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일러스트
리암의 몸에는 문신이 굉장히 많았다.
자세히 보면 그 문신들은 제각기 특이한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나 지렁이 같은 선들, 사람의 이름 등 보통 문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님들의 사인과 얼굴입니다.”
“아......”
“사인 받은 부위에 그대로 하기도 하고 종이에 받은 경우는 필체를 따서 새기기도 합니다.”
“그럼 이 사람 얼굴들은...?”
“작가님들을 향한 제 애정의 표시랄까요. 하하! 원래 작가님이 사인해 주신 곳에는 따로 주인이 있었지만..... 작가님을 위해 지웠습니다.”
“예?”
“하하하하! 요즘 문신은 레이저로 금방 지울 수 있더군요!”
문신을 지우려면 몇 달이나 걸린다고 들었다.
나를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하지도 못했을 텐데 문신까지 지우는 덕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무슨 문신이 있었기에......”
“제가 키우던 강아지 그림입니다. 별이 되었지만요.”
“아......”
“하하! 괜찮습니다! 슈가한테 예전에 양해를 구했습니다. 너만큼 소중한 작가님이 오면 이 자리 좀 빌리겠다고요. 슈가는 다른 곳에 새길 예정입니다. 아, 그보다 자리에 앉으시죠. 오늘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서둘러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나는 그의 적극적인 공세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회의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
리암은 지금까지 자신이 의뢰 맡았던 일러스트를 나한테 보여주었다.
동양화처럼 생긴 일러스트부터 시작해서 서양화, 애니나 만화 같은 일러스트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하더니, 그 실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디테일이라고 해야 하나?’
일러스트를 보는 법은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소설의 삽화나 표지를 봤던 나로선 미묘한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의 높낮이, 캐릭터의 시선과 방향, 캐릭터의 비율, 주변의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수준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어느 형식으로 그리길 원하십니까?”
“음......”
리암이 일러스트를 보여준 이유는 어떤 느낌으로 도감이 나갈 건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다양한 일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리암이 보여준 일러스트에는 게임 원화도 있었다.
‘보통 이런 게 가장 눈에 띄기는 하지..... 채색도 디테일하고, 그림책으로 만들면 좋기도 하고.’
다만, 중세시대 배경인 [드래곤 마스터]의 도감에서 이런 채색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캐릭터들마다 이런 식으로 일러가 나오면 예쁘기는 하겠다.’
하지만 게임 원화 느낌의 일러는 너무 현실적이라 ‘캐릭터’스러운 느낌은 없으리라.
“동양화에 색감이 다양하게 있는 식으로..... 그려주셨으면 해요.”
“중세 이야기라고 들었으니.... 음. 확실히 도감에 어울리는 그림이기는 하겠군요.”
리암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자신이 그린 일러스트 중에서 동양화 일러스트 하나를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으로 흑과 백이 주를 이루지만, 주황색이 문득문득 들어가 현실감을 더욱 높인 일러스트였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까?”
“네. 거기에 채색을 더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쁘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아까부터 이 그림을 유심히 보셔서, 이걸로 하실 줄 알았습니다.”
리암은 내가 유심히 보고 있던 게임 원화를 가리켰다.
“예쁘기는 한데..... 제 소설하고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아서요.”
“음....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이런 건 게임이나 라이트노벨에 어울리는 일러스트지요. 미국 판타지 소설 배경에도 어울리지 않는 편이고요.”
“네. 개인적으로 예쁘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작품엔 방금 선택한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그럼 말씀해주신 대로 간단하게 그려보겠습니다.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
고작 20종류의 일러스트만으로 책이 나갈 수는 없었다.
그림 한 페이지, 설명 한 페이지.
그렇게 해도 종이는 30장을 넘지 못할 텐데 어떻게 도감으로 출판할 수 있겠는가.
스티븐은 그 해답을 굉장히 쉽게 말했다.
“공책처럼 나갈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양장본 공책이죠.”
“양장본 공책이라.....”
“종이도 약간 누리끼리하게 해서 중세시대의 감성을 제대로 살려볼까 합니다. 물론 그 공책에 글을 쓰는 사람은 없겠지만요.”
거기에 드래곤의 그림도 본체 하나만 그리는 게 아닌, 특징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발톱, 꼬리, 날개 같은 세부적인 부분들도 확대하여 전부 그린다고 한다.
“우선 전 점심을 사 오겠습니다. 작가님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십니까?”
“음..... 그냥 평범하게 햄버거로 부탁드립니다. 패티는 두 장 넣어주세요.”
“리암 작가님은요?”
“저도 작가님과 똑같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할 일이 많다 보니 음식은 회의실에서 상의하며 먹기로 했다.
스티븐이 회의실에서 나가고 본격적으로 일러스트 작업을 시작했다.
태블릿을 꺼낸 리암은 내가 말한 설명을 그대로 글로 적기 시작했다.
“드래곤들마다 속성이 있습니다. 불, 물, 바람, 흙이 기본 속성이고, 어둠, 빛, 식물, 전기 등은 희소속성입니다. 그 외에도 얼음, 염산, 용암 같은 걸 진화속성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럼 드래곤을 그릴 때 그 위에 속성에 관한 마크 같은 걸 그리는 게 좋겠군요. 이 부분에 대해선 생각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어차피 속성을 표시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 부분은 리암의 뜻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럼 주역 드래곤부터 그리는 게 좋겠습니다.....만, 일단 어떤 내용인지부터 알고 싶습니다.”
[드래곤 마스터]가 아직 시중에 풀리지 않았기에 리암은 무슨 분위기를 가진 소설인지 모를 것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들어야 드래곤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드래곤 마스터]에 대한 설명을 했다.
“드래곤을 길들인 인간이 성공하는 시대, 드래곤을 길들여야 들어갈 수 있는 아카데미, 아카데미에서부터 드래곤을 길들이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이 말이시죠?”
“네. 아카데미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성장스토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음.....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벌써부터 보고 싶네요. 크으..... 일주일 뒤부터 서점에 배포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주일이 일 년 같을 겁니다.”
“하하......”
도통 이 거구의 백인 문신남과 어울리지 않는 텐션이 영 적응되질 않았다.
나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주역 드래곤의 생김새부터 부탁드립니다!”
“네. 우선 비늘의 색은 검은색입니다만, 옆으로 푸른색으로 두 줄기의 비늘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선 크기는 어떻게 됩니까?”
“음..... 드래곤들마다 크기가 다르지만..... 우선 성체의 크기는 버팔로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으면 합니다.”
“버팔로라..... 버팔로 크기가 어떻게 되더라?”
리암은 곧장 핸드폰으로 들어가 크기를 검색했다.
“3.8m군요. 그럼 그림은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요?”
“파충류는 알-베이비-아성체-준성체-성체-완성체로 구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드래곤들도 그렇게 표현하는 게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알의 생김새도 다르다고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파충류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하하. 동물을 좋아해서 파충류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하면..... 리암 씨가 그릴 게 너무 많아지지 않나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작가님은 글쓰기 힘들다고 내용을 줄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그리는 거 확실히 그려야 제가 그린 그림도 빛을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힘든 건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괜히 유명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다.
‘유명한 덴 이유가 있는 법이구나..... 전문가인가.’
리암의 말에선 마치 진중한 느낌이 흘렀다
“아. 주인공이 길들인 드래곤은 알하고 1부에서 나온 상태까지만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용 스포가 될 수 있으니까요.”
“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작중에 나오지 않았지만 하스의 알은 타조 알 정도 되는 크기이며, 알의 색은 검은색 바탕에 구름 같은 푸른색이......”
리암은 본격적으로 콘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
일을 계속 진행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얼추..... 끝났군요.”
리암과 나는 피곤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고작 20종류의 드래곤만 그리면 됐지만, 수정을 몇 차례나 걸치다 보니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있었다.
거기에 드래곤의 습성, 습관, 사는 지형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물건 등을 추가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
“일러스트도 일러스트지만..... 캐릭터의 외양을 설명해주실 때마다 [드래곤 마스터]를 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습니다. 이거 못 참겠군요..... 으하하하.”
“일주일만 기다려주세요. [블랙 & 월드]와 다르게 이번에는 많이 인쇄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거 다행이군요. 저는 아직도 [블랙 & 월드]를 구매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침울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신가요?”
“하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 품절 대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거 원..... 빌 에이든 미디어가 일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구하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으니 무척 답답하더군요.”
“공장을 한 업체하고만 진행했다고 하니까요.”
다른 업체하고도 계약을 해볼까 생각은 했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품절 대란이라는 이슈가 [블랙 & 월드]의 소장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는 게 로건의 의견이었다.
“그럼 이거라도 가지시겠어요?”
난 캐리어에 있던 [블랙 & 월드] 양장본을 꺼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양장본의 자태에 리암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저, 저, 저, 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리암은 한참 동안 경직돼 있었다.
“.....정말 이 소중한 걸 저한테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리암한테 주고도 아직 두 권이나 남아있었다.
내 소장용은 한 권이면 충분했기에 리암한테 선물해도 상관없었다.
“......정말 주셔도 괜찮으신 건지.....”
“물론이죠.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주시는데요.”
그것도 있지만 아까 리암이 말한 말이 신경 쓰였다.
글쓰기 귀찮다고 내용을 줄일 거냐는 리암의 프로페셔널한 말에 나는 마치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작가님......”
리암이 포장된 양장본을 소중히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똑똑!
-루시아인데요. 들어가도 되나요?
“아. 네. 마침 잘 오셨어요.”
커피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들어오는 루시아를 보며 나는 그녀에게도 양장본을 내밀었다.
“.....에?”
양장본을 본 루시아의 미소 띤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선물이에요.”
-딸꾹!
루시아의 딸꾹질이 회의실 정적을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