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K-드라마식 전개
침울한 안색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유치장에서 유일하게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장난 전화 때문에 잡혀 온 이 남자의 얼굴에는 붉은색 손자국이 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남자는 실없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설마 지금 상황이 웃긴 거야?’
유치장에 갇혀 있는 벤자민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루시.
‘하하..... 이제 됐어. 됐다고.’
‘뭘 말하는 거야? 뭐가 됐다는 건데?’
‘아니..... 아니야. 그냥 말이 헛나왔어.’
어차피 자신만 아는 미래다.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믿으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비참했던 과거를 희망으로 바꾼 것으로 만족한다.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엄마가 살아있고, 루시도 이란으로 갈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네가 그런 애인 줄 몰랐어...... 이란으로 가는 비행기 일정은 내일로 미뤄졌어. 이제 너하고 만날 일도 없어. 잘 있어 벤자민.’
공항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벤자민한테 단단히 실망한 루시는 발걸음을 돌렸다.
벤자민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미래의 루시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현재의 루시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그녀의 발걸음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루시.’
벤자민의 말을 들었음에도 루시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항상 건강해야 해.’
진심이 담긴 벤자민의 말을 들은 루시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지만,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잘가..... 루시..... 칼리아.....’
***
여기까지 쓴 후 나는 조금 더 생각해 봤다.
“여기까지를 1권으로 할까..... 아니면 내용을 조금 더 적어볼까?”
솔직히 여기서 끝낸다면 내용이 깔끔하게 끝날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뭔가 다음 화가 궁금해지지 않아.”
그냥 이대로 끝내도, 벤자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됐다.
“조금 더 내용을 이을까? 기껏 과거로 왔는데 엄마를 아직 만나보지도 못 했으니까.... 무엇보다 칼리아와 연관되어 있는 일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고 싶기도 하고.”
[리턴 패션 디자이너]는 한류 드라마식 진행을 표방하는데, 마무리가 아쉬우면 그건 한류 드라마가 아니었다.
절단, 막장, 연출.
이 세 가지가 잘 드러나야 한다.
-투두두두둑!
손가락을 가볍게 푼 다음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
유치장에 갇혀 있던 벤자민은 마트의 총기사건을 막았다는 이유로 공항에서 벌인 일을 참작받았고, 루시의 부모님 또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엄마가 오고 신원조회를 하고 나서야 유치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엄마......’
근 10년 만에 엄마를 보자마자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벤자민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꾸욱 참으며 엄마와 함께 경찰서에서 나왔다.
‘엄마......’
-쫘악!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엄마는 내 등을 때렸다.
‘이제 하다 하다 장난 전화까지 해? 내가 너 때문에 미친다 정말!’
‘윽! 윽! 아, 아파! 그만해!’
‘너 때문에 내가 미쳐! 엄마 속 언제까지 썩일 거야!’
‘아악! 아파!’
엄마의 얼굴엔 분노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벤자민의 얼굴은 어딘가 이상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울고 있었다.
항상 들었던 엄마의 잔소리가 끊겼던 미래의 시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벤자민은 잔소리가 지겹도록 듣고 싶었다.
엄마한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해주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냥 사소해도 좋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기에 벤자민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기에 그저 눈물만 흘렸다.
‘너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루시 부모님한텐 왜 그런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 안 울어.’
‘안 울긴..... 그러고 보니 루시한테 차였다고 했지?’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내가 루시한테 차였다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루시한테 차인 후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라고 착각한 듯싶었다.
벤자민은 그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하긴, 세상에 여자가 한 명뿐이니? 자자.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그만 뚝 그쳐. 뭐 먹고 싶어?’
‘그냥..... 그냥 집에 가서 먹자.’
‘엄마 오늘 월급 받았으니까 밖에서 먹어도 괜찮아.’
‘아니야. 그냥 집에 가서 집에 있는 걸로 먹자. 난 괜찮아.’
철이 든 것 같은 벤자민의 말에 엄마는 웬일이냐며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먹고 싶어서 그래. 저 앞에 피자집에 가자.’
항상 월급 받는 날에만 먹었던 피자.
나는 페페로니 피자만 먹었고, 엄마는 플레인 피자에 핫소스만 먹었었다.
단출한 외식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행복이었다.
미래에 있었던 절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시 그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응. 그래 가자.’
벤자민은 엄마와 손을 잡고 걸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마마보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그냥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런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엄마와 함께하고 싶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엄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머. 저것 봐봐. 저 옷 너무 귀엽지 않니?’
‘어? 뭐가?’
엄마가 가리킨 곳에는 아이 옷을 판매하는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원피스가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마네킹에 입혀놓은 옷들.
연령도 다양했는지 아기부터 10세 옷들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칼리아.’
‘응? 누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네킹이 입고 있는 원피스를 보자 칼리아가 생각났다.
칼리아가 생각..... 그래 칼리아가 생각났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왜 그러니? 얼른 가자.’
‘아.... 으, 응.’
길을 걷는 벤자민은 심연으로 물들어가는 머릿속을 계속 뒤져봤다.
기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봤지만 먼지가 가득 낀 것처럼 뿌옇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미래에 뭐가 성공하더라?’
미래에 성공하는 기업, 미래에 인기 있어지는 디자인, 히트하는 작품들.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다 상관없는데..... 어째서 가장 중요한 게 생각나지 않는 거지?
‘칼리아......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
“그래. 이렇게 끝나야 k-드라마식 운영이지.”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마무리인 것 같았다.
1권의 마무리로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간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아.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걸 바꿀 순 없다고...”
이 글을 쓸 때 벤자민이 항상 신한테 끊임없이 질문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신은 벤자민한테 기회를 준 것일까? 아니면 딸의 희생을 대가로 과거로 보내진 것일까?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을 ‘시련을 주는 신의 관점’으로 보며 벤자민한테 시련을 주고자 했다.
“나 좀 변태인가?”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분명 이러한 전개에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냐..... 에휴.”
2권의 앞부분까지는 쓸 수 있지만, 그 이상을 적으려면 역시 에일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부모로서 아이를 잊어간다는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다만, 분만 예정일이 3~4개월 정도 남았는데 그런 말을 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끄응...... 일단 글부터 올리자.”
앞으로 5일 정도 후에 1권의 마지막화가 올라갈 것이다.
한 화씩 예약을 하며 유료화에 대한 생각도 정리했다.
“빌 에이든 미디어하고 계약을 하자.”
지금까지의 인연과 항상 최선을 다해주는 빌 에이든 미디어의 비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웹소설이 처음이라고 하니 불안함 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행보를 봤을 때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에일리는..... 일단 양해라도 구해볼까?”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부모의 심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입되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글을 올리는 칸 밑에 작가의 말이라 적힌 곳이 보였다.
“흠.....”
에일리는 과연 어떤 걸 원하고 있을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이 적히고 있다는 것을 에일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에일리는 이 소설이 독자들한테 어떠한 감정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을까?
궁금하다면 독자들은 과연 자신한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할까?
“쩝. 실명도 밝히지 않고, 지인인 것도 밝히지 않고 그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이라고 적어보자. 응원 댓글이 올라오면 뭐..... 에일리한테 보여주는 것도 고려해봐야지.”
어차피 100% 실화가 아니었다.
에일리의 인터뷰를 ‘참고’만 했을 뿐이니 상관없겠지.
***
[블랙 & 월드] 양장본이 발매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은 각자의 SNS에 자신의 후기를 적었다.
어떤 이는 우는 사진과 함께 ‘990권은 너무 적다. 양심적으로 일만 권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게시글을 올려 좋아요를 받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행복해하는 자신의 얼굴과 양장본을 사진으로 올리며 ‘신에게 감사한다. 이 악마의 유혹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선물을 줘서’라는 글을 올려 싫어요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래곤 원 사인이 뭔데?
드래곤 원 본인이 유치하다고 말한 사인의 형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dragon two
ㄴ응?
ㄴdragon two라고. dragon one이 아니라 dragon two라고.
-...... 지금 댓글들이 dragon one 사인이 dragon two라는데 이거 진짜임?
ㄴ나 양장본 가지고 있다. 사진 올려드림
당첨된 사람들은 양장본에 적혀있는 사진을 하나둘 SNS에 올려 인증하기 시작했다.
-HAHAHAHAHAH!
-진짜네? 왜 이런 사인으로 한 거지?
-[드래곤 투 내꼬야]님 말로는 사인이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는데, 그 뜻은 팬들을 두 번째로 사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더라고.
ㄴ그렇게 들으니 또 그럴싸한 것 같기도 하네.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지만, 그 시작은 친구의 여동생을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팬들은 그냥 그러려니 넘길 뿐이었다.
-뭐. 어떤 격투기 스타는 그냥 줄 하나만 찍 그어주던데, 그것보단 훨씬 좋지.
-어느 야구 선수는 달팽이 그려주더라.
-축구 선수 중에는 그냥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주는 녀석도 있어.
-윗댓글 말 들어보니 작가님은 신사시네.
유치하긴 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뜻을 알게 되자 팬들의 반응은 오히려 뜨거웠다.
사인이라는 행위를 귀찮게 여기는 스타들이 많다 보니 오히려 사인에 뜻을 담는 드래곤 원의 순수함을 좋게 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보다 외전은 어때?
-외전 내용 좀! 알고 싶어!
-외전에 도감 형식으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는데 어떻게 생긴 거야?
-사진 올려 줄게. 다들 기다려.
어느새 사인보다 외전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