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작곡
엘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지, 뮤튜브에 주기적으로 영상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춤까지 추네.’
오랜만에 들어간 엘리나의 뮤튜브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KPOP cover dance를 추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는데, 그 친구들 중에선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엘라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채널이 보다 깔끔해졌고, 직접 만든 곡에는 가사가 자막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 조금 더 보기 편해졌다.
“근데 어떻게 연락해보지? 아. SNS 사이트가 적혀있네.”
영상 밑 코멘트란에 SNS 사이트가 기입돼 있었다.
‘쪽지를 보내면 받으려나?’
쪽지를 보내볼까 했지만, 문득 그녀가 나한테 가사를 가르쳐줄 수 있는 실력이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할까....’
SNS를 열어둔 상태로 한참을 고민했다.
“......쯧.”
이내 노트북을 닫았다.
“할까 말까 싶을 땐 조금 더 고민해보는 게 좋겠지. 일단 혼자 써보고 정 안 되면 연락하자.”
***
SPA에 호텔을 잡아둔 건 신의 한 수였다.
“으아아아.....”
우선 피곤할 때마다 릴렉스 룸에 가서 안마의자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날씨가 쌀쌀할 때는 온탕에 들어가 있으면 됐고, 몸이 개운하지 않을 때는 사우나와 얼음방을 왔다 갔다 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벌써 하루가 지났네.”
창밖으로 노을 지는 걸 보니 오늘 하루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기를 약속한 날은 제외해주신다고 하셨으니, 오늘이 지나면 이틀이 남은 거다.
어차피 [블랙 & 월드] 양장본은 드릴 예정이었으니 상관없지만, 그래도 주어진 기일 내로 가사를 써보고 싶기는 했다.
“끄응.....”
안마의자에 앉아있는 상태로 [블랙 & 월드] 내용을 계속 생각했다.
소설 작가인 내가 뜬금없이 작곡을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경험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하나의 스토리를 극도로 압축시킨 느낌이었지.’
노래의 시간은 대부분 3분에서 5분 사이였다.
어느 노래 가사는 자신의 살아온 일생을 모두 담는다.
그와 반대로 어느 노래는 10초도 안 되는 짧은 사랑의 경험을 4분짜리 노래로 늘여서 만들기도 한다.
‘더 이상한 건 그렇게 짧은 가사를 듣고도, 머릿속에 하나의 스토리가 상상된다는 게 신기하네.....’
소설은 쉽게 말해 작가가 자신의 세상을 글로써 표현하고 독자들한테 ‘어때? 내 세상은?’이라는 무형의 질문을 던지면, 독자들은 작가의 세상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설은 직접적인 대화로 주고받는 게 아닌 글과 상상으로 대화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노래는..... 조금 복잡하네.’
가수는 자신의 심정을 현실에 호소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 인연, 우연, 운명 등을 상상하고 그걸 가사로 만들어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 것.
가수들은 그럼 어떤 마음으로 가사를 쓰는 거지?
“조엘한테 물어볼까? 근데 조엘이 만든 음악들을 보니까 대부분이 BGM이던데.....”
막상 가사를 쓰자니 음악 자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대충 시라도 적어볼까?’
잠시 고민하던 난 안마의자에 누운 상태로 수첩을 꺼내 들었다.
‘한때 시도 참 많이 봤었는데.’
그냥 재미 삼아 끄적여 보기로 했다.
「[블랙 & 월드]
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 저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저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저희가 함께했었던 시간을
혹시 누군가 저희를 물어보거든 말하지 마세요
혹시 누군가 저희를 찾거든 무시하세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도 저희는 항상 그대의 기억에 있으니까요.
사라지는 발자국처럼 저희는 기억 속에 잠시 동안 남아있으니까요.」
주인공 에나와 같은 하프 몬스터들의 생각을 한번 써봤다.
“이렇게 쓰니까 읽을 만한데?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크흠. 좀 재능이 있나?”
조사를 하는 것보단 그냥 뭐가 됐든 뭐라도 적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천천히 차근차근 앞으로 발을 내디뎌봐야 그게 앞으로 걷는 건지 아니면 제자리걸음인지 알 수 있겠지.
***
늦은 밤 조엘은 제임스로부터 갑작스럽게 메일 하나를 받았다.
‘벌써 왔나?’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기대되진 않았다.
제임스가 인기 작가라고 해도 소설과 가사는 엄연히 다른 분야니까.
‘가사를 이런 식으로 보낼 줄은 몰랐는데.....’
파일을 열어보니 장문의 글이 적혀있었다.
마치 소설처럼 대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걸 노래로 만들어보라는 건가?”
에드워드 선생님의 몇 되지 않는 제자 중 한 명이 조엘이다.
평소 어리숙한 모습도 보이지만, 그 재능은 어딜 가지 않았다.
음을 만들진 않더라도 가벼운 콧노래로 제임스가 보낸 가사를 흥얼거리며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뛰어난 편은 물론 아니었지만, 노래로 만든다면 나름대로 들을 만할 것 같았다.
스토리는 부모가 몬스터로 변한 에나를 주거침입을 한 강도인 줄 알고 신고하는 부분이었다.
에나의 서글픔, 배신감, 외로움이 가사 속에 잘 나타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괜찮은 편이지만 신박함이 없네.....”
선생님은 제임스가 가사를 잘 작성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착각하신 건가?
“일단 단점에 대해서 조금만 적어서 보내보자.”
조엘은 가사에 보이는 문제점을 적어 다시 이메일로 보냈다.
“후아암~ 이제 자자.”
***
조엘이 잠든 시간에도 제임스는 자지 않고 있었다.
이메일이 오자마자 곧장 확인하고 조엘이 보낸 피드백을 확인했다.
따분하다, 신선함이 없다, 의미 없는 문장이 많다 등.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을 만한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말이 필요해.’
소설은 시각으로 본다. 노래는 청각으로 듣는다.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 가장 컸다.
시각으로 본다면 복잡한 내용이라도 머릿속에서 생각하여 풀어낼 수 있지만, 청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다른 가사를 놓치게 될 수 있었다.
“글을 압축함과 동시에 간결하게.....”
가사를 다시 써볼까 했지만, 그 이전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 있었다.
“스토리를 다시 정하자.”
아무래도 부모가 에나를 신고하는 장면은 맞지 않을 듯싶었다.
[블랙 & 월드]에서 어느 부분을 가사로 만들 건지 다시 생각했다.
“이 부분으로 하자.”
에나가 몬스터를 지키기 위해 고스트 헌터를 죽이는 부분.
간략하게 내용화가 가능했고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감정이입이 가장 잘되는 부분이리라.
-투두두둑!
손을 풀고 다시 가사를 썼다.
***
쓰고, 지우고, 수정하고, 삭제하고
그 과정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했다.
어느새 새벽이 지나 해가 떠오르고 있지만 내 손은 계속 멈춰있었다.
생각을 비웠다.
지금까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던 것들을 전부 버렸다.
상상으로 만들었던 [블랙 & 월드]의 세계를 떠올리고, 머릿속에 오직 그거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든 걸 지웠다.
스토리는 에나가 고스트 헌터를 죽이는 장면도 괜찮았지만, 그 부분보다 더욱 극적인 부분을 쓰고 싶었다.
‘내가 가장 극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스토리.....’
그건 바로 주인공과 케이가 만났을 때였다.
처음으로 만났을 때 주인공을 죽이려 했었던 케이, 하지만 케이는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에나를 전력으로 도왔다.
어딘가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극적인 분위기에선 서로를 도우며 신뢰를 쌓아가는 이야기의 시작.
내용 진행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나는 서서히 가사로 풀어냈다.
“.....다음부터는 가사는 절대 쓰지 말아야지.”
내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이건 영 나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다짐했다. 그냥 앞으로는 글이나 열심히 쓰자고. 휴재하지 말고.
‘하아아암..... 졸려.’
나는 수정도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조엘한테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
딱 2일 차가 되는 날, 조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메일로 온 파일을 서둘러 프린팅하고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안에서 고등학생 정도 되는 소녀가 나왔다.
“응? 조엘? 무슨 일이야?”
“다이애나. 혹시 선생님 계셔?”
“응. 아침 드시고 계셔. 아침밥 먹었어?”
“아니 아직.... 아니 이게 아니지. 혹시 지금 선생님 좀 뵐 수 있을까?”
“조엘이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여보내라고 했으니까. 들어와.”
조엘은 청결하게 정리된 집의 복도를 지나 커피를 마시고 계신 선생님한테로 향했다.
“어머? 조엘? 무슨 일이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헬리아 부인.”
다 먹은 접시를 치우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은 다이애나의 어머니로, 한때 잘나갔던 배우였다.
헬리아는 익숙한지 접시를 치우며 헐레벌떡 달려온 조엘한테 물을 건넸다.
“오늘은 또 무슨 일 때문에 왔어요?”
헬리아의 말에 뒤에서 커피를 마시던 에드워드가 말했다.
“날 보러 온 거겠지. 그래서 결과물은 가져왔냐?”
“넵! 조금 빨리 나오기는 했지만..... 내용물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꺼내 봐.”
조엘은 서둘러 가방에서 프린트한 A4용지 하나를 꺼내 에드워드한테 내밀었다.
“그게 뭔데요?”
“저도 볼래요.”
둘의 대화가 궁금했는지 헬리아와 다이애나 또한 에드워드의 뒤로 가 A4용지에 적혀있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예요?”
한때 할리우드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던 헬리아였기에, 그녀는 종이에 적혀있는 글이 가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가사는 읽을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썼던 6단어 소설과 비슷한 향기가 흘렀다.
그냥 천천히 읽는다면 1~2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었지만, 그곳에는 무언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기운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가사를 천천히 읽어봤다.
“[처음이기에 용기 낼 수 없다. 누구나 처음은 아픈 것이다.], [운명은 슬픔이다. 기쁨이 되려면 끝까지 걸어야 한다.], [남한테 한 번도 주지 않았기에 나는 감정이란 걸 알지 못한다.], [버려지는 건 육신이다. 쓸모 있는 건 마음이다.]..... 이 녀석 무슨 명언 만드냐?”
“그래도 굉장하지 않아요? 재밌는 가사 아니에요?”
“[블랙 & 월드]에서 주인공과 케이가 만나는 장면을 모티브로 했나 보군....”
[처음이기에 용기 낼 수 없다. 누구나 처음은 아픈 것이다.]는 잔혹한 세계의 뒤편으로 들어가야 하는 에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운명은 슬픔이다. 기쁨이 되려면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자신이 하프 몬스터인 것을 깨닫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려는 자신의 모습에 복잡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남한테 한 번도 주지 않았기에 나는 감정이란 걸 알지 못한다.]는 몬스터를 극도로 싫어하는 케이가 하프몬스터 에나를 조금씩 도와주며 차가웠던 감정이 녹는 부분이었다.
[버려지는 건 육신이다. 쓸모 있는 건 마음이다.]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육신보다, 서서히 몬스터처럼 바뀌어 가는 에나의 변화를 적은 것이다.
에드워드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글을 읽던 다이애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이거 설마 드래곤 원님의 글이에요?”
“......다이애나. 그래도 할아버지 앞인데 그 녀석한테 ‘님’자를 붙이는 건 아니지 않니?”
“꺄아아아악! 저 이거 가질래요! 제가 작곡해보고 싶어요! 저 주세요!”
다이애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에드워드 손에 있던 종이를 빼앗듯 가져갔다.
-꽈악.
에드워드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놈이 내 손녀를....”
기뻐하는 손녀의 모습에 에드워드는 어딘가 빈정이 팍 상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