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발매
같은 시각 다이애나는 제임스가 썼던 가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명언.....과 노래의 차이.... 그런 게 굳이 필요한가?’
시에 음을 넣으면 노래가 되고, 명언과 속담을 재치있게 말하면 그게 노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가님은 너무 가사라는 거에 치중하신 것 같아.’
그 때문인지 미숙한 부분이 많았지만, 애절한 음을 넣고 가사를 흥얼거려보면 듣는 이로 하여금 서글픈 노래가 완성된다.
“근데 작가님은 이 가사를 누가 불러줬으면 하는 생각에 썼을까?”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가사를 적었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묘했다.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쓰신 것 같은데......’
[블랙 & 월드]를 보면 슬픈 장면도 많지만, 재치 있고 유쾌한 장면들도 넘쳐난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을 고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으로 보낸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조엘한테 부탁해 제임스가 처음으로 보냈던 메일을 확인한 다이애나는 분명 제임스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참고하여 만들었음을 눈치챘다.
그 목소리는 분명 부드러운 선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SNS에 올리신 SHG 그룹 여자 보컬의 목소리도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으음 모르겠어.”
누가 되었든 간에 이 가사로 노래를 부를 그 사람이 굉장히 부러웠다.
“나는 노래를 잘 못 부른단 말이지.....”
작가님한테 완성된 노래를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악기를 배우고 작사, 작곡에만 재능을 보였던 그녀였다.
물론 노력해서 어느 정도 부르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작가님한테 보낼 거라면 최고의 목소리로 녹음해두고 싶었다.
“.....전화 걸어볼까?”
다이애나는 핸드폰에 적힌 친구의 이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뚜우.....
통화연결음이 길어지고 다이애나의 마음이 초조해지려는 찰나,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다이애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로지 지금 바빠?”
-응. 지금은 괜찮아. 어쩐 일이야?
“내가 전에 우리 집에 제임스 작가님이 오셨다고 했잖아?”
-응. 네가 하도 오두방정을 떨어서 모를 리가 없지. 그나저나 SNS 봤는데 양장본 주셨다며? 축하해.
“고마워. 받은 건 엄마지만..... 아, 아무튼 간에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부탁?
“응. 제임스 작가님이 써주신 가사를 받았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로지 목소리가 아니면 안 맞을 것 같아서.”
-헤에? 가사 받았다고 해서 네가 부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 아니 내가 부르면..... 그건 작가님이 써주신 가사를 모욕하는 행위가 될 것 같아서 그래. 네가 성악을 하니까 그 목소리라면 가사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데..... 가능할까?”
-으음....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가 내일은 볼일이 있어서 안 되고..... 그럼 내일모레 학교 녹음실을 빌려보지 뭐.
“진짜? 진짜 해주는 거야?”
-그래. 대신에 그날 하루 커피는 네가 사는 거다?
“물론이지!”
-그럼 그때 보자.
“그래! 고마워!”
다이애나는 로지와의 전화를 마친 뒤, 침대에 벌러덩 대자로 뻗었다.
“작가님이 좋아하실까?”
침대 옆 협탁에 컬렉션처럼 놓여있는 양장본을 바라본 다이애나는 헤헤 웃음 지었다.
***
그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에 한 편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집필하며 흐르는 시간을 즐겼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피며 못 봤던 갑오징어 게임까지 시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끄응.....”
아침부터 우리 집에 와서 제목을 고민하고 있는 캐서린의 모습에 난 한숨부터 나왔다.
“아직도 고민 중이냐?”
“......웅.”
“웅은 무슨. 너희 집 가서 고민하면 되잖아? 왜 하필 우리 집에서 고민하고 있는 건데?”
“그야.....”
캐서린은 힐끔힐끔 나를 바라봤다.
“뭘 봐?”
“위대하신 드래곤 원 동지의 기운을 받는다면 뭐라도 생각날 줄 알고.”
“......내가 토템이냐?”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같이 와서 거실에서 끙끙거리고 있으니 이제는 아련할 지경이다.
“에휴. 지금까지 적었던 제목들 좀 보여줘 봐.”
“여기.”
노트북에는 지금까지 적었던 제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5일 동안 내내 제목만 생각했는지 그 수가 굉장히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선택 장애가 올 것 같았다.
“근데 왜 다 제목에 꽃이 들어가냐?”
장미, 백합, 벚꽃 등 내가 알고 있는 꽃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꽃들도 있었다.
“그야 나 닮아서 예쁘니까?”
“......”
“농담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마.”
“후우.... 왜 하필 꽃인데?”
캐서린은 볼을 긁적이며 약간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게..... 일단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 맞게 길들여지는 내용이잖아? 동물을 길들인다는 말보다는 꽃을 ‘키운다’는 개념이 더 좋을 것 같아서......”
“키운다라..... 그래서 사람을 꽃으로 비유한 제목인 거야?”
“응..... 근데 계속 꽃으로 비유하자니 제목에 한계가 오네.”
“솔직히 지금 제목도 그리 나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의 이목을 끌려면 조금 더 그럴듯한 게 필요하지. 차라리 이런 건 어때?”
“뭐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글을 읽어보니까 막상 여주가 남주를 만나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잖아? 차라리 ‘길들여진다’에서 벗어나서 ‘스토커’ 같은 느낌으로 가면 어때?”
“스....토커?”
“쉽게 말해 얀데레 같은?”
“Yandere? 그게 뭔데?”
나는 알아듣기 쉽게 데레라는 뜻을 총정리해주었다.
그러자 캐서린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Yandere라는 게 남주 집에 카메라도 설치하고, 오직 나 하나만 바라보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고. 쉽게 말해 여자 스토커라는 거네?”
“그렇지.”
“그리고 얀데레의 특징은 항상 미인이어야 하는 거고?”
“그것까지는 아니.... 그래, 그냥 그렇게 생각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주가 그런 성격 같긴 하네.”
“그러니까 뭐. 꽃보다는 찰싹 달라붙는 것들 있잖아. 예를 들면 껌이나 그림자? 그런 거?”
“.......음.”
“어디 보자...... 이런 건 어때? [너와 같은 그림자를 밟고 싶어]”
“어?”
캐서린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제목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거? 괜찮은데?”
“그런가? 뭐. 쓰고 싶으면 써.”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좋아! 그걸로 할래!”
“그래, 마음껏 써라.”
캐서린은 홀가분한 웃음을 지으며 노트북을 끌어안았다.
“그럼 나 이만 갈게! 팡이야! 내일 언니가 맛있는 거 만들어올게!”
-냐아앙!
그 말에 다이어트하고 있던 팡이는 기쁜 듯이 울었다.
‘팡이 수컷인데.....’
언니가 뭐냐 언니가.
***
120만 부.
SC라스틱이 [블랙 & 월드] 시장 조사를 했을 때, 그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한 숫자였다.
하지만 SC라스틱이 하나 착각한 게 있었으니.
현재까지 [블랙 & 월드]가 총 150만 부 정도 팔렸지만, 아직까지도 품절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드래곤 원의 팬덤은 결국 적은 수가 아니었다.
한 번만 읽고 ‘음 괜찮네. 이 작가’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하루에도 몇백 권씩 출판이 되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인 미국 시장에서는 ‘이 작가 기억해놔야지. 차기작 나오면 꼭 볼 거야’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드래곤 원이 그런 경우였는데, 거기에는 드래곤 원 특유의 필력이 한몫했다.
[사막의 전갈]이든 [블랙 & 월드],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읽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깊은 여운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마치 심연으로 끌고 가는 그의 독보적인 필력은 사람들을 글의 노예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이는 곧 거대한 팬덤이 되었다.
팬카페에 가입하는 걸 주저하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나인 드래곤]의 회원 수가 결코 팬덤의 숫자를 전부 대변할 순 없었다.
[뉴욕의 한 서점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블랙 & 월드]가 판매될 때도 새벽부터 줄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드래곤 원’의 소설 [드래곤 마스터]를 구매하기 위해 이렇게 줄을 서고 있는 겁니다. 드래곤 원. 이 유치한 필명을 가진 작가를 아는 이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올리비아 콜린스 또한 SNS로 드래곤 원의 팬심을 보여주었죠.]
뉴스 화면이 바뀌며 그간 유명인사들이 [블랙 & 월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보여주었다.
[팬카페인 [나인 드래곤]은 가입조차도 굉장히 어려울뿐더러, 최우수등급 회원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일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트린 평론가님 드래곤 원 작가의 소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자 뉴스 앵커가 옆에 있던 흑인 남성한테 질문했다.
[하하하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굉장히 재밌습니다. 재밌으니 서점으로 몰려가는 것이겠죠.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소설 속에 들어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소설 속에 들어간 것 같다고요?]
[예. 그만큼 여운이 강한 소설입니다. 드래곤 원 작가의 글을 본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죠. ‘악마가 여운으로 이루어진 심연으로 너를 데려간다’라고 말이죠.]
[오..... 멋진 말이네요. 그 정도인가요?]
[예. 참고로 저는 드래곤 원 작가의 웹소설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볼 땐 가슴에 성호를 그리고 봤습니다. ‘하느님 부디 이 악마가 제 감정을 가져가지 못하게 해주소서’라고 말이죠. 하하하하!]
[하하! 너무 과장된 비유 아닌가요?]
[놉! 아가사 앵커도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딱 5화까지만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과 제가 동화되는 느낌을요.]
[오늘 어떻게든 시간을 비워서 봐야겠네요. 그나저나 지금 이러한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실 전무후무한 일 아닌가요?]
[당연한 겁니다. 빌 에이든 미디어는 첫날에 20만 부 발매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전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몰려있는 주에서는 동시 발매를 시작했죠. 하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완판입니다. 그리고 그 품절 대란이 아직까지도 진행 중입니다.]
[분명 3주 정도 되었죠? 아직까지도 그런가요?]
[예. 이건 빌 에이든 미디어 측이 예상을 못 한 거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무튼 오늘까지 [블랙 & 월드]는 총 150만 부나 팔렸습니다. 120만 부의 [드래곤 마스터]? 제가 장담한 건데 한 달 동안이나.....]
-삑!
SC라스틱의 주인 헤리 로빈슨이 TV를 종료하고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스티븐? 회사에 도착하면 바로 대표실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