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2차 인터뷰 (2)
내용보다는 자기를 각색한 내용에서 주인공이 남자인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말이지.”
나는 어째서 에일리를 각색한 주인공이 남자인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상관없지만.”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내심 섭섭한 표정이 엿보였다.
내 실수였다.
각색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말을 한 뒤에 스토리를 적었어야 했는데
“이, 이것 봐봐! 네 이야기에 동조해주는 사람들도 많아!”
나는 서둘러 에일리의 관심을 바꾸기 위해 노트북으로 그녀를 응원하는 마지막화 댓글을 보여주었다.
에일리는 댓글에는 관심이 있는 듯 힐끗힐끗 곁눈질로 바라봤다.
“.....내 눈엔 네 욕만 보이는데.....?”
“크, 크흠!”
댓글에는 내 욕이 상당했기에 에일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흥미롭다는 얼굴로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네 소설이 재밌긴 재밌나 보네. 재미없다는 욕설이 아니라 전부 다음 화를 내놓으라는 댓글들뿐이네. 이러다 너 죽이려 하겠는데?”
“그런 댓글 말고 네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댓글들을 읽으라고.”
흥미롭게 댓글을 읽던 에일리의 표정이 서서히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벤자민의 이야기에 가슴 아파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에일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
에일리는 점차 말이 없어졌다.
화면을 내리는 손길도, 댓글을 읽는 속도도 느려졌으며 어느 순간이 되어서는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댓글을 읽고 또 읽었다.
“......”
아무 말도 없이 댓글을 읽는 에일리의 모습에 나도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도 에일리는 말없이 계속 댓글을 읽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댓글을 미처 다 읽지 못하겠는지 에일리는 이제 그만 보겠다는 듯 노트북을 닫았다.
“......어때?”
에일리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에일리는 닫힌 노트북을 스윽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복잡해진 얼굴의 에일리가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꿈을 꿀 나이에 아이가 생겨 꿈을 접어야 했다.
남자친구라는 녀석은 자기 미래에 문제가 생길까 봐 책임감이라곤 하나 없이 홀랑 도망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당시에는 수백 번이나 생각했다.
“처음으로 너와 인터뷰 했을 때부터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지만..... 그래도 난 불행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어.”
제임스와 대화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남자친구 집에 찾아갔다.
꿈이었던 패션 디자이너를 목표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고 실망하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뭐랄까...... 아젤리나 졸리 같은 느낌이네.”
아젤리나 졸리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불행만을 보며 자랐다.
엄마는 전남편과 똑같은 머리 색을 가진 아젤리나의 머리카락을 염색으로 덮었고, 생활고에 못 이겨 전남편과 전남편의 아내가 출연하는 영화에 엄마와 자신이 조연으로 출연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불행과 불행의 연속.
아젤리나는 킬러한테 자신을 죽여달라고까지 부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아젤리나의 생각을 180도 뒤집는 일이 있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불행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이들을 생각하지 못한 거지.”
아젤리나가 영화촬영으로 캄보디아에 갔을 당시, 아젤리나는 캄보디아에 불운한 아이들과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다.
자신의 불행은 불행조차 아니었다고.
현재 에일리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남의 불행을 나의 위안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글쎄... 그건 너무 입에 발린 말 같아. 일단은 내가 살아야 하니까.”
에일리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는 에일리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에일리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나 있었다.
“댓글에 너를 납치해달라는 말들이 많더라? 벤자민한테 슬슬 희망을 줘야 하지 않아?”
“크, 크흠!”
“네 집 주소 까발릴까?”
“너 우리집 주소 모르잖아?”
“사는 동네는 알지. 뉴스에도 나오니까 동네만 말하면 너를 찾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을까?”
“......그러지 마. 요즘 힘들어.”
“그럼 내 인터뷰 덕에 작품도 잘됐으니 내 부탁 좀 들어줘.”
“......부탁?”
“응. 그러면 조용히 있을게.”
“금전적인 부탁이나,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흐음..... 경우에 따라선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일단 말해봐.”
“그건 말이야.....”
에일리의 부탁을 들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
침대에 누워 에일리의 말을 계속 고민해봤다.
솔직히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에일리의 부탁을 실현시키려면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
원래 목표라면 글을 써야 했지만, 글을 잠시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띠리리리리!
핸드폰을 바라보니 아리야한테서 연락이 왔다.
‘아리야? 무슨 일 있는 건가?’
혹시 콜린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는 건지 궁금했기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아리야 씨.”
-아! 작가님! 안녕하세요! 그간 무탈하셨나요?
“네. 그보다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콜린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걸 깜빡하고 있어서요. 작가님 바쁘실까 봐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서야 전화 드리네요.
“아..... 네. 말씀하세요.”
콜린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방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그저 편안한 삶을 누리는 걸 택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작가님이 돌아가시고 30분 정도 뒤에 콜린이 나왔어요.
“정말요?”
-네! 비록 엄마는 안 계셨지만 정말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탁에 앉아 식사다운 식사를 했어요!
“주방에서 가족끼리 앉아서 밥을 먹었다고요?”
-네! 저희 가족 모두 달라진 콜린을 보고 그날 눈물을 흘렸어요.
“허어.....”
기적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콜린 자체가 애초부터 소리의 주인을 이겨낼 의지가 있었던 걸까?
정답은 모르지만 중요한 건 콜린은 결국 이겨냈다.
-물론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에요..... 조현병에 걸리기 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요. 그, 그래도 스스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요?”
-어제 밥을 먹고 심야에는 병원도 갔다 왔어요!
“......콜린이요?”
-네. 원래는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콜린이 직접 가고 싶다고 했어요!
병원에 가면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했던 그 콜린이 직접 가겠다고 했다고?
-병원 측에서도 상태가 굉장히 호전되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굳이 약을 먹을 필요는 없고 꾸준한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평소와 같이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도 아직은 집에서 나오는 걸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방에 있는 시간도 길고 나오는 횟수도 그리 많지 않고요.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저희가 방 안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예요.
‘자신의 세계를 연 건가.’
단단히 갇혀 있던 방을 본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다른 세계 같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위협 하나마저도 느끼고 싶지 않았던 콜린만의 세계, 그 안에 들어가는 건 나조차도 무리였다.
나 또한 방문 앞 혹은 방문에 걸쳐 서 있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콜린이 무슨 이상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헨리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콜린이 오늘 아침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글?”
-네. 자신한테 있었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작가가 꿈이라고 했고요.
“음......”
맥없이 놓았던 꿈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건가?
“콜린한테 언제 한 번 다시 통화하자고 말 좀 해주세요.”
-지금 당장도 가능한데요?
“아뇨. 콜린한테 이렇게 말해주세요. ‘만일 네가 글을 쓸 때 벽에 부딪힌 느낌이 나거나, 죽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오면 전화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넵!
“작품의 세계는 결코 쉬운 세계가 아니니까요.”
작품의 세계가 자신의 생각했던 것보다 힘든 것을 알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나아가려는 의지만 보인다면, 아주 조금이지만 그 벽을 허물어줄 생각이었다.
나는 아리야하고의 전화를 끊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노력했네.”
병원을 스스로 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인지했다는 행동이었다.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는 사회에서 콜린은 다시 한번 용감히 발을 내디딘 것이다.
“.....글은 조금 나중에 쓰자.”
누군가 내 글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걸 몇 번 지켜봤다.
콜린 이전에 캐서린도 나 때문에 작가가 되고 싶어 했고, 팬 사인회에서도 나로 인해 작가의 꿈을 꾸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때문에 꿈을 찾고 길을 바꾼다.
그 생각에 왠지 모르게 몸이 노곤해졌다.
‘그냥 오늘은 쉬고 싶네.’
그들의 안녕을 빌며 오늘은 푹 쉬기로 했다.
***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인터뷰와 시험을 치르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시민권 취득은 그리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메디슨 누나가 도움을 줘서 어렵지 않은 거지만, 그래도 가장 복잡하다고 느낀 것을 쉽사리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언제 나간다고?”
“다음 주에 LA로 이사 갈 예정이에요. 정확한 주소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래라.”
메디슨 누나는 집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구해주었다.
고층 빌딩으로 꼭대기 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살기에는 넉넉한 공간이었다.
직접 보지 않고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기 때문에 세세하게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짐을 싸야 할 것 같아요. 도와주실 거죠?”
“짐이 있긴 하니?”
“.....옷가지 몇 개만 캐리어에 넣으면 돼요.”
대부분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기에 옷은 가져가고, 컴퓨터는 새로 살 생각이었다.
인생 첫 독립이다 보니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새로운 곳에 자리 잡고 나면 추리 소설도 연재를 시작해야지.’
콜린의 변화에 따라 적으려던 소설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
내가 본래 적으려던 소설 속 주인공은 조현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괴로움에 떠는 인간이었지만, 좋아진 콜린을 보며 주인공의 성격과 진행 방향을 조금은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일까지 겹쳐져서 그냥 시간이 충분히 생기면 그때부터 적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추리 소설이다 보니 웹소설이 좋을지 종이책 출판이 좋을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씨가 추우니 가서 든든하게 입고.”
“LA는 괜찮을 테지만, 그럴게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하고.”
“물론이죠.”
“인스턴트만 먹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요리할 줄 알아요.”
부모님도 독립하라고는 말했지만, 그래도 불안하셨는지 꼬치꼬치 잔소리를 하셨다.
이사 날까지는 4일 정도 남은 시점이라 그런지 솔직히 그리 바쁘지 않았기에 나는 편안히 집에서 머물렀다.
글도 내려놓고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띠리리리리리!
그렇게 추리 소설 내용을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던 사이, 갑자기 전화가 왔다.
“루시아?”
어쩐 일이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루시아의 전화를 받았다.
-아! 작가님!
“네. 오래간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넵! 물론이죠!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로.....?”
-[드래곤 마스터] 양장본에 관해서 연락을 드렸어요! 일만 권 전부 출판 완료했어요! 작가님이 원하는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그때 사인회를 열 생각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벌써 한 달이네요.”
-넵! 추첨은 이미 완료한 상태예요! 작가님이 말씀만 해주시면 곧바로 사인회를 진행할 수 있어요!
“제가 4일 후에 이사를 가거든요? 아마 짐 정리다 뭐다 해서 조금 바쁠 것 같아요. 2주 뒤에 진행해도 될까요?”
-아. 그러고 보니 이사하신다고 하셨죠? 깜빡하고 있었네요.
“네에...... 네?”
잠깐만 어떻게 루시아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이사 가는 건 오로지 가족하고 친구 몇 명만 알고 있을 텐데?
-아. 메디슨 변호사님이 아직 말씀 안 해주셨나 보네요!
“뭐를요?”
-이번에 작가님이 이사 가시는 집, 저희 대표님이 소유하고 계신 건물이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