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수정
아침에 일어나니 메일로 [사막의 제국]이 와 있었다.
“드디어 왔네.”
글을 항상 쓰는 자신과 다르게 직장인인 루시아가 홀로 수정하다보니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비교적 빠르게 보내줬다.
‘세수부터 하고 오자.’
어차피 오늘도 늦게 일어나서 그런지 아침을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는 없었다.
나는 대충 세수를 마치고 집에 누가 있나 둘러봤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냐아아아아아아앙!
내가 방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쁜 듯이 달려오는 조그만 고양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팡이야 밥은 먹었니?”
-냐앙?
“하긴 엄마가 안 주고 가셨을 리가 없지. 내 방에나 가 있자.”
-니양!
팡이를 끌어안고 방으로 올라가 컴퓨터를 켰다.
꿈틀거리는 보드라운 감촉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 얌전히 있어.”
-냐앙?
침대 위에 팡이를 내려놓았지만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마치 침대 위에 혼자 있기 싫다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냐아아앙! 냐아앙!
무릎 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듯 그릉거리며 무릎에 꾹꾹이를 시전했다.
“그럼 조용히 있어야 해. 알겠지?”
-니양~!
너나 잘하라는 듯이 팡이는 나와 슬쩍 눈을 마주치더니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리며 누웠다.
그런 팡이의 머리를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는 루시아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내가 쓴 것과 루시아가 수정한 버전을 비교하며 전체적으로 살펴봤다.
‘역시.....’
루시아한테 맡긴 게 역시 정답이었다.
다람쥐 같던 신입사원 모습이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준 수정본에 꽤나 감탄했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맡겨보고 싶었다.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올라갔어.’
디테일의 차이가 명작과 망작을 구분한다.
마그누스 감독님한테 들었던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블랙 & 월드]와 [드래곤 마스터], 그리고 [사막의 제국]의 수정에 무엇보다 집중했다.
‘작가는 글을 쓰는 작업보다 수정하는 작업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 하지.’
수정한 글과 수정을 거치지 않은 글.
그 둘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었고, 거기서 더 극명한 효과를 내려면 2차 교정이 필요했다.
작가의 자체 수정, 출판사의 1차 수정 및 2차 교정, 마지막 전체적인 스토리를 읽는 3차 완본까지 걸치면 글의 퀄리티는 최고로 높아진다.
‘내가 수정하는 것보다 퀄리티가 높아졌어..... 이 여자 신입사원 맞아?’
저번에 식당에서 루시아와 나눴던 대화가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 자리에서 팀장이 말했던 부분을 자기식대로 수정했었지.’
당시 스티븐이 가리켰던 부분은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사막의 모래결이 흘러내리는 계곡 안에서 툰툰은 자신의 타오르는 심장이 세상의 어둠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남들은 어둠에 갇혀진 세상을 한 줄기의 빛으로는 밝힐 수 없다고 말하지만, 눈앞에 타오르는 장작이 그 소문을 증명했다.]
이걸 루시아는 이런 식으로 수정했었다.
[사막의 모래가 바람처럼 흘러들어오는 계곡 안에서 툰툰은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았지만, 어두운 감정이 조금씩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남들은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툰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눈 앞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이 서서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에 담고자 했던 내 뜻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상태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만 남겨놓은 수정.
스티븐처럼 아이들이 어려워할 수 있으니 간략하게 만들자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였기에 나는 루시아한테 수정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생각했던 내 생각을 지우지 않고 아이들한테 전달할 수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아한테 [블랙 & 월드]는 맞지 않았겠지.”
마그누스 감독님 말대로 아동 문학은 아동 문학 출판사에, 장르 소설은 장르 소설 출판사에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루시아의 수정은 읽기 편하기는 했지만 만일 [블랙 & 월드]도 그런 식으로 수정했다면, 지금 같은 재미나 복선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루시아씨 번호가..... 없네. 스티븐한테 전화하면 되려나?”
나는 팡이를 쓰다듬으며 스티븐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한테 연락이 닿았다.
-네! 작가님! [블랙 & 월드] 성공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다짜고짜 축하한다고 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아직 하루 밖에 안 됐는 걸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하루 만에 20만부 완판이면 성공한 거나 다름없죠! 그보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전화 주셨는지.....?
“아, 제가 루시아씨 번호가 없어서요.”
-아..... 오늘 루시아는 일찍 조퇴했습니다. 많이 피곤해보여서 제가 조퇴시켰습니다만.... 혹시 루시아한테 볼일 있으십니까?
“아뇨. 새벽에 교정본이 왔더라고요.”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은 건.....
“훌륭했다고 전해주셨으면 해요. 나중에 작품이 잘 되면 제가 큰 선물 하나 드리고 싶다고도 전해주세요.”
-크으....! 알겠습니다!
“바로 최종검토하고 완성본으로 만들면 될 것 같아요.”
-혹시 제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아. 그래서 말인데요, 앞으로 [사막의 제국] 시리즈는 루시아한테 맡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루, 루시아한테 전부 말입니까?
“[사막의 제국]만요. 이번 수정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요.”
-흐음... 루시아를 그렇게 인정해주시니 루시아가 부러운데요? 알겠습니다. 대표님한테 말해서 문의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무튼 오늘 보낸 것 그대로 진행해서 다시 보내주셨으면 해요. [드래곤 마스터]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아. 일주일 후에 출판을 시작해서 한 달 후에 전 서점에 발매를 시작할 겁니다.
“일....주일? 그렇게 빨리요?”
-네, 이 흐름을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원래라면 오늘 아니면 내일부터 공장을 돌릴 예정이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지금 바로 인쇄 가능한 공장이 없어서 일주일 뒤에나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와... 일처리가 빠르시네요.”
-저희의 장점 중 하나죠. 작가님이 오직 글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게 바로 저희 SC라스틱의 비전 중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랙 & 월드] 양장본 반응이 좋으면 저희도 바로 양장본 1,000부를 찍어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양장본 까지요?”
-예. [블랙 & 월드]는 몬스터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도감이 딱히 필요 없지만, [드래곤 마스터]는 작가님의 상상력에 만들어진 드래곤이다보니 그에 대한 도감을 만들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드래곤들의 이야기다보니 아이들이 드래곤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서요.
“음.... 그렇기는 하겠네요.”
-양장본 표지는 시안이 나오면 바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도감은 저희 나름대로 만들어 볼까 하는데..... 혹시 작가님이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만드는 것 자체는 상관없는데, 제 생각 속에 있는 드래곤을 그리려면 일러스트 작업하실 분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건 물론 저희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제 생각엔 [드래곤 마스터]도 [블랙 & 월드] 못지 않은 흥행이 될 것 같아서.. 미리 도감을 만드는 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차라리 시간 나시면 SC라스틱에 한 번 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SC라스틱 위치가 어디죠?”
-뉴욕입니다.
“뉴욕......”
우연이 이렇게 겹치나?
“제가 안그래도 다음 주 쯤에 뉴욕에 갈 예정입니다. 그때 뵙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저희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예. 그럼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작가님도 오늘 하루 좋은 일만 있으시길.
스티븐과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 & 월드] 와 [드래곤 마스터]까지.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느낌이라 가끔은 이게 메타버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제 뭐할까?”
-냐양?
팡이는 이제 놀아달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일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은 다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비타민 D를 열심히 충전하다가 점심이 되면 웹소설에 올릴 글을 적었다.
저녁이 되면 식사를 하고 잠깐 팡이랑 놀아준 후에 적었던 웹소설을 수정했다.
그렇게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시간 속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로건?”
검은색 쇼핑백 하나를 들고 있는 로건이 집 밖에 서 있었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가님!”
‘벌써 3일이 지났나?’
항상 같은 패턴으로 지내다보니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로건의 뒤로 작은 쇼핑백과 상자를 들고 있는 에밀라가 활짝 웃으며 이어서 인사를 건넸다.
“작가님! 저도 왔어요!”
“아. 어서오세요 에밀라.”
나는 저번처럼 그 둘을 집으로 들였다.
“아. 빈손으로 오면 뭐해서..... 선물입니다.”
“브랜디네요?”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실례였는지요?”
“아뇨아뇨.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네요. 감사합니다. 들어오세요.”
-냐앙? 냥?
팡이는 처음 보는 인간에 두려움보다는 흥미를 느꼈는지, 코를 벌렁거리며 그들의 냄새를 맡았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훨씬 귀엽네요. 귀여워라... 아! 고양이 키우신다고 해서 저도 선물 가져왔어요!”
팡이를 보자 이번에는 에밀라가 들고 있던 걸 나한테 내밀었다.
“이건?”
“저도 고양이를 키우거든요.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에요!”
“감사합니다. 팡이야. 고맙다고 인사해.”
-냥!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팡이는 에밀라 앞에서 배를 벌러덩 까고 애교를 부렸다.
“커피 드시겠어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는 한인 마트에서 구한 밀크커피를 타서 그 둘한테 건넸다.
커피 내릴 줄 모르기에 그냥 밀크커피를 타왔다.
“근데 오늘은 어쩐 일로.....”
“우선 이거.”
로건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상자는 브랜디나 고양이 간식하고 다르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엠블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벤츠?”
“맞습니다. 하하하! 작가님 차가 없으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차는 다음 주에 올 예정입니다.”
상자 안에는 차키가 있었다.
“선물입니다.”
“.....좀. 과하네요.”
미국에서도 벤츠는 비싸다보니 롤렉스를 선물로 받았을 때보다 부담감이 있었다.
“과하다니요. 저희가 받은 것에 비하면 드래곤 발톱만큼도 아닙니다. 그냥 편안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거... 다음에 또 작품 같이 하자는 뇌물 아닌가요 로건?”
내가 장난스럽게 찔러보자 로건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역시 베스트셀러 작품을 쓰는 작가님들은 속일 수가 없다니까요! 물론 다음에도 같이 해주시면 좋지만, 원래 출판사는 빵 터지는 작품 하나로 먹고 사는 곳이라..... 작가님이 저희 회사엔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로건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일단 차키를 받아들였다.
‘이럴 경우 거부하면 로건이 곤란하겠지.’
내가 차키를 받자 그제야 로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본격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작가님.”
“네.”
“오늘 찾아온 이유는 우선 [블랙 & 월드]의 성공을 축하와 선물을 전달해주기 위함도 있지만..... 가장 큰 용건이 있습니다.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죠.”
에밀라는 들고 있던 남은 상자 하나를 나한테 내밀었다.
“우선 양장본 10권입니다. 가장 먼저 출판된 따끈따끈한 양장본입니다. 주위 분들한테 선물하시라고 넉넉히 가져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10권도 많네요.”
“부족한 것보단 넘치는 게 좋죠. 그리고 또 다른 용건은.....”
로건은 들고 있던 서류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영화제의.....”
“맞습니다. [블랙 & 월드]..... 영화 제의가 벌써부터 빗발치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은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의 싸움이니까요. 그 중..... 이곳에서 하루에 한 번씩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로건은 서류를 넘겨 한 제작사를 가리켰다.
월드 미션 컴퍼니.
세계의 문화 컨텐츠 제국이 내 작품을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