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친구 2
에일리를 과거 짝사랑한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예쁘고, 반에서 가장 활기찬 여자였으니까.
어린 시절 특히 내향적이었던 나는 나와 반대되는 에일리한테 끌렸었다.
당시 친구가 월리밖에 없었던 나로선 누구한테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녀한테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고백하지도 못하고 심적으로 차이게 되었다.
그 후 술에 맛을 들였다.
몬태나 주에선 개인 주거 공간에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술을 마셔도 되었기에, 나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 이후 고등학교를 몇 달 정도 더 다니다 때려치우고 월리랑 함께 일을 하러 다녔다.
“우엑! 몸에서 비린내 심한데 이 꼴로 가자고?”
“씻고 가면 되지. 근데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늦진 않았어. 그 자식들 저녁 내내 술 퍼마시자고 그랬거든. 지금도 마시고 있을 거야.”
“그럼 한껏 쫙 빼입고 와야하나?”
“지랄. 빼입을 옷은 있냐?”
“얼마 전에 산타모니카 갔을 때 정장 하나 맞췄지.”
캐서린은 렌탈이었지만 나는 잘 맞아서 아예 구매를 하였다.
파티 자리가 종종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침 하나 정도는 필요했다.
“펍에 정장을 입고 간다고?”
“눈에 띄고 좋지 않겠냐.”
“......전형적인 성공한 찐따라고 티내게?”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뭘 또 그렇게 심하게 말을 하냐.”
월리의 목에 팔을 둘러서 꽉 졸랐다.
펍마다 분위기가 달라서 정장을 입어도 괜찮은 곳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자주 가는 펍은 전형적인 시골 펍이었다.
“일단 씻고 대충 입고 가자. 월리 너도 우리 집에서 씻고 가.”
“그래도 되냐?”
“응.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어.”
“그럼 잠시 실례할게.”
우리는 집에서 간단하게 씻고 펍으로 향했다.
****
색소폰 LED 형광판이 그려져 있는 정겨운 시골 펍.
이름을 보려고 해도 LED가 들어오는 간판이 뜯어져 있어 우리는 그냥 마을에 있는 펍이라고만 부른다.
‘떨리네.’
지금은 아예 마음이 없다고 해도, 한때 좋아했었던 사람을 몇 년 만에 마주하려니 살짝 망설여지긴 했다.
“떨리냐?”
“그럼 안 떨리겠냐?”
월리는 피식 웃으며 내 등을 밀었다.
“롤렉스까지 차고 온 녀석이 뭐가 떨린다고.”
등 떠밀려 펍 안으로 들어오자 기분 좋게 흘러오는 팝 음악과 함께 정겨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포켓볼 같은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하며 하하호호 웃는 녀석들이 보였다.
“여!”
월리의 외침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오? 월리하고..... 제임스? 제임스 전역했어?”
“제임스가 왔다고?”
월리를 발견한 친구들은 그 옆에 있던 나를 발견했는지,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나한테 다가왔다.
“진짜 제임스네? 너 지금까지 어딨었냐?”
“야. 제임스 군대 갔다 왔잖아. 그것도 몰랐냐?”
“군대? 그럼 지금 군인이야?”
“아니, 한국 군에 입대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군대를 갔다온 걸 아는 녀석들도 있었고, 군대에 간 사실 자체를 모르는 녀석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녀석들이 대부분이다보니 내 소식조차 모르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브레드, 헤리.”
그 중에서도 월리만큼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같이 다녔었던 브레드와 헤리는 웃으며 나한테 반갑게 다가왔다.
-꽈악!
오랜만에 봤는데 덩치가 더욱 커진 브레드는 내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얌마! 전역했으면 우리한테도 연락을 해야지! 연락이 하도 없어서 월리보고 데려오라고 했다고!”
“켁켁. 기브! 기브!”
브레드는 우리 마을에서 살았었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커진 체격을 보아하니 운동을 하는 것 같은데 지금도 술 냄새보다는 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섭섭하다 제임스.”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헤리는 손가락으로 꾹꾹 내 배를 찔렀다.
“아파! 미안하니까 일단 놔봐!”
확실히 이 둘한테는 미안하긴 했다.
브레드와 헤리한테는 군대간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 마을에서 살지 않고 옆 동네에 살기 때문에 전역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에 이 녀석들과 함께 캠핑할 때 멧돼지에게 습격이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추억있는 사이였는데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었다.
브레드는 그제야 내 목에서 손을 풀어냈다.
“지금까지 뭘 하고 지냈어?”
나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뒷목을 주물렀다.
“그냥저냥..... 바쁘게 지냈어.”
월리는 내가 필명을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친하게 지내는 이 둘한테도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어! 제임스!”
“그래그래.”
나는 다가오는 녀석들하고 차례대로 주먹을 부딪치며 인사를 나눈 뒤 브레드와 헤리와 함께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마스터 여기 맥주 한 잔하고 콜라 세 잔. 콜라 한 잔은 제로콜라로.”
“.....미친놈들 술 안 마실 거면 펍엔 왜 온 거야?”
험상 굳게 생긴 마스터가 커다란 맥주잔에 맥주와 콜라를 담아서 건네줬다.
“그래서 지금까지 뭐 하는데 연락을 안 한 거야?”
“그냥..... 일하느라 바빠서 그렇지 뭐.”
“일? 또 미국 전역 다니면서 일 찾는 거야?”
“그건 아니고.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바빠서 연락 못 했어.”
브레드는 제로 콜라를 들어 입가로 가져가다가 내 손목에 있던 시계를 발견하자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못 보던 시계네? 오? 롤렉스?”
“.....그냥 짝퉁이다.”
혹시나 몰라 껴왔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짝퉁이라고 얼버무렸다.
그 이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갑자기 새벽에 수도관이 터졌는데, 이 새끼들이 병장부터 시작해서 전부 깨우더라고. 하아.... 그때 선임이고 뭐고 삽으로 후려치고 싶었다니까?”
“또 언제는 전봇대에 밧줄 하나만 의지해서 올라가라고 하는데.. 와 진짜 행보관 머리털을 전부 쥐어 뽑고 싶었다.”
“그래도 이 형님이 사격은 만발이다. 만발. 사냥할 때 실력 어디 안 가더라.”
이야기 대부분은 내 군대 이야기였다.
남자들끼리 만나면 딱히 할 말도 없다보니 그냥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이 놈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흥미롭게 경청하고 있었다.
아마 한국인이 느끼는 ‘군대’와 미국인이 생각하는 ‘군대’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딱 한 명. 이미 지겹게 들은 월리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어라? 근데 내가 왜 펍에 왔더라?’
실컷 군대이야기를 하다 보니 깜빡하고 있었던 사실이 기억났다.
“어? 제임스?”
귓가에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지를 입고 있는 여자가 물이 담긴 컵을 들고 놀란 듯 서 있었다.
“에일리?”
“제임스 오랜만이다!”
에일리는 아까 브레드가 한 것처럼 내 목을 졸랐다.
팔목이 가느다라서 그런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름 아픈 척을 하며 에일리의 팔뚝을 툭툭 쳤다.
“켁켁. 항복, 항복!”
“야 인마. 군대에서 전역했으면 이 누님한테 먼저 연락해야 하지 않아?”
에일리는 그제야 싱그럽게 웃으며 팔을 풀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러게 이게 몇 년 만이......냐?”
고개를 돌려 에일리를 바라보니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보였다.
“너 왜 이렇게 살쪘어?”
“임신한 거거든!”
“......임신?”
배가 불룩 솟아올라 있었다.
*****
과거 에일리는 반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여자였다.
반에서 말이 없는 학생들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줬기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았다.
당시 농구를 잘하던 남자하고 사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결혼까지 한 건가?
“결혼한 거야?”
“음...... 하하.”
에일리는 약간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결혼은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속도위반 한 거지.”
“아. 그럼 곧 하는 거야?”
“결혼..... 은 이제 못할 것 같아.”
“응?”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당시 화목했던 그 둘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콜라 잔을 들어올렸다.
“그 녀석 도망갔거든.”
“푸웁!”
갑작스러운 에일리의 고백에 나는 입안에 머금었던 콜라를 월리한테 뿜어버렸다.
“.....이런 씹.”
콜라를 뒤집어쓴 월리는 화도 내지 못하고 옆에 있던 브레드의 옷으로 대충 콜라 묻은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브레드는 화가 났는지 월리의 몸을 접어버릴 듯이 움직였지만, 그 둘의 다툼보다 에일리의 말이 더 중요했다.
“뭔 소리야. 도망가다니?”
“말 그대로야.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덜컥 사라졌어. 연락도 안 돼.”
“......”
에일리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엔 나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찾아 다녔었는데, 이젠 그냥 자포자기했어.”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꿈을 펼칠 수 있는 나이에 이렇게 된 거니까...... 그렇다고 아이를 지울 생각은 없어.”
에일리는 정말 해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녀석도 불안했던 거겠지. 걔도 막 꿈을 시작할 나이에 덜컥 애가 생겼으니까.”
“......”
에일리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스쳐가듯 보였지만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씁쓸함과 동시에 떠오르는 허무함이었다.
“이제는 화를 내는 것도 지겹고, 그렇다고 덜컥 생긴 아기 잘못도 아니잖아? 아기가 태어나면 키울 생각이야. 돈은 뭐 어떻게든 벌면 되겠지.”
에일리의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패션 관련 대학교를 다닐 정도로 패션에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옷을 스타일리쉬하게 입는 걸로도 유명했다.
‘모델 제의를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랬지?’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직접 입었던 에일리다 보니, 모델로서의 꿈도 키웠었다고 들었다.
모델일을 하면 패션 시장에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보니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래도 지 자식인데 한 번쯤은 보여달라고 싹싹 빌겠지.”
“......”
남편의 도망. 미혼모. 아빠 없이 자라날 아이. 차라리 그런 약자가 과거로 회귀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미안하지만... 웹소설에 필요한 영감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모아놓은 돈은 있고?”
“그야 당연히 없지.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는데 돈이 어디있겠어?”
“그럼 내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너한테 정식으로 인터뷰를 좀 요청해도 될까?”
“에이 친구끼리는 돈 거래하는 거 아니야. 어떤 인터뷰인데?”
“내가 요즘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냥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나는 약간 뜸을 들였다.
“질문이 기분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진짜 그냥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볍게 생각해줘.”
“응응. 그래서 뭔데?”
“너 밖에 생각 안 나서 그래. 이건 진짜야.”
“그래서 뭐냐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아이를 가지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서 꿈을 펼칠 수 있다면 무슨 감정일까?”
*****
“그래서 차였냐?”
“차이긴 뭘 차여?”
“그럼 에일리 반응이 왜 그래? 난 순간 네가 고백한 줄 알았다.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책임질 테니까 결혼해줘!’ 라고 말이야.”
“시끄러.”
에일리는 그런 질문을 듣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도 자신의 꿈 같은 건 생각해주지 않았다며, 앞에서는 괜찮은 척 힘내라고 말할 뿐 뒤에서는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에일리는 한 편으로는 기쁜 얼굴을, 한 편으로는 씁쓸한 얼굴을 짓고 생각해보고 연락준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 어깨를 툭 치며 나지막히 말했다.
[고마워. 제임스. 너 덕분에 깨달았어. 살아가면서 피해 가는 것 보다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중에 연락줄게 그때 제대로 이야기해보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괜히 생각하게끔 만들었나...’
그렇게 월리의 자동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즈음에 핸드폰이 울렸다.
-삐리리리리~!
“누구야?”
“.....조엘?”
음악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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