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사인회 (2)
다이애나의 질문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실망하려나?’
글을 쓰는 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대학교수가 강의할 때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영감을 받으면 글을 써내려 간다.
가사를 적을 때, 물건을 만들 때, 글을 쓸 때, 공식을 풀이할 때 모두 각자만의 방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동경해 따라 하기만 급급했던 나도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기대와는 다른 대답이겠지만, 진짜 별 이유 없어요.”
“네?”
“아까 대학교수가 말했듯이 제 소설은 현실 반영이 많은 편이에요. 현실에 있던 일이나 사건, 사고, 환경 등에서 영감을 얻으면 그냥 그걸 바탕으로 적어요. 그 때문인지 자료조사도 자주 하는 편이고요.”
“아..... 그래서.”
“[사막의 전갈]도 당시 이슈가 됐던 아시아 여성 납치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거예요.”
“[블랙 & 월드]는요?”
“[블랙 & 월드]와 곧 발매될 [사막의 제국] 같은 경우는 일단 시놉시스를 적은 다음에 현실에 일어나는 일이나, 아니면 영화를 보고 느낀 생각들을 제 식대로 적었어요. [드래곤 마스터]는 어릴 적에 썼던 작품이라 [드래곤 블러드]의 영향을 받았던 거고요. 다만, 동물의 묘사는 뮤튜브를 봤고, 더욱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한 주인공의 드래곤은 저희 집 팡이를 모티브로 했죠.”
그러자 다이애나가 더욱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럼요! 음..... [리턴 패션 디자이너]는요?”
“음.... 앞으로 며칠 후면 완결이 올라와서 작가의 말을 보면 확인할 수 있긴 할 텐데..... 이 같은 경우는 원래 ‘청춘을 이겨내는 스토리’로 적을까 했는데, 마침 영감을 주는 지.... 아니 들은 얘기가 있어서 실화를 바탕으로 제가 각색해서 적어본 거예요.”
“헤에..... 정말 다양하시네요?”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다가 현실에 영감을 받아 갑자기 수정한 것도 있고, 애초부터 곧바로 글을 쓴 것들도 있어요. 제일 힘들었던 건 역시 [리턴 패션 디자이너]네요.”
시놉시스를 적지도 않고 글을 적으려 하다가 결국 꽉 막힌 덕분에 에일리의 인터뷰가 필요했고 그 덕분에 [리턴 패션 디자이너]가 나올 수 있었다.
“아. 음식 나왔네요.”
***
위험한 뉴욕 밤거리 때문에 에드워드 선생님 집으로 데려다준 뒤에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본래는 하루만 spa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어차피 예약해 놓은 호텔도 없었고 캐서린도 이 spa식 호텔을 마음에 들어 해서 이 호텔에 있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릴렉스 룸으로 가니 그곳에서 캐서린이 자고 있었기에 다시 조용히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정원은 날씨가 쌀쌀했지만 그래도 전화를 하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아. 도착하셨나요?”
-네! 작가님! 아이들하고 함께 도착했어요!
“남편분도 오셨나요?”
-아니요. 애 아빠는 일이 있어서 저하고 아이들만 왔어요.
“아. 그럼 내일 아이들하고 같이 오시는 건가요?”
-네. 혹시 실례일까요?
“전 상관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이들 챙기랴 사인회 챙기랴.... 에밀라 씨가 힘드실 것 같은데.”
-아이들은 괜찮아요. 사촌을 데려왔거든요!
“아. 다행이네요.
사인회에서 아이들이 따분해할 것 같아 걱정됐는데, 다행히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될까요?”
-우선 입장과 동시에 사인회를 오후 1시까지만 진행할까 해요. 그다음 한 시간 휴식을 가진 다음에 강의나 토론, 질문회 같은 걸 가지시는 게 어떠세요? 끝나면 6시쯤이 될 것 같아요.
“음...... 좋네요. 괜찮을 것 같아요.”
-사인회는 기껏해야 3시간 정도일 거예요. 일단 홈페이지하고 회사 SNS에 홍보를 해놓기는 했는데 그래도 작가님이 SNS에 한 번 더 홍보를 해주셔도 좋고요.
“네. 안 그래도 빌 에이든 미디어 부스 사진을 찍어놨거든요. 전화가 끝나면 곧바로 SNS에 올릴게요.”
-넵! 아. 그리고 현재 [블랙 & 월드]가 지금까지 총 200만 부 발매가 되었거든요? 아직 완판은 아니지만 축하드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200만 부라..... 딱히 공약한 건 없지만, 그래도 사인회를 연 이유 중 하나가 생겨서 좋긴 하네요. 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드래곤 마스터] 책을 들고 온 팬분들한테도 사인을 해줘야 하나요?”
-아 그거...... 음. 그건 제가 내일 아침까지 알아보고 올게요.
출판사를 두 곳에 나눠 계약한 경우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두 출판사가 협의를 한다면 모를까, 만일 한 출판사가 대형 이벤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출판사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사인회를 한다면 출판사 입장에서 곤란할 테니까 말이다.
-근데 아마...... 안 될 확률이 높을 거예요.
“아쉽네요.”
다들 내 독자이고, 팬인데 차별을 둬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럼 작가님이 아쉬워한다는 뜻을 전해볼게요. 그럼 그쪽도 더 신중히 생각해 볼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모쪼록 두 출판사에 손해 가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해주세요.”
-넵! 내일은 아침 9시까지 안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부스를 찍으셨다고 했으니 위치는 아시죠? 그곳으로 오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봬요.”
-네에!
뚝
전화가 끊기고 나는 뒷목을 주물렀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구나...... 휴우.”
작품에 맞는 출판사만 생각했을 당시에는 이러한 상황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인회나 이벤트가 생기면 이렇게 되는구나.
“일단 SNS에 올려야지.”
『제임스 권(Dragon one)
【사진】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입니다. 내일 오후 1시까지 사인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후 2시부터는 독자님들과 소통을 나눌 예정입니다.
시작은 하나였으나 이제는 둘이 되었네요.
모두 함께 행복해요!』
핸드폰을 가운에 집어넣고 나는 릴렉스 룸으로 향했다.
***
갑작스럽게 올라온 제임스 작가의 SNS 게시물에 독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사인회가 브루클린에서 열린다는 건 독자들 전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기에, 독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젠장. 나 캐나다 사는데 뉴욕 왔다. 사촌동생이 가지고 온 [사막의 전갈]을 읽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부모님한테 처음으로 부탁해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지금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 입구 앞입니다. 앞으로 13시간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ㄴ윗님. 설마 지금부터 기다리시게요?
ㄴ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미 와 있는데요? 【사진】
ㄴ헐 대박
-저도 지금 도착했습니다. 이야..... 줄 엄청 기네요. 3시간밖에 안 한다고 하니까 일찍 기다리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너무 기네요.
ㄴ어느 정도 긴데요?
ㄴ지금 경찰들도 왔습니다. 설명 끝
ㄴWow......
-지금 장난 아닙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줄 서 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서 핫팩 같은 걸 빌 에이든 미디어 측에서 나눠주고 있는데, 이것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젠장. 작가 양반 차라리 이럴 거면 사인도 추첨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1분마다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이거 정상입니까? 지금 줄 때문에 난리도 아닙니다. 경찰분들이 나서서 정리를 해주고 있는데, 지금 그분들 표정도 장난 아닙니다.
ㄴ화나 있나요?
ㄴ아뇨. 드래곤 원 작가님 사인회라니까 지금 각 보고 있습니다. 말 안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경찰분들도 드래곤 원한테 사인받고 싶어 합니다.
ㄴHAHAHAHAHAHAHAH..... 농담도
ㄴ와서 보시든가요.
-윗분 말처럼 퇴근한 경찰분들도 제복 입은 상태로 줄에서 대기 중입니다. 【사진】 이것 보세요.
ㄴ악! 책을 꼭 끌어안고 있는 거 너무 귀여워요!
ㄴ지금 상황이 진짜 안 좋구나......
-어? 지금 줄 서 있던 경찰분 동료 경찰한테 끌려가려는 중이에요! 인원 부족으로 줄 정리해야 한다고 데려가는 중인데 가기 싫다고 소리 지르고 있는 중이에요! 【사진】
ㄴ......애도합니다.
ㄴ표정만 봐도 엄청 싫어 보이시네..... 저분 어캄?
ㄴ살벌하네..... 그래도 품에 안고 있는 [블랙 & 월드] 책은 절대 안 놓으시네.
***
나는 캐서린 옆에 있는 안마의자에 누워있었다.
“사인회는 계획은 어떻게 돼?”
“입장부터 오후 1시까지 사인회하고 2시부터 소통.”
“소통...... 근데, 오빠.”
“왜?”
캐서린은 핸드폰에 있는 사진 하나를 나한테 보여주며 말했다.
“소통할 수 있겠어?”
“응?”
핸드폰에는 사람들이 몇 번가까지 줄 서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렸는데? 소통? 그거 할 공간은 있고?”
“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경찰들이 줄을 정리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람이 많이 찾아와 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몰릴 줄은 몰랐는데?
“다시 전화해 봐야 하나?”
“출판사한테 전화한다고 해도 저 상태가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데? 출판사 측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오빠 저기에 가서 입을 옷은 있어?”
“옷? 없는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리닝 입고 있게?”
“그건 아니지......”
“에휴.”
캐서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해? 일어나지 않고.”
“왜?”
“시간이 늦긴 했는데, 아직 운영하고 있는 옷집이나 헤어샵이 있겠지. 거기 가서 머리도 단정하게 자르고, 옷도 단정한 걸로 하나 사야지, 진짜 그렇게 갈 생각은 아니지?”
“그건 그런데 조금만 더 쉬었다 가면 안 되냐?”
“빨리 와. 더 늦으면 사지도 못해.”
“끄응......”
이런 거에 젬병이다 보니 또 쇼핑하러 끌려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 선물을 골라줬던 캐서린의 안목이라면 맡겨도 되겠지.
“그래 가자.”
***
다음 날 아침 9시가 되고 나와 캐서린은 관계자인 척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눈빛 봐. 살벌해.”
어제저녁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은 초췌하고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빌 에이든 미디어 측에서 대기할 장소를 급하게 마련해줬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편하게 쉬진 못했으리라.
나는 그들의 눈빛을 애써 회피하며 빌 에이든 미디어 부스로 향했다.
“아! 작가님!”
이미 와 있던 에밀라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사인회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네. 아! 그 전에 소개부터 할게요! 빌 에이든 미디어 직원분들인데 전부 안면이 있으시죠?”
“네. 저번에 갔을 때 뵀던 분들이네요.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제임스라고 합니다.”
직원들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작가분들이 없으시네요?”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고, 내일 다른 작가분들이 오실 거예요. 오늘은 어차피 작가님 사인회 때문에... 아무래도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될 게 뻔하니까요.”
“아..... 네.”
“자! 그럼 얼른 사인회 준비할게요!”
에밀라의 씩씩한 말과 함께 직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