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2차 수정
서점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작게 떨리고 있는 내 손은 얼른 가서 글을 쓰고 싶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집으로 가기 전에 풀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다.
“그나저나 에드월 홈즈 작가님은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친구라고. 그 녀석이 이 서점에 자주 왔었네. 친한 사이였지.”
“친한..... 그럼 에드워드 선생님과 마그누스 감독님도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들은 만나본 적 없네. 아마 홈즈 그 녀석이 고등학교나 대학생 때 만났겠지.”
“그럼.....”
“소꿉친구 같은 거네. 성인이 되고도 몇 번 만난 정도지. 그 공책도 그 당시에 받은 걸세.”
할아버지는 책 표지 겉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글 쓰게. 독자들이 안달 나긴 하겠지만 그래도 잘 쓴 글을 읽으면 해소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너무 답답하면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걸어보게. 혹시 아나? 새로운 인연이나 영감이 자네를 기다릴지.”
할아버지는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 그럼 사진이나 찍으세. 사인도 해주고.”
“하하! 넵!”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셀카를 찍은 뒤, 서점에서 판매되는 세 종류의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사인해준 책을 카운터에 올려두며 말했다.
“언제든지 오게. 서점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니.”
***
글이 쓰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할아버지의 말대로 그저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목욕이었다.
몸을 씻고, 보내준 식재료로 간단하게 요리를 해 먹고, 그릇을 정리한 다음에야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니 마음이 경건해진 것 같았다.
“[드래곤 마스터 2부]부터 수정하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내용 한 페이지.
천천히 살펴보고 수정하면 분명 재밌는 글이 탄생할 것이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우두두둑!
나는 손가락을 풀고 모니터 화면을 살폈다.
***
메디슨은 요 며칠 동안 일이 바빠 제임스 집에 찾아가지 못했다.
‘[리턴 패션 디자이너] 책을 올린 이후로는 또 SNS 활동을 아예 안 하네..... 얘 살아있가는 한가.’
어차피 SNS 활동 자체를 한다고 해도 안 한 기간이 훨씬 길기에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연락을 모두 끊고 지내는 것을 보면 또 무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메디슨은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이 아닌, 제임스 집으로 향했다.
‘으으. 추워.’
제임스가 걱정돼서 집에 가는 것도 있지만, 사실 제임스가 사는 집에 있는 온돌이 그리워서 가는 것도 있었다.
메디슨의 집은 상당히 춥고 오래된 건물이라 따스한 제임스의 집이 더 좋았다.
‘또 죽을 것처럼 기절해 있는 건가?’
겸사겸사 무리하고 있을 제임스한테 밥이나 한 끼 사주자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누나? 어쩐 일이야?”
비실거리며 글을 쓰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얼굴에 다크써클이 끼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한 상태로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있는 제임스가 보였다.
“.....멀쩡하네?”
“그럼 내가 죽은 줄 알았어?”
“기절한 줄 알았지. 연락을 안 받아서.”
“아......”
제임스는 핸드폰을 들어 전원을 켰다.
“글에 집중하고 싶어서 꺼놓은 걸 깜빡하고 있었네.”
메디슨은 일단 집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싸늘한 LA의 날씨에 비해 제임스의 집은 후끈해서 오히려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다 썼어?”
“응. [드래곤 마스터] 수정했어.”
피곤한지 커피를 연신 마시고 있었지만, 과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이사해서 그런지 글이 손에 잘 잡히나 보네?”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조금 외롭긴 하더라.”
“동물을 키워보는 건......”
“책임질 자신이 없어. 그나저나 누나는 지금 끝난 거야? 아직 퇴근 시간 아니지 않아?”
“요 며칠 동안 붙잡고 있던 일이 드디어 끝나서 빨리 퇴근할 수 있었지. 너 기절한 줄 알고 왔더니만 멀쩡하니 다행이네. 밥 먹었어?”
“아니. 안 그래도 식재료가 다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사오려고 했는데, 누나도 온 김에 그냥 밖에서 먹을까?”
“그러자. 오늘은 내가 살게.”
제임스는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가져갔다.
“기다려봐. 메일만 보내고 가자. 여기는 맛있는 한식당이 많아서 좋더라.”
“천천히 해. 아. 나도 커피 마신다?”
“캡슐 머신 있으니까 알아서 마셔.”
“진짜 별게 다 있네. 나도 공부 때려치우고 글이나 쓸 걸 그랬나.”
메디슨은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
다가오는 퇴근 시간을 기다리던 루시아는 갑자기 뜨는 새 메일 표시에 의아해하며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어?”
해당 메일에는 vip를 표시하는 별표가 떠올라 있었다.
루시아는 서둘러 메일을 확인했다.
“......이렇게 빠르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못해도 몇 주는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만에 도착한 수정본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퇴, 퇴근 시간이.....”
SC라스틱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제임스 작가가 보낸 원고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제임스 작가가 원고를 보낸다면, 일단 하던 것을 내버려 두고 원고를 확인해야 했다.
그게 SC라스틱에서 루시아에게 거듭 당부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제임스 작가가 보낸 원고를 읽는데 평균 3~4시간이 걸리다 보니 지금 같은 퇴근 시간에 확인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수, 숨기자.....’
루시아는 서둘러 메일 창을 끄려고 했지만, 루시아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스티븐이 이미 옆으로 와서 루시아의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히익!”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당황한 루시아를 신경도 쓰지 않고, 스티븐은 메일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제임스 작가님이 원고 보내주셨네? 바로 확인하자.”
“바, 바로요? 지금요?”
“응. 설마 작가님이 며칠 동안 고심해서 보내주신 수정본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
“그, 그게 그러니까요......”
오늘이 무슨 날인가.
일을 막 시작한 월요일도 아니고 내일이면 주말인 금요일이다.
제임스 작가의 소설을 아무리 좋아해도 불금, 그것도 야근이 많았던 이번 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날에 또 야근을 하게 생겼으니 루시아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물론 읽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빠져들 테지만, 운동을 가면 막상 열심히 해도 집에서 그 첫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싫어?”
“그건..... 아니에요.”
“마카롱 사줄게. 자자. 얼른 확인하자.”
“.....네.”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는 파일을 다운받았다.
그렇게 파일을 열고 글자를 읽기 시작한 루시아는 평소처럼 글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은 기본이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이건......’
침울하던 루시아는 온데간데없이 [드래곤 마스터]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르고, 별이 반짝이는 시간까지 루시아는 계속 내용을 탐독했다.
“대체.....”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최종 확인을 해야 하는 스티븐 또한 [드래곤 마스터 2부]를 읽고 있었다.
전부 다 퇴근하고 둘만 남은 상황이었지만, 그런 건 대수롭지 않았다.
또 한 번 마력에 빠져들었다.
경이롭다. 지혜롭다. 재미있다. 놀랍다라는 뻔하디뻔한 수식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싶었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의 그 여운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다.
‘진화.... 아니, 각성?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처음 [드래곤 마스터 1부 : 혼혈 드래곤]을 읽었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은 뇌리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울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쿠키처럼 그 감동은 절대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마스터 2부]를 보자마자 1부에서 느꼈던 그 감동의 여운이 새로운 욕망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다음 권......’
감동 따위는 욕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처럼 머릿속은 얼른 다음 권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글의 퀄리티가 올라갔어.’
더욱 매끄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어색한 부분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 보냈던 수정 원고에서는 내용의 어색한 부분도, 등장인물들의 디테일도 부족하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전면 수정하여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매끄럽게 이어나갔다.
완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드래곤 마스터 2부 : 블랙 드래곤의 진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재밌었다.
“후엥.....”
글에 집중하고 있는 스티븐의 귓가로 루시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글을 읽는 속도가 빠른 것도 있지만 먼저 읽기 시작했기에 루시아가 스티븐보다 뒷내용을 먼저 읽고 있었다.
“이렇게 끝내면 어떡해요오.... 흐엉.”
갑작스럽게 스포일러를 눈치채게 된 스티븐은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티븐과 루시아는 글을 다 읽은 시점이었다.
“크흠.”
스티븐은 루시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는 척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내용이 많이 바뀌었네요.”
“솔직히 전 원고도 굉장히 재밌어서 더 이상 바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도요. 기껏해야 내용이나 대화를 조금 수정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내용 자체는 똑같아. 다만, 내용을 더욱 디테일하게 하기 위해..... 쉽게 말해 영화 각색으로 생각하자면 다원적 각색을 한 느낌이네.”
처음으로 보냈던 원고를 다원적 각색, 즉 내용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영화에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는 것처럼 제임스 작가는 처음 내용을 내버려둔 상태로 또 다른 내용을 추가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대표님한테 보내드려야겠네. 이제 수정할 부분은 전혀 보이지가 않네. 오타 정도만 찾으면 될 것 같아.”
“네! 그럼 저 이제 집에 갈 수 있는 건가요?”
“응. 같이 퇴근하자. 나도 얼른 마누라 보고 싶다.”
스티븐과 루시아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
미국인들한테 나름 유명하다는 한국식 바베큐 무한리필 식당에 온 우리는 신나게 고기를 구워 먹었다.
김치나 다른 반찬들은 돈을 받지만 그래도 질 좋은 고기를 무한으로 즐길 수 있어서인지 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무한리필집에 가면 뭔가 고기 질이 안 좋다고 느껴지던데, 여기는 맛이 괜찮네. 아, 여기 냉면도 파네? 냉면도 시켜도 돼?”
“먹어. 그보다 어때? 글은 잘 써진 것 같아?”
상추쌈을 한 입 크게 입안에 집어넣으려던 나는 아까까지 수정했던 글을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름 괜찮게 써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