설 사이트도 말해줘.”
“거긴 왜? 연재해보게?”
“뭐..... 일단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만 볼까 하고. 어떤지 보고 연재할지 판단해야지.”
그 말에 캐서린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연재해! 내가 어떻게 올리는지 자세히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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