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북 페스티벌 (3)
입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중고책을 판매하는 가판이었다.
저 멀리 출판사 로고가 적힌 책들이 보였으며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인지 사람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몬태나는 옷을 두껍게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워지고 있는 것에 반면, 아직 뉴욕은 날씨가 쌀쌀하다는 말만 나올 정도였기에 옷을 두껍게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구경하죠.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작가님! 저랑 같이 다녀요!”
“네. 캐서린 너도 나랑 같이 다니자.”
“.......”
“캐서린?”
“응?”
활기 넘치는 축제의 현장에 잠시 멍때리던 캐서린은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가님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놀고 있을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로지와 다른 친구들은 각자가 구경하고 싶은 곳에 가기로 했다.
“그럼 잘해봐, 다이애나.”
“로, 로지!”
“히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지는 로지에 다이애나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이애나의 친구들이 다 떠나고 나는 중고책이 놓여있는 가판대를 힐끗 바라봤다.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중고책들을 팔고 있었는데,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낡은 책의 눅눅한 냄새에 어딘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중고책들 먼저 볼 수 있을까요?”
작가의 습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버릇이라고 해야 할까?
관리가 잘되었든, 못되었든 간에 낡은 책을 보면 무심결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네!”
“마음대로 해. 아. 그나저나 난 다른 곳 가도 돼?”
“처음 오는 곳인데 같이 다니는 게 좋지 않아?”
“나는 중고책보다는 저쪽에 흥미가 있어서.”
캐서린이 가리킨 곳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책에 대한 토론이나 혹은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럼 끝나고 전화 줘.”
“알았어. 나도 성인이니까 그렇게 과보호 안 해도 돼. 무엇보다도......”
캐서린은 힐끗 옆에 있는 다이애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잘 해봐.”
“뭘?”
“히히히히!”
캐서린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윙크를 하더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는 부스로 향했다.
“그럼 우리도 구경할까?”
캐서린의 말에 다시 한 번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어진 다이애나는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제가 안내할게요!”
***
괜히 세계 최고의 문학 축제 중 한 곳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책을 판매하는 사람들조차 상당한 문학인인지, 부스나 돗자리에 올려놓은 책들 한 권 한 권이 전부 귀하거나 오래된 책들이었다.
“오, [무당벌레는 높은 곳에서 난다.] 이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이거 결국 구하지 못해서 전자책으로 봐야 했거든요.”
“전자책도 좋긴 하지만 종이책만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책으로 보면 또 이해하는 게 달라지기도 하는데 어떠세요? 이 정도 상태면 B급이라 저렴하게 드릴게요.”
“저야 좋죠. 주세요.”
간만에 쇼핑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구매한 책은 5번 정도 탐독했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영국에서 차별받는 인도인을 주제로 만들어진 책으로, 무당벌레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미련 없이 떠나는 주인공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워터 블랙] 시리즈! 그것도 전권!”
“구하는 데 힘들었어요. 그것도 보관상태 A급이에요.”
“아..... 전권은 너무 많은데.....”
통칭 검은물 시리즈는 독을 사용하는 초능력자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였다.
영화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히트한 소설이었이지만, 영화의 성적은 미미했다.
“지금 사면 이거까지 드릴게요.”
“이, 이건.....!”
“한정판 장갑이에요. 포장도 안 뜯었어요. 상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정도면 S급이라 불려도 손색없어요.”
영화를 관람한 관객한테 준 주인공이 사용하던 장갑이었다.
재고가 너무 많이 남아 결국 불우이웃 아동들한테 뿌렸다는 전설적인 장갑이었지만, 이제는 구하기가 힘든 것임은 맞았다.
“끄응..... 이걸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내 곁으로 다이애나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어.... 작가님? [워터 블랙] 시리즈하고 goods는 저희 집에도 있거든요? 그냥 차라리 저희 집에 있는 걸 가져가셔도 돼요.”
“진짜요?”
“네. 물론이죠...... 애초에 할아..... 아니 에드워드 선생님이 프로듀싱해서 망한 작품 중 하나니까요. 할아버지가 냉큼 버리라고 했는데 아까워서 포장한 상태 그대로 가지고 있거든요.”
에드워드 선생님이라도 망한 작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워터 블랙]은 미션 컴퍼니 작품으로 에드워드 선생님이 음악 전반을 프로듀싱을 했지만, 도를 넘은 PPL로 결국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것도 에드워드 선생님의 음악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화 자체가 재미없다는 평이 많았다.
“칫.”
중고책 주인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음 가판대로 향했다.
“작가님은 책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작가가 책을 싫어할 리가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책을 좀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으셔서요.”
“음..... 아무래도 어렸을 적에 책을 많이 못 읽어서 그럴 거예요.”
“네, 네? 작가님이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다이애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놀랄 만한 얘기인가요? 처음엔 전 책 자체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메디슨 누나와 루이나 누나가 [드래곤 블러드]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작품이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흥미가 있다면 오히려 답이라는 것이 명확히 존재하는 수학이 더 좋았다.
거기에 취미 삼아 글을 쓰면서도 세계 어딜 가나 이과는 먹힌다는 아버지의 현실이 담긴 조언이 영향이 있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미국을 돌아다니며 전기 공사 일을 했고, 군대에서도 영선반에서 전기공병이라는 보직을 받았다.
설마 줄 하나 믿고 전봇대에 올라가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놀랐어요..... 작가님이 책을 많이 못 읽으셨다니.....”
“물론 제 기준에서 한 말이에요.”
어린 시절 부모님께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기에 한 달에 한 번만 내가 원하는 책을 사줬다.
그 때문에 우리 집에는 새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역도 별로 좋지 않아서, 서점에 책 유통이 그리 자주 되는 것도 아니었어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서점에 가면 신간이라는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신간이라고 해도 발매된 지 한 달이 넘은 것들이었으니... 살고 있는 동네가 얼마나 낙후된 환경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다 보니 마을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 대학교 도서관 같은 곳에 가서 책을 봤는데, 그런 곳은 이상할 정도로 문학 소설이 많지가 않더라고요.”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반 장르 소설이나 문학 소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손상된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거기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더 이상 읽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중고책들을 보면 발걸음이 멈추더라고요.”
“그래도 이미 가방이 빵빵하신데.....”
“더 들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나저나 다이애나는 책을 안 사나요?”
“저는 대부분 가지고 있어서 괜찮아요. 무엇보다..... 중고책이라는 게 마음이 걸려서요.”
“하긴, 그러실 수 있죠.”
어린 시절에 중고책을 열어봤는데, 안에 건조돼서 팍 납작해져 있는 지네와 거미가 나와 울뻔한 적이 있었다.
이건 양호할 정도로 어떤 책에서는 절대 나면 안 되는 밤꽃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어떤 추리소설은 마지막에 범인에 대한 페이지를 뜯어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이 썼다는 것이 꺼림칙한 건 인정하는 바였다.
-웅성웅성-!!!
그렇게 또 뭘 살까 구경하고 있던 찰나에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현장이 보였다.
“저기도 한번 가봐요!”
“네. 저도 궁금하네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장소이니 필시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이애나와 나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거리를 벌려 무엇을 팔고 있는지 확인해봤다.
“......내 양장본이 왜 저깄지?”
판매하는 목적이 아닌 전시 목적이었는지 유리관에 보호되어 있었다.
‘여긴......’
부스에 적힌 이름을 확인해보니 그곳엔 빌 에이든 미디어를 상징하는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작가님이 속한 출판사네요? 아무래도 작가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다른 작가 소설들을 홍보하는 것 같아요.”
“잘돼야 할 텐데.....”
부스를 보니 빌 에이든 미디어에 속해있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중간 작가 혹은 인기 없는 작가.
모종의 이유로 작품이 뜨질 않았든가, 아니면 내용은 재밌으나 인기가 없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블랙 & 월드]와 [사막의 전갈]도 배치되어 있었다.
‘저렇게 될까 봐 내가 작가를 목표로 하지 않은 거기도 하지.....’
인기 없는 작가의 말로라고 해야 할까?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짧은 시간이 아닌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심혈을 기울여 책을 출판한다고 해도 인기가 없거나,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그 대가는 자신이 치르게 된다.
그래도 저기 있는 중간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오히려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세상에는 내용이 재밌어도 뜨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온 김에 한 번 들르실래요?”
“아뇨. 지금 제가 가면 민폐일 거예요.”
직원들은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내가 가면 나한테 이목이 집중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팬들과 만날 텐데 굳이 지금 갈 필요는 없겠지.
다만
“그래도 사진은 찍어둬야겠어요.”
사인회 일정은 SNS에 올려야 하니까.
***
나는 중고책 코너에서 벗어나 출판사들이 팔고 있는 책들을 확인했다.
내가 모르는 책들도 많았고, [블랙 & 월드] 양장본처럼 전시되어 있는 책들도 있었다.
“이거 내용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구매자들은 작가한테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책을 구매할지 말지 선택하기도 했다.
책 구매를 결정하면 작가는 표지 안쪽에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나도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흙 속의 진주를 찾듯이 다양한 책들을 구경했다.
“작가님......”
다이애나도 이번에는 책을 꽤 샀는지 양손 가득 책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어딘가에 보관을 좀 해놔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무거워요.”
“하긴 저도 이제 좀 지치네요. 어디 보관할 곳 있나요?”
“네. 유료긴 한데 저쪽으로 가면 책을 보관해주는 곳이 있어요.”
아무래도 나처럼 계획 없이 책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보관해주는 곳이 있는 것 같았다.
“택배로 배송도 가능해요.”
“그거 좋네요. 그럼 배송시킬 수 있으니 책을 더 살 수 있겠네요!”
다이애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둘이 됐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오직 책에만 관심 있는 작가님이 너무하기도 했다.
어젯밤부터 잠도 못 자고 기대했던 축제에서 돈만 쓰고 있으니 허탈하기만 했다.
***
다이애나가 말한 곳에 책을 맡기고 다시 축제를 구경했다.
그러다 어느 부스에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고 그 길로 바로 걸음을 멈췄다.
‘책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라......’
유명 대학의 교수가 나와서 작가 혹은 작품에 대한 강의를 한 뒤 그에 대한 내용을 함께 토론하는 것 같았다.
“어? 드래곤 원 작가님 작품에 대한 강의라고 하네요?”
“음......”
“어떻게 하실래요?”
“한번 들어가 보죠.”
내 작품에 대한 설명이라....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