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저녁 식사 초대
나는 그날 하루 동안 푹 자고 일어나니 저녁이었지만, 대충 세수만 한 상태로 릴렉스 룸으로 향했다.
“으아아아아..... 너무 좋아.....”
이 좋은 걸 지금에서야 알다니.
얼른 집으로 주문해야지.
나는 한참 동안 안마의자에 앉아있다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응? 전화가 많이 와 있네?”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었다.
‘무슨 일 있었나?’
솔직히 어제 마지막에 적었던 가사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뭘 쓰긴 썼던 거 같은데.....’
진한 커피로 수마를 몰아내며, 비몽사몽한 상태로 썼기에 내용이 생각나질 않았다.
“.....안마의자 시간만 끝나고 전화하자.”
지금은 그저 이 편안함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내기는 어떻게 됐으려나.....’
아침부터 자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했다.
‘그냥 이대로 조금 더 쉬자.... 이대로.... 이대로.....’
피로를 풀기 위해 안마의자에 앉았지만, 강하게 조였다 약하게 풀어주는 안마에 서서히 잠이 들 것 같았다.
“역시 여기 있었네.”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서서히 감기던 눈꺼풀에 힘을 주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조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후우..... 전화 좀 받지 그랬어.”
“하아암.... 새벽까지 가사 쓰느라 잠을 못 자서요. 방금 일어나서 안마의자에 앉은 참이에요..... 여기 호텔 좋네요.... 정말....”
“새벽까지 가사를 썼다고?”
“네에..... 한 번 집중하면 헤어나오질 못하거든요. 버릇 같은 거죠... 그보다 진짜 어쩐 일이세요?”
“너 찾으러 왔지. 선생님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어.”
“.....저녁 식사요?”
“응. 너 데려오라고 하셨어. 내기 결과도 확인하자고.”
“벌써요.....?”
나는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으....”
-우드득!
스트레칭을 하며 굳어있던 몸을 서서히 풀었다.
“목욕은 하고 가도 되죠?”
“그럼 그 꼴로 가려고?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씻고 나와. 빨리 나와야 한다?”
“10분 안에 나올게요.”
정확히 5분 만에 목욕을 끝내고 나왔다.
***
에드워드 선생님의 집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마당도 넓고, 집도 넓었지만, 정원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나무들 때문인지 기품 있어 보였다.
외벽은 옅은 붉은색 벽돌로 지었는데 그 때문에 더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으로 와.”
조엘은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주 오는지 선생님 집으로 들어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식탁에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특히, 추수감사절에서나 보던 칠면조 오븐구이가 떡하니 식탁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꼬르르륵.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에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내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머?”
오븐 장갑을 낀 채 음식을 나르던 여성이 주방에서 나왔다.
얼굴만 보면 스무 살 후반쯤 되어 보였지만, 제임스는 그 여성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헤, 헬리아?”
내가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진짜 단순했다.
과거 [드래곤 블러드]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 배우로서 활동을 중지했지만, 젊은 시절의 미모를 아직도 가지고 계셨다.
“저를 아시나요?”
“제, 제임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헬리아를 어린 시절부터 봐온 제임스로선 떨리는 게 당연했다.
얼마나 떨리는지 손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내 첫사랑.....은 아니지만.’
책에 빠지기 전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여성이 헬리아일 정도로, 한때 열렬한 팬이었다.
“어머? 혹시 드래곤 원.....?”
“부, 부끄러운 필명이지만 그렇습니다!”
“잘 오셨어요! 제 딸이 얼마나 팬인지.... 아. 그보다 배고프시죠? 곧 선생님이 오실 거예요.”
헬리아는 에드워드를 사적인 자리에서도 선생님이라 불렀다.
이유는 같은 업계에 종사했던 분이라 그런지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넵.”
“편안히 계세요. 조엘 씨도 앉으시고요.”
“알겠습니다, 부인.”
조엘이 식탁에 앉자, 나도 가지고 온 걸 일단 내 발밑에 내려놓고 조엘 옆에 앉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소소한 저녁 식사라면서요?”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왜 칠면조가 나온 거지?”
한국의 추석이라 불리는 추수감사절에 미국인들은 칠면조를 먹는다.
그 외에도 크리스마스 때 가족들과 둘러앉아 칠면조를 먹기도 하지만, 아직 8월인 지금 추수감사절도 멀었는데 어째서 칠면조가 식탁에 놓여있는지 모르겠다.
‘칠면조 좋아하시나?’
닭고기하고 육질 자체가 다르다 보니 솔직히 부위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다.
미국으로 온 첫해, 비싼 돈을 들여 칠면조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뼈 크기와 힘줄 때문인지 버리는 양도 많았고 먹다 보니 퍽퍽해져서 많이 먹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남은 칠면조를 닭곰탕처럼 살을 찢어 푹 삶아버렸는데, 솔직히 구운 것보다 먹을만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추수감사절에도 칠면조를 먹지 않는다.
먹고 싶으면 고모부네로 가면 되니까.
‘전역 파티에서도 안 먹은 칠면조를..... 근데 칠면조 상당히 비싼 텐데...’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식탁에 놓여있는 칠면조를 멍하니 바라보자, 헬리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선생님 특별 주문이에요.”
“.....특별?”
“네. 아무래도 손녀가 좋아하는 작가가 오셨으니 대접하라고 한 게 아닐까요?”
“아.....”
그 말에 나는 부끄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SPA에서 손녀가 내 글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나 때문에 비싼 칠면조를 구웠다고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잠시 외출하셨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뒤에는 잘생긴 남자 한 분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선생님의 친아들인 안토니로 보였다.
‘술?’
선생님과 안토니의 품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드, 들어드릴까요?”
“됐다. 자리에 앉아있어라.”
조엘과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고개를 저으시더니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아 술을 차곡차곡 식탁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가?’
설마 내가 전화를 못 받아서 그러신 건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은 안토니를 바라봤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안토니 잭슨입니다. 그냥 편하게 안토니라고 불러주세요.”
“제임스 권입니다. 저도 그냥 편하게 제임스라고 불러주세요.”
“하하. 네. 제임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안토니.”
안토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나는 다시 조용히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선생님이 나를 노려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저어.... 제가 뭘 잘못했나요?”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크흠. 아무것도 아닐세.”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무시한 채 시간을 확인했다.
“안토니. 다이애나는 뭘 하고 있길래 내려오질 않아?”
“아. 불러올까요?”
“그래. 손님도 있는데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지. 다이어트하니까 밥은 먹지 않더라도 인사는 하라고 해라. 드래곤 원이 왔다고 하면 금방 내려올 거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겠죠. 갔다 올게요.”
안토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이애나가 손녀딸 이름인가?’
그보다 다들 왜 이렇게 잘생겼어?
처음 안토니를 봤을 때 귀티가 자르르 흐르는 걸 보고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귀족을 보는 줄 알았다.
옆에 있는 조엘도 훈남인 편이었고, 에드워드 선생님도 SPA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르게 단정한 옷을 입고 계셔서인지 카리스마가 넘치셨다.
나 혼자 쭈꾸미가 된 듯한 느낌에 자연스레 기가 죽었다.
“크흠.”
안토니가 2층으로 올라가자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쓴 가사 잘 봤네. 참 재밌게 썼더군.”
“그런가요?”
이곳으로 올 때 파일을 열어 확인했는데, 내가 쓰긴 했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다만, 노래 가사가 아닌 마치 명언 같은 느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다이애나가 아주 좋아해.”
“하하..... 기쁘네요.”
“기쁜가?”
“네?”
“기쁘냐고.”
“당연히.... 기쁘죠?”
그러자 선생님의 표정이 별안간 근엄하게 변했다.
“고등학생밖에 안 된 애가 좋아해 주니 기쁜가?”
“예, 예?”
“예라고? 자네 지금 예라고 했나? 좋게 봤더니. 에잉 쯧쯧.”
‘가, 갑자기 왜 이러시지?’
아니 애초에 난 다이애나를 애지중지하시는 게 보이길래 엄청 어린 나이의 손녀인 줄 알았다.
“선생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크,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헬리아가 마지막 음식을 들고 와서야 선생님은 진정되셨는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싸늘하다.’
헬리아 부인이 와서 다행히 여기서 끝난 것이지, 만일 늦게 오셨다면 정신적으로 불안했겠지.
“그냥 조용히 먹고 가자.”
조엘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으신 선생님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았기에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고 2층에서 안토니와 함께 캐서린보다 키가 큰 여성이 내려왔다.
한껏 꾸민 듯한 옷을 입고 내려온 여성은 나를 보자마자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마치 연예인을 만난 팬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하하하하. 다이애나가 평소 제임스 님 소설을 굉장히 좋아해서요.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팬카페도 가입했는데 우수 회원이라고 하더군요.”
“우수 회원..... 대단하네요. 저는 가입도 못 했는데.”
안토니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다이애나의 몸을 툭 건드렸다.
“인사해야지. 무안해하실라.”
그 말에 다이애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다이애나 잭슨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제임스 권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제임스라고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패, 팬이에요! 정말 팬이에요! [사막의 전갈]하고 [블랙 & 월드] 정말 재밌게 읽고 있어요! 아침에 작가님이 보내주신 가사도 벌써 전부 외웠어요!”
“가사....를요?”
“네!!!”
옆에서 선생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 다이애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질투하셨구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딸이 웬 개뼈다귀 같은 녀석한테 정신이 팔려있는데 아무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겠지.
다이애나는 문득 내가 서 있던 자리 밑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종이로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다이애나의 시선에, 나는 웃으며 종이상자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선생님 내기의 결과는 어떤가요?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한데..... 일단 오늘 보낸 가사부터 확인하고 싶어서요.”
“크, 크흠!”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근엄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셨다.
“난 가사를 써오라고 했지, 명언을 쓰라고 하지 않았네.”
“하하..... 역시 그런가요? 그럼 제 패배네요.”
여기서 괜한 자존심 때문에 가사를 다시 써오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사를 쓰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저 좋은 경험을 해서 좋았을 뿐, 내 가사가 쓰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3일이 지나지 않고 제 패배를 인정했으니까 [블랙 & 월드] 양장본 하나면 충분하겠죠?”
양장본이라는 말에 다이애나의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