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양장본 발매
내가 내건 조건 세 가지는 영화사에서 기본만 지킨다면 충분한 재미를 보장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과도한 PPL은 삼가해 주세요.”
[사막의 제국]은 PPL 광고를 나와 협의 하에 진행하기로 했다.
계약서에 적을 당시 메디슨 누나한테 가장 경고한 것 중 하나였다.
“마티니만 마시던 남자가 2부에서는 맥주만 마시는 걸 보고 충격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과도한 PPL을 넣기보다는, 영화에 맞는 적절한 광고를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음......”
PPL의 힘은 크다.
히트친 영화에 나오는 PPL은 영화보다도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PPL이 과하면 관객들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법.
스토리에 맞지 않은 뜬금없는 PPL 때문에 망한 영화도 많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투자처를 잘 골라주세요. 입김이 강한 곳이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투자처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두 번째 부탁입니다.”
PPL과 작품을 망치는 건 투자자들이다.
시나리오를 무리하게 수정한다든가, 심지어 캐스팅까지 관여하려고 한다면 작품은 한순간에 고유의 빛을 잃어버린다.
“이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아 대표님이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이시니까요. 세 번째 요구 사항은 무엇입니까?”
“논란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까 조니가 말했다시피 화이트워싱, 블랙워싱, 성차별, 젠더 갈등, 동성 등. 내용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강제로 넣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과도한 PPL을 제외하면 전부 당연한 것들이군요.”
“PPL도 재치 있거나 혹은 영화 분위기에 좋으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 영화의 내용까지 바꿔야 할 PPL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 부분은 당연히 주의할 생각입니다. PPL은 작가님과 협의 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 베이컨 조각을 입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어차피 계약은 출판사와 함께 진행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전자메일로 서명한 다음 인쇄하면 되겠죠.”
“그럼......”
“[블랙 & 월드]. 미션 컴퍼니와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니는 그제야 활짝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드래곤 마스터]는...”
“그건 천천히 합시다. 발매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계약은 아직 시기상조이지 않나 싶네요.”
“하하하하! 성급한 게 아니라, 놓칠까 봐 그렇습니다! 애니와 실사화는 저희의 전문 분야이니 부디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음..... 일단 이 경우는 조금 지켜본 다음에 계약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드래곤 마스터] 또한 각별히 원한다는 사실만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조니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조니는 곧장 돌아갔고, 메디슨 누나는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돌아간다고 했다.
사실상 이틀 동안의 휴가를 받은 메디슨 누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오늘 저녁에 BBQ 먹자! BBQ! 나 고기 먹고 싶어!”
“어제 먹었는데?”
“으, 응?”
“[드래곤 마스터] 발매 기념으로 사람들 모아서 BBQ 먹었어.”
“나 빼고?”
“누나가 언제 오는지 알고? BBQ 먹고 싶으면 그냥 사 먹어.”
“......칫. 매정해.”
아무튼 우리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맞다. 너 고양이 키우기 시작했다며? 나 고양이 보고 갈래.”
“마음대로 해.”
동물을 좋아하는 메디슨은 자기 집이 아닌 우리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식당에 가기 전 이미 한 번 들러서 밥을 먹고 오겠다고 말해놨기에, 부모님은 이미 밥을 먹고 주방을 깨끗이 정리해 놓으셨다.
“안녕하세요 삼촌.”
“메디슨? 네가 웬일이냐?”
“제임스 계약 건 때문에 들렀어요. 어차피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그래? 그럼 푹 쉬다 가거라.”
“네! 그보다 팡이 어딨나요? 팡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소파에서 자고 있다. 지금 밥 적게 먹여서 심기가 불편한 상태야. 조심해.”
“넵!”
팡이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메디슨 누나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거실로 향하니 팡이가 빵빵한 배를 드러낸 채 심술이 난 얼굴로 인간처럼 앉아 있었다.
‘아직 어린 고양이인데 저 자세가 되는구나.’
신기해하는 나와 다르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메디슨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악! 너무 귀여워!”
-냐, 냥?
갑작스러운 비명에 팡이는 포동포동한 뱃살을 출렁이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고양이들은 처음 본 사람을 보면 도망간다고 했는데, 팡이는 안 그러네?”
“친화력이 좋아서 그렇지 뭐.”
-그릉 그릉 그릉~~~
정확히는 처음 본 인간이 밥을 주는 줄 알고 다가간 것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메디슨 누나는 행복하다는 얼굴로 무릎 위에서 꾹꾹이를 선사해주는 팡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그나저나 누나. 그 제안이 그렇게 좋은 거야?”
“응. 기성 작가들 사이에서 비교해 봤을 때도 상당한 수준이야. 무엇보다 미션 컴퍼니의 태도가 놀랍지 않아?”
“맞아.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어.”
변호사 출신이라 회유를 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걸 다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조니의 반응은 확실히 놀라웠다.
“조니가 했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미션 컴퍼니가 최근에 제작한 인기 있는 작품은 과거의 작품을 실사화한 것들이 많아, 애니메이션은 2부 혹은 과거의 작품을 3D 애니로 만든 게 대부분이야. 거기에 미션 컴퍼니는 자사 작품을 사랑해서 웬만하면 다른 작가들이 만든 작품의 저작권을 사려고 하지 않아. 미션 컴퍼니에 소속돼 있는 작가들 수준이 높기도 하니까 굳이 살 필요도 없지.”
“흐음......”
“이건 기회가 될 수 있어. 다만, 실패한다면 그만큼의 리스크가 있겠지만.”
금전적인 리스크가 아니라 내 명성에 리스크가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큰 타격을 받는 건 미션 컴퍼니일 것이다.
“그런데 [드래곤 마스터]는 왜 그 자리에서 계약하지 않은 거야?”
“너무 급하게 할 필요 없잖아? [블랙 & 월드]하고 [드래곤 마스터]가 동시 개봉하면 둘 중 하나는 묻힐 것 같은 느낌도 나고.”
“동시에 개봉하진 않겠지! 그렇다고 해도 두 개 다 흥행할 수도 있잖아?”
“그것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미션 컴퍼니에서 제작되는 거라면 느낌이 비슷할 텐데 두 소설이 비교되는 게 싫어.”
두 소설 다 내 자식 같은 작품이다.
이건 좋고, 저건 별로고라는 식의 비교는 받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래곤 마스터]는 발매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아. 그나저나 오늘 양장본 발매 시작한다며?”
“응. 오늘 당첨자들 발표한다고 하더라고.”
“당첨자들이 누군지는 알아?”
“아니 몰라. 가르쳐달라고 하면 알려주겠다고는 하는데,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묻지도 않았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꾹꾹이를 했음에도 밥을 주지 않아 삐져있는 팡이를 쓰다듬었다.
-그릉 그릉 그릉~!
그래도 쓰다듬어주니 언제 삐졌냐는 듯 그릉거리기 시작했다.
‘개냥이로 변모하고 있네.’
이래서 사람들이 고양이를 키우나 보다.
“집에 안 가?”
“가야지. 넌 이제 뭐 하게?”
“글쎄..... 일단 SNS 올려야지?”
당첨자들을 축하해줘야지.
***
고작 990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988권이다.
직권남용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로건과 에밀라는 자신들의 직권을 이용해 두 권을 몰래 빼냈다.
그렇다 해도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제임스밖에 없었으니, 제임스가 조용히 하면 묻혀버릴 사건이었다.
빌 에이든 미디어는 당첨자를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배달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본래는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당첨자들한테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당첨자 발표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조금 이르게 배달을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당첨됐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는데 양장본을 받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첨자들은 그 기분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 중 아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꺄아아아아아악!”
처음 기숙사 앞으로 무슨 택배가 와있길래 혹시 잘못 온 택배인가 확인해봤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족들한테 택배의 정체에 대해 연락해봤지만 보낸 게 없다고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빌 에이든 미디어 사이트에 들어가 당첨자를 확인해본 것이다.
[당첨되신 분들은 오늘 혹은 내일 중으로 양장본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첨자들 중에 자신의 아이디가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아, 아리야! 무슨 일이야! 거미 들어왔어?”
그런 아리야의 방으로 황급히 누군가 달려 들어왔다.
동양인과 백인의 혼혈 같은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택배 상자를 꽈악 끌어안고 있는 아리야를 보며 다급하게 달려온 자신이 멍청했음을 인지했다.
“후우..... 또 뭔데?”
“흑..... 제시카......”
“지금 얼굴 이상하니까 좀 진정하고 말해.”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그제야 진정됐는지 아리야는 눈물을 그치고 택배 상자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데?”
“나..... 드디어 꿈을 이뤘어.”
“그랜드슬램 달성했어?”
“아니! 고작 그런 게 아니야!”
“.....선수들의 꿈을 ‘고작’이라고 표현하냐.”
제시카는 한숨을 쉬며 아리야가 경건하게 내려놓은 택배 상자를 바라봤다.
“또 드래곤 원이냐?”
빌 에이든 미디어가 드래곤 원의 출판사라는 사실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기에, 드래곤 원에 관련된 일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드래곤 원을 들을 때마다 항상 어디선가 들은 느낌이 난단 말이야.”
“너 따위가 드래곤 원 작가님을 어떻게 알겠어?”
“이게 진짜..... 아무튼 뭔데 그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제시카한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리야한테는 평생의 운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장본 받았어!”
“어. 축하해.”
“그게 끝이야?”
“더 필요해?”
“쯧. 드래곤 원 작가님의 위대함도 모르다니, 넌 불쌍한 여자야.”
아리야는 남들이 봐도 조금 과할 정도로 정중하게 택배 상자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택배 상자 안에는 작은 편지 하나와 뽁뽁이로 포장되어 있는 양장본이 있었다.
“드래곤 원..... 드래곤 원..... 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녀석이 생각나는 거지?”
이상할 정도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특정한 한 녀석이 떠오른다.
예전에 그 녀석이 자신의 이름에는 드래곤이 들어가니, 드래곤 어쩌구 하면서 뭐라고 했었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흐아아.....! 이게 양장본이구나!”
뽁뽁이로 보호받고 있는 양장본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던 아리야는 잠시 내려놓고, 옆에 있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쪽지에는 제임스가 양장본 당첨자들한테 짧게나마 축하의 메시지를 적어놓았다.
“제임스 작가님.....”
쪽지를 읽고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리야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제시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뭐?”
“응? 뭐가?”
“방금 뭐라고 했어?”
“제임스 작가님이라고 했는데?”
“.....제임스? 제임스라고? 너. 방금 제임스라고 했지?”
“가, 갑자기 왜 그래? 새삼스럽게. 드래곤 원 작가님 본명이 제임스 권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이 멍충아! 그걸 어떻게 누구나 알고 있겠냐! 그보다 제임스 이 녀석 언제 작가 된 건데!”
“으, 응?”
아이존스가 삼녀이자 제임스의 셋째 친척 누나 제시카 아이존스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내가 훈련 때문에 힘들어서 집에 연락을 못 한다고 해도!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