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사인회
빌 에이든 미디어와의 웹소설 계약은 전자계약으로 진행됐다.
계약서 확인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던 메디슨 누나한테 부탁했기에 확실했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래도 [리턴 패션 디자이너] 1권을 적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녁이네......’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만 같았다.
비단 그런 느낌이 나만 드는 건 아니었다.
“아...... PTSD 온다.”
전자계약 확인 겸 우리 집에 온 메디슨 누나는 팡이를 쓰다듬으며 일하기 싫다는 얼굴을 하였다.
내일 비행기로 돌아가야 하다 보니, 제대로 쉴 수 있는 건 오늘이 끝이었다.
“넌 이제 뭐 할 거야?”
“쉴 건데?”
“.....너만?”
“언제는 글도 쉬엄쉬엄 써야 한다며? 그걸 제대로 지키고 있는 중인데 왜?”
“......그래 차라리 그게 낫지.”
“누나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난 슬슬 밥 먹으러 갈 건데.”
“밥? 뭐 먹게?”
“그냥 집에 있는 걸로 대충 때울 생각이었는데?”
“쳇. 재미없어.”
오래간만에 집에 와서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럼 자기 집에 가서 먹든가 왜 여기서 먹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띠리리리~!
그렇게 쉬고 있는 사이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벨소리의 주인공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제시카?”
“응? 제시한테 연락 왔어?”
“어. 웬일이지? 오늘 무슨 날인가?”
“글쎄?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제시카? 어쩐 일이야?”
-하이 제임스! 우리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내 친구 좀 바꿔줄게!
-아, 안녕하세요.
“.....어?”
전화를 받은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누구......”
-제, 제시카 친구 아리야라고 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내 반응이 이상하자 메디슨 누나도 무슨 재밌는 일이냐며 은근슬쩍 다가와 통화내용을 엿들었다.
“제임스라고 합니다.”
-패, 팬이에요!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외침에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메디슨도 화들짝 놀랐다.
-시, 실례인 걸 알고 있어요. 그, 그래도 어떻게든 대화를 하고 싶어서 제시한테 부탁했어요.
“아..... 네. 괜찮아요.”
근 몇 년 만에 제시카랑 얘기해보나 했는데 친구가 전화를 받아서 당황스럽긴 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시죠?”
하지만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일단 계속 전화를 받았다.
-초, 초면에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시간이 되신다면 제 동생을 만나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
초면에 저런 말을 들은 것도 당혹스러운데 팬이라면서 자신도 아니고 동생을 만나 달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
아리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랬다.
아리야한테는 4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어렸을 적부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고 나자 갑자기 물건을 밖으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난다며, 창문에 신문지를 덕지덕지 바르거나 총을 구해오는 등
동생의 상태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조현병 말기였다고 하더라고.
“그..... 정신병?”
-응. 맞아.
병원의 진단 결과는 조현병이었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시작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아리야는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방학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서 동생을 케어하는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렸다.
물론 24시간 내내 증상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한 번 발현되면 그 정도가 계속 심해져 남동생 때문에 부모님의 마음이 점차 지쳐갔다.
-그런데 작년에 집에 가니까 조금 뜻밖의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보니, 집에는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온화해지셨고, 누군가 집으로 들어오면 소리를 지르던 남동생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네 책을 읽었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의사가 독서 치료를 권유한 적이 있는데,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책이나, 철학책, 문학책을 구매해서 남동생한테 읽게 했나 봐.
“읽었어?”
-증상이 발현될 때는 물론 읽을 수 없지만, 독서에 빠지기 시작하니까 증상이 나타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게 되니까. 거기서 네 글이 진짜 큰 도움이 됐던 거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막의 전갈]이 독서 치료에 좋다고 느끼지는 않는데?”
오히려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은데 말이다.
-책을 통해서 얻는 치료보다는 한 가지에 꽂혀서 집중을 하게 만드는 게 큰 주안점이라더라? 나도 그 세계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뭐랄까..... 내 책이 치료에 쓰이다니, 조금 신기하네.”
-아무튼 네 책을 읽은 뒤로 팬카페 같은 곳도 가입했다고 했다나 봐. 뭐, 뭐라더라? 최우수등급이라고 했나?
“......응?”
방금 뭐라고?
핸드폰에서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잠시 멍해졌다.
-어 맞네. 남동생은 최우수등급이라고 하네. 아리야는 아직 우수등급 등업도 못했다고 하고.
“남동생이 최우수등급이라고? 진짜?”
-어. 그렇다고 하네? 근데 그게 뭔데?
“있어 그런 게...”
카페에 소수만 존재하는 최우수등급이 지척에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소설을 진짜 사랑해주나 보네.”
최우수등급에 오르는 건 과장 한 스푼 더해서 하늘의 별 따기였고, 거기에 정체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보니 대통령이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그 어려운 걸 해낼 만큼 내 소설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건데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래?
“집이 어딘데?”
-LA.
“LA? 어차피 일 때문에 가긴 해야 하는데 잘됐네.”
-일?
“미션 컴퍼니하고 [블랙 & 월드] 영화화 계약하려고 하거든. 아. 참고로 이건 비밀이다.
-.....아리야 이거 절대 말하면 안 된대.
-으, 응! 저,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이거 스피커폰 아니라 전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
“조심해주세요. 아직 마무리된 건 아니라서요.”
어차피 퍼질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이 소식은 내가 직접 알리는 게 홍보 면에서 좋겠지.
“아무튼 갈 일 있을 때 연락 줄게. 시간이 언제인진 아직 미정이라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알았어. 근데 웬만하면 주말이면 좋겠어, 우리도 평일엔 계속 훈련이라 짬 내기가 도통 쉽지 않거든.
“되려나 모르겠네. 일단 알겠어.”
-맞다. 그리고 너 왜 나한테 작가 됐다고 말 안 했냐?
그 말에 나는 옆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디슨 누나를 바라봤다.
“이야기 안 했어?”
“이사벨이나 부모님이 말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아무래도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한 것 같았다.
“용건은 그게 끝?”
-아. 맞다 아리야가 양장본? 아무튼 그거에 당첨됐거든?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줘.
-제, 제시! 그만해 이제! 핸드폰 내놔!
-에이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야야! 핸드폰 변기에 빠뜨리지 마! 산 지 얼마 안 됐.....!
-뚝!
전화가 끊기고 나는 메디슨 누나를 바라봤다.
“밥 먹으러 갈까?”
***
대충 집에 있는 걸로 때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하루 동안 자유로운 휴가를 받은 누나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BBQ집으로 향했다.
전에 캐서린이 한턱 샀던 곳으로 가니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메디슨 누나는 내가 산다는 말에 음식을 미친 듯이 주문했다.
“이걸 다 먹게? 누나 다이어트 안 해?”
“난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 괜찮아.”
프롬 파티 드레스를 날려 먹은 캐서린이 들었다면 노할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LA에 갈 때 누나도 와줄 수 있어?”
“못 갈 게 뭐 있어? 어차피 캘리포니아인데. 대표님한테 허락도 맡아놨어. 좋아하시더라.”
“그래?”
“응. 미션 컴퍼니하고 하는 거니까. 뭐 이름값을 높일 수 있는 기회 같은 거지.”
“많이 먹어.”
물론 누나가 무료로 내 변호인 역할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있지만, 전자메일이라든가 가벼운 계약 같은 건 그냥 서비스로 해주고 있었기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제임스.”
“왜?”
“아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최우수 회원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이사벨한테 물어보면 상세히 설명해줄걸? 나도 처음에 [나인 드래곤]에 가입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거든.”
“[나인 드래곤]? 그게 팬카페 이름이야?”
“응. 왜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는지는 나도 몰라.”
한국말로 하면 아홉 마리 용, 한자로 하면 구룡(九龍)이다.
서양에서 구룡이라고 하면 두 가지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하나는 히드라로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헤라클레스가 죽였던 ‘바다뱀’이다.
또 하나는 머리가 9개는 아니지만 7개의 머리를 가진 묵시록의 드래곤이었다.
카페 회장을 만나면 알 수 있겠지만 이유야 뭐가 되었든 간에 나는 드래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난 드래곤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
“[드래곤 마스터]를 쓴 놈이 그런 말을 하냐?”
“뭐. 어렸을 적엔 좋아했지, 내 이름에 드래곤이 들어가는 줄 알았으니까 말이야.”
이름에 드래곤이 들어가 ‘내 몸엔 용의 힘이 흐른다!’라고 중얼거리며 자아도취에 빠졌던 건 잊지 못할 내 흑역사였다.
“그래서 LA에는 언제 갈 거야?”
“금방 갈걸? 어차피 미션 컴피니에 한 번 들르기도 해야 하고, 아 그 전에 빌 에이든 미디어한테 문의해서 사인회 먼저 해야지.”
“사인회? 네가?”
“.....뭐. 불만 있어?”
“불만까지는 아니고..... 네가 사인회를 한다는 게 웃겨서. 근데 무슨 사인회?”
“[사막의 전갈] 500만 부 달성 기념? 원래 약속은 안 한 건데..... 뭐랄까 500만 부 달성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면 찝찝하잖아.”
“해주겠대?”
“연락해봐야지. 근데 사인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글쎄? 보통 사인회는 서점 같은 곳에서 하지 않나? 아니면 강당 같은 곳을 빌리든가.”
“흐음.”
“에밀라 씨한테 연락해봐. 근데 갑자기 사인회 하겠다고 하면 회사 입장에서 당황하지 않을까?”
“아니, 나보다 더 쌍수 들고 좋아하실걸. 그보다 그거면 충분해? 난 더 시킬까 하는데.”
“오븐 치킨.”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밀라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작가님!
에밀라는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 지금 전화 괜찮으신가요?”
-네. 물론이죠. 아 잠시만요.
집에 아이가 있는지 전화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라는 조용한 장소로 이동한 뒤에 다시 전화를 받았다.
-네. 이제 말씀하세요.
“에밀라 혹시 사인회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사인회요? 설마..... 사인회에 드디어 관심이 생기셨나요?
“[사막의 전갈] 500만 부 달성이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조금 그럴 것 같더라고요.”
-달성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달성하셨어요. 내일 기사가 나갈 거예요. 그리고 사인회는 잘 생각하셨어요. 작가님 사인회 공약까지 팬분들이 기다리기 싫다고 하루마다 수백 통씩 항의 메일이 왔거든요!
“......죄송합니다.”
-아뇨아뇨! 아무튼 작가님 그럼 사인회 하시는 거죠? 그럼 차라리 페스티벌에 가시는 게 어떠세요?
“네? 페스티벌?”
-네. 정식으로 저희한테 초청장이 왔거든요! 뉴욕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