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저녁 식사 초대 (2)
양장본은 당연히 다이애나 손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헬리아. 항상 네가 수고한다.”
“어머? 저 주시는 거예요?”
“그래. 원래 다이애나한테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주기 싫어졌구나.”
“하, 할아버지?”
“크흠!”
방금 다이애나의 모습에 질투가 나셨는지 양장본은 헬리아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어, 엄마.....”
다이애나는 헬리아의 손에 들려있는 양장본을 소유욕이 그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까지 양장본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친구, 사촌, 엄마, 아빠, 할아버지 이름으로 모조리 청했지만, 운발의 신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하긴,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인원이 몰렸는데 거기서 990권만 추첨된다고 하니... 그 중 당첨될 확률을 희박하기 그지없었다.
“흐응?”
헬리아는 애타 보이는 다이애나를 보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요즘 집안일이 많아서 그런가? 어깨가 조금 뻐근하네.....?”
“어,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그러니? 요즘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청소도 좀.....”
“그것도 내가 할게! 엄마는 그냥 푹 쉬어!”
“어머 고마워라.”
이때다 싶었는지 밀린 집안일을 전부 다이애나한테 시켰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주목을 끌었다.
“크흠! 이제 그만 먹지.”
음식을 앞에 두고 너무 오래 대화한 것 같았다.
우리는 드디어 식사를 시작했다.
***
헬리아 부인의 요리 솜씨는 정말 뛰어났다.
엄청 뛰어난 맛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국의 가정식다운 그런 맛이었다.
“저희 엄마는 치킨누들스프를 가장 잘 만드세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잭슨.”
“선생님! 그냥 다이애나라고 불러주세요!”
다이애나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음식을 계속 내 앞으로 가져다줬다.
그냥 조용히 먹고 가려던 우리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도 드세요! 엄마가 만든 크림베리 잼이에요! 칠면조하고 먹으면 맛있어요!”
“네. 다이애나도 좀 드세요.”
“저, 저는 샐러드면 충분한걸요? 헤헤.”
다이애나는 음식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나와 대화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참. 어제 [리턴 패션 디자이너] 올라온 거 봤어요! 루시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벤자민이 참 불쌍했어요...... 벤자민의 행복은 언제쯤 찾아오나요?”
“음. 곧 올 겁니다. 이미 적어놨고요.”
“그래도 벤자민의 어머님이 살아서 다행이에요. 소설을 보는데 영화처럼 마음이 두근거릴 줄은 몰랐어요.”
“하하..... 다행이네요.”
“참! 작곡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따로 배우신 적 있으신가요?”
“그냥 여러 가수들의 가사를 참고해서 해본 것뿐이에요.”
친화력이 좋은 것인지 다이애나는 계속 나한테 말을 걸었다.
다이애나가 계속 음식을 갖다 줬지만, 막상 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 물어봐!’
에드워드 선생님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기에,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크흠! 자네 술 잘하나?”
“그냥 적당히 합니다. 작가를 목표로 한 이후에는 술을 자주 마신 적이 없어서요.”
“그럼 오늘 한잔하지.”
“아. 네.”
에드워드 선생님이 술을 좋아하신다는 건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라 와인을 즐기실 줄 알았는데, 아까 들고 온 술병들은 전부 위스키같이 도수가 높은 것들뿐이다.
-뽕!
“이거 다 마셔야 오늘 호텔로 돌아갈 수 있을걸세.”
“......예?”
“왜? 후달리나?”
아무래도 선생님과 나의 취향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위스키를 보고 좋아하는 나와 달리 다이애나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할아버지!”
“조용히 있거라 다이애나.”
“그래도 위스키라니요! 작가님이 술을 얼마나 못하시는데요!”
‘내가 술을 못한다고?’
아무래도 동양인들이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도 술을 상당히 많이 즐겼고, 무엇보다 마을에서 가장 잘 마신다는 녀석과 배틀을 했을 때도 이긴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술에 강하다고 하셨지?’
나는 선생님이 내미시는 술잔을 족족 받아 마셨다.
***
비교적 멀쩡한 얼굴로 식탁에서 나와 선생님 집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나와 달리,
“아버지. 정신 좀 차리세요. 아버지?”
“끄윽......”
술에 쩔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 선생님을 가족들이 방으로 모시고 있었다.
“선생님 술 잘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거짓말이었나 보네요.”
“......위스키를 4병이나 마시고 멀쩡한 네가 이상한 거야.”
“에이. 저도 멀쩡하진 않아요.”
나도 술에 취하긴 하지만 취한 척을 안 할 뿐이다.
지금도 약간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업되고 몸이 나른했다.
“서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
“에이. 아니에요. 그보다 선생님은 술도 잘 못하시는데 술을 저렇게 드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술 못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네. 왜긴 왜겠어? 너한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하신 거겠지.”
“저한테요?”
조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님은 손녀딸을 정말 아끼시거든. 그런데 손녀딸이 너만 보고 있으니 기분이 어떠시겠어?”
“빈정 상하시겠죠.”
“예전부터 그러셨어. 화가 나거나, 질투의 대상이 있으면 술을 마시게 해서 취한 상태를 다이애나한테 보여주었거든.”
“아......”
보통 사람이라면 위스키 반병도 마시지 못하고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한 뒤 추태를 보이게 해서 다이애나의 마음을 떨어트리셨다는 건가?
“조금 잔인하시네요.”
“그만큼 다이애나를 아끼셔. 참고로 나도 당한 적이 있는걸?”
“조엘도요?”
“응. 부끄러운 이야기지. 아무튼 과보호가 심하시니까 주의하라고.”
“안 그래도 아까부터 그러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취한 선생님은 잠에 드셨고, 나머지 잭슨가가 전부 거실로 모였다.
“이것 참..... 아버지가 가끔 이렇게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으세요. 이유는 조엘한테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요.”
“죄송해요.... 저희 할아버지가...”
“하하하하. 괜찮습니다. 그보다 선생님 건강이 걱정이네요. 저 나이에 술을 저렇게 많이 드시면 몸에 안 좋으실 텐데.....”
안토니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하아....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말렸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건강보다 삶의 행복을 찾겠다는 둥 그런 식으로 회피하셔서 저희도 난감합니다.”
선생님이 들어가셨다 보니 우리는 두런두런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의 주제는 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아. 그렇게 해서 작가가 되신 거군요?”
“네. 원래는 작가를 할 생각까진 없었거든요. 제 실력에 자신도 없었고.”
“처음이 힘든 법이죠. 하지만 보통 글을 쓰다 보면 한 번쯤은 자신의 실력을 알고 싶다고 느끼지 않나요?”
“그러진 않았어요. 그냥 취미는 취미로 끝내자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엄청 어렸을 적에는 그런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투고 자체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요. 그냥 주변 애들하고 릴레이 소설을 한 느낌이었죠.”
안토니가 분위기를 맞춰주니 분위기가 한층 편해졌다.
“슬슬 일어나 봐야겠네요.”
“벌써 가시는 겁니까?”
“내일 SC라스틱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죠.”
“버, 벌써 가시게요?”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이애나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애초에 너무 오래 있었어요.”
“원래 예정대로라면 어제 돌아가는 거였던가?”
“네. 내기 때문에 조금 더 늘려서 지금까지 있긴 했는데..... 슬슬 돌아가 봐야죠. 호텔 체크인도 내일까지니까요.”
조엘의 말대로 원래라면 어제 SC라스틱으로 가야 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하루 미룬 상태였다.
다이애나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작가님이 오신다고 해서 친구들한테 자랑해놨거든요오....”
“자랑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못 되는걸요.”
“그래도.....”
다이애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언가 말할 게 있어 보였지만 계속 주저했다.
“호, 혹시 작곡에 흥미 있으세요?”
‘흥미라......’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제 하루 종일 음악에 신경 쓰고 두 번 다시 작사는 안 하겠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작곡이라는 세계가 재밌기는 했다.
“재미는 있었어요. 다만, 저는 재능이 없어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번에 쓴 것도 결국 명언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잖아요?”
“재, 재능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이번 가사도 정말 괜찮았어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네요.”
고맙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 도전해보는 걸 좋게 봐주었는데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가사 쓰는 법을 알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할아버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할아버지를 설득할게요!”
“하하. 말이라도 정말 고맙네요.”
“그, 그게 아니라면 저기.....”
다이애나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며 슬쩍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 할아버지가 부담스러우시면 저, 저한테 연락 주실래요? 저도 할아버지한테 많이 배워서..... 음악을 전공으로 하고 있거든요.”
조엘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이애나 작곡 잘해. 선생님이 인정할 정도로.”
“진짜요?”
“응. 음악가 집안이다 보니까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쉽게 접했거든. 여러 악기도 다룰 줄 알고.”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재능은 확실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작곡을 가르쳐준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네. 잘 부탁드려요.”
내가 번호를 적어주자 다이애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
다음 날이 밝자 어제 마셨던 술 때문인지 약간의 취기가 남아있었다.
‘취기..... 오랜만이네.’
다행히 KOREA SPA다 보니 콩나물국밥도 판매하고 있었고, 나는 시원하게 국밥 한 그릇을 때린 다음 호텔에서 짐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서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작가님! 여기에요!”
루시아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루시아 앞으로 걸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물론이죠! 아. 짐은 그게 끝인가요?”
“네.”
나는 루시아가 끌고 온 차에 짐을 싣고 탑승했다.
“혹시 아침 드시고 나오셨나요? 여기 근처에 맛있는 한식 식당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음......”
“회사에서 법인 카드 받아왔으니 마음껏 드셔도 괜찮아요!”
호텔에서 콩나물국밥을 먹고 나와서 난 안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루시아는 아침을 안 먹고 나온 게 분명하리라.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겠지.
“안 먹었어요.”
“와아! 다행이네요! 저도 안 먹었거든요! 이 근처에 Sundubu 파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로 갈까요?”
아침부터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들이켰기에 순두부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루시아는 무미건조한 내 반응을 보더니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싫으시면 Korea corn dog는 어떠세요? 요즘 인기라는데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던데요?.”
“좋네요.”
한국식 핫도그라면 군대에서 외박 나왔을 때 많이 먹었었다.
오랜만에 먹을 생각에 반갑기도 했고 밥을 먹은 지금 후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얼른 가요!”
루시아는 어딘가 신난 듯한 목소리로 운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