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사인회 (3)
빌 에이든 미디어도 드래곤 원의 팬덤을 알고 있었기에 사인회를 한다는 말에 짧은 시간이지만 철저하게 준비를 마쳤다.
다만, 갑작스럽게 준비된 사인회였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도 있었고, 부족한 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 정도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빌 에이든 미디어로선 드래곤 원 작가의 사인회가 처음이다 보니, 참고할 게 없었다.
제임스 작가의 사인회를 축제 도중 기획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축제에서라면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행사를 진행하는 요원들과 상의하여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까지만 생각했다.
-웅성 웅성 웅성!
몇 블록을 감쌀 정도로 몰려든 사람들 덕분에 뉴스에까지 나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많아도 너무 많았다.
3시간 동안만 사인회를 할 예정이었던 빌 에이든 미디어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오빠, 뉴스에 나온다.”
“내 얼굴이?”
“아니, 폭동이.”
“......응?”
직원들이 상의를 하고 있을 때 캐서린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누군가 올린 SNS 영상이었는데 너무 짧은 사인회 시간 때문에 새치기를 하다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싸움이 일어나는 찰나에 기회를 노려 누군가 또 새치기를 하려고 했고, 그것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본래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은 미국 최대의 작품 행사답게 여러 뉴스 매체들이 현장을 찍어가는데, 헬리캠이 몇 블록을 감쌀 정도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찍고 있었고, 이런 사람들 간의 싸움은 그들에겐 가장 큰 기삿거리였다.
“......”
그제야 어째서 직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상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3시간 끝나고 결국 사인 못 받은 사람들이 성질나서 여기 덮치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도망가면 절교다.”
“농담이야. 그보다 진짜 금방 끝나버리면 막 군인까지 투입되는 거 아니야?”
“아서라.”
“왜!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드래곤 원 작가가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는 날인데!”
농담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고, 행사를 진행하는 요원들 또한 우리가 있는 부스로 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특히 에밀라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축제의 장점은 사람들의 유입과 자리 확보가 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몰려온 인원이라면 축구장을 빌려도 부족할 정도였다.
“작가님.”
대화를 마친 에밀라는 나한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네.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오늘 사인회 취소인가요?”
“사인회 취소하면 저희 죽을 수도 있을걸요? 지금 경찰분들도 얼른 이 사태를 해결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 저희 회사 측으로 뉴욕 주지사님이 연락이 올 정도라서요.”
“......주지사까지요?”
“네. 줄이 너무 길어져서 교통이 마비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얼른 해결하라고 하시네요.”
“음...... 그래서 방법은요?”
“근처 행사장이나 경기장을 문의해 봤는데요. 이 정도 인원을 수용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축제 측에 문의해서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리겠지만, 그래도 인원이 너무 많아서 무리일 것 같다고 해요.”
‘결국 이래저래 어렵다는 건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계속 줄이 이어지고 있어서요. 아무래도..... 토론하고 강의보다는 천천히라도 좋으니 사인회 시간을 늘리는 방법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어쩔 수 없죠 뭐.”
내 말에 에밀라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작가님. 이런 건 저희 측에서 잘 준비했어야 했는데......”
“아뇨. 갑작스럽게 말한 제 잘못도 있는걸요. 그런데 축제가 끝나는 오후 6시까지 사인회가 이어지면 손목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네요... 이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컷트 부탁드려요.”
“넵! 물론이죠!”
“아. 그리고 SC라스틱하고는 연락해보셨나요?”
“네. 문의해 봤는데 무조건 그냥 작가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만, SC라스틱에서 준비한 추첨을 통한 양장본 사인회는 반드시 참여해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곧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입장 시간은 아직 안 되긴 했는데, 최대한 줄을 줄여달라고 하셔서요. 어차피 지금 줄은 북 페스티벌이 목적이 아니라 작가님이 목적이니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아. 캐서린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딱히 할 게 없잖아? 어차피 어제 축제 구경도 다 했으니까 그냥 옆에 있다가 도울 게 있으면 도울게.”
“그래. 고맙다.”
***
사인회를 하기 직전 빌 에이든 미디어 부스를 이동시켜야만 했다.
부스 자체를 옮기는 건 금방이라 상관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구석에 가게 되는 건 조금 아쉬웠다.
부스에 있는 줄 때문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서둘러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내가 있는 부스로 안내하며 줄을 안정시켰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당연한 건데 뭘요. 열심히 하세요.”
직원들 수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줄이 안정화 될 때까지 경찰들이 도움을 줬다.
줄이 질서 있게 맞춰지고 나서야 행사를 진행하는 직원들이 움직일 수 있었다.
직원들은 차단봉을 이용해 일렬로 구불구불 줄을 설 수 있게 만들어 어떻게든 공간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그럼 시작하자.’
드디어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줄 가장 앞에서 있던 여성이 감격에 찬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OH MY GOD......!”
여성은 감격에 차다 못해 너무 기쁜지 눈물까지 흘렸다.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줄을 섰어요.....! My God.....! 어제 오후 6시부터 줄을 선 보람이 있네요!”
첫 번째로 온 이 여성은 어제 축제가 종료되자마자 줄을 선 것 같았다.
“하하. 첫 번째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이 근처에서 살고 있어서 첫 번째로 줄 설 수 있었어요. 이런 행운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 여기 책이요!”
여성은 가방에서 [사막의 전갈]을 꺼냈다.
포장도 제거되지 않은 깔끔한 새 책이었는데 아마 보관용인 것 같았다.
“제 인생 소설이에요! 저도 이렇게 쓰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혹시 작가신가요?”
“네! 원래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드래곤 원 작가님을 보고 작가에 도전해보고 있어요!”
나는 [사막의 전갈] 표지를 넘겨 그곳에 dragon two를 적어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Bessie에요.”
나는 사인 밑에 ‘사인회 첫 손님 Bessie 작가님한테 행운이 깃들길’이라고 적어주었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퇴고라고 생각해요. 행운을 빌게요.”
“고마워요! 작가님한테도 항상 행운이 깃들길 빌게요!”
Bessie가 책을 끌어안고 감동받은 얼굴로 떠나가자, 옆에 있던 캐서린이 중얼거렸다.
“와, 진짜 미인이네... 응? 잠깐만. Bessie? Bessie Young이면..... Miss USA 우승자 아니었던가? 모델계에서 빨리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캐서린의 말에 대꾸할 새도 없이 다음 사람을 웃으며 맞이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흑인 남성이었는데 얼굴에 무수히 많은 문신이 있었다.
“하하하하! 윌즈입니다.”
“안녕하세요. 윌즈.”
“이야..... 저도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 사인 부탁드립니다.”
윌즈 또한 포장도 뜯지 않은 [블랙 & 월드]를 내밀었다.
포장을 뜯고 표지 안쪽에 사인을 한 뒤 윌즈한테 내밀었다.
“참. 작가님 이거 받으시죠.”
윌즈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주)키네케스?”
“귀찮게 하거나, 처리할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죠. 깔끔하고 뒤끝 없이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윌즈.”
“대신 사진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윌즈는 나와 사진을 찍은 뒤 문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책을 가지고 사라졌다.
완전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캐서린은 이번엔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피아..... 무기 거래 대부.....”
“자. 다음 오세요.”
줄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줄이 길어진 것도 장관이었지만,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유명하거나 언론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줄 서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유명한 사람들한테 다가가 같이 셀카 찍기를 부탁했다.
드디어 줄어드는 사람들에 관계자들은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내 손목은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힘드네.’
몇 명이나 했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지만 손목이 점점 아파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것도 계속하다 보니 심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지치게 만드는 건.
“사인 부탁드립니다.”
“네...... 근데 이게 뭐죠?”
“계약서입니다. 저희 에니멀 미디어에 작가님의 [블랙 & 월드] 2부를 맡겨주신다면, 성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하아......”
너무도 자랑스럽게 말하는 백인 남성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안녕히 가세요.”
“자, 작가님? 일단 제 말 좀 들어보시고..... 자, 작가님? 잠시만요! 작가님!!!”
에밀라는 서둘러 직원들과 함께 남성을 쫓아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위약금을 대신 내줄 테니 빌에이든 미디어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들과 계약하자거나 해적판을 낼 생각이 있냐, 세계로 같이 가자는 등.
팬을 위장하여 귀찮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지쳐가고 있었다.
“안냐세요!”
“어서 오세요, 꼬마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사인해주세여!”
그래도 순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나를 응원하는 팬들 덕분에 계속 사인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본래 오후 1시로 계획되어 있던 사인회는 시간이 흘러 오후 4시까지 진행되었다.
“끄응......”
3시 30분 정도일 때부터 내 상태를 눈치챈 에밀라가 커트라인을 세워 다행히 4시에 끝난 것이다.
“죄송해요, 작가님...... 힘드셨죠.”
“아뇨. 애초에 제가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서 이렇게 된 건데요 뭘.”
어째서 유명 작가들이 추첨을 통해서 사인회를 진행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된 계기였다.
빌 에이든 미디어도 내가 갑작스럽게 사인회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뻐근해진 손목을 위아래로 돌리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냥 보내면 미안한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에밀라 씨한테 의견을 냈다.
“간단한 소통이요?”
“네.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신데 그냥 보내기 미안해서요. 어떻게 안 될까요?”
“뭐...... 행사 스태프들한테 물어보면 어떻게든 가능하긴 할 거예요. 인원이 많긴 한데 사인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갔으니 못 받은 사람들만 모으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님이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저는 괜찮으니 그렇게 진행해주세요. 에밀라도 피곤할 텐데 죄송해요.”
“아뇨아뇨. 당연한 일인걸요? 저희 회사도 알리고 좋죠! 일단 알아보고 올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에밀라가 알아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어깨를 주물렀다.
그런 내 어깨에 캐서린이 손을 올렸다.
“내가 해줄게.”
“용돈은 없다.”
“내가 속물로 보여?”
“응.”
캐서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근데 사인받고 내려가면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알아?”
“그걸 봤어?”
“안 보고 싶어도 보이고 안 듣고 싶어도 들리던데?”
“반응이 어땠는데?”
“멋있대. 귀엽대. 고등학생인 줄 알았대. 아미에 갔다 온 게 믿기지 않는대. 저 얼굴과 저 필력과 저 재력과 Army에 갔다 온 남성성까지 있으니 아주 완벽하대. 듣는 내 얼굴이 다 빨개지더라. 으엑.”
캐서린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