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에나 오디션
두 명의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오디션은 한 사람당 두 번의 연기를 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을 선정하는 일이다 보니, 케이 때와는 달리 더욱 신중을 가하기 위해 여러 번 연기를 시킬 생각이었다.
연기는 역할마다 세 번씩 시킬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리나입니다.”
에리나 카필드. 하이틴 영화에서 주로 나오며 보통 주연보다는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많이 하는 배우였다.
“연기는 에나 역할로 세 번, 구미호 역할로 세 번 있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되나요?”
“네!”
“그럼 우선 에나에게 여우 꼬리와 귀가 생겨 가족들로부터 도망가다가 케이를 마주치는 장면에 대해 1분 내외로 연기해주세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1분’이라는 것이다.
에나에게 여우 꼬리와 귀가 생겨 당황스러운 장면만으로도 1분은 모자랐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도망쳐 케이를 맞닥뜨리는 장면까지 보여주는 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즉, 머릿속에 스토리를 어떻게 진행시킬 건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이번 연기의 핵심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에리나는 힘차게 대답한 후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는 제법 볼 만하지만.....’
시간을 보니 가족들로부터 도망가는 장면까지 왔을 뿐인데 벌써 1분 10초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잘 봤습니다. 다음 연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아. 넵!”
딜런은 가차 없이 연기를 컷시키고 다음 연기로 넘어갔다.
“에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사악한 몬스터를 죽였을 때를 연기해주세요.”
이번에는 구미호 버전으로 연기를 시켰다.
여기서부터 에리나는 점점 연기를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역시 두 가지 버전을 동시에 연기하는 건 힘든가 보네.....’
에나로 감정을 잡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힘을 발휘하는 구미호로 다시 연기를 하라니.
그것도 감정을 추스를 수도 없는 짧은 시간에 말이다.
‘배우가 두 명이 필요한 이유인가..... 그렇게 되면 그 두 명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할 텐데...’
딜런이 원하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두 명의 배우가 호흡이 좋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제작에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가더라도 말이다.
“다음은 에나가 브레이셔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을 먹는 장면을 부탁드립니다.”
몬스터들이 먹는 음식은 기상천외했다.
브레이셔에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분명 있었지만 전부 에나의 입에 맞지 않았고,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에나가 한 일은 햄버거를 먹는 일이었다.
“다음은 몬스터의 힘으로 인간을 죽였던 장면을 연기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힘으로 몬스터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죽였던 장면을 연기시켰다.
그렇게 에리나의 연기가 끝나고 다음으로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두 씬이 남겨져 있었다.
“구미호인 에나가 [여우 구슬]을 케이한테 넘겨주어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기절하는 장면을 보여주세요.”
구미호와 인간의 경계선을 보여달라.
한 번에 두 가지 연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에리나는 성심성의껏 연기를 펼쳤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눈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네. 잘 봤습니다. 심사 결과는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씩씩하게 인사를 한 에리나가 나가자 우리는 곧바로 에리나의 연기를 평가했다.
“연기 자체는 좋았지만 뭐랄까..... 끌리지 않네요.”
“구미호 버전 연기가 너무 별로였어요. 그렇다고 에나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이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을 에리나의 평가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조연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조연에는 충분하지만, 주연에는 미치지 못하는 연기력이라는 것이 우리의 평가였다.
“다음 준비해주세요.”
우리는 쉬지 않고 오디션을 강행했다.
***
역할마다 세 번의 연기를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둘 중 어느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들 중에선 에나 혹은 구미호에 어울리는 연기를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연결이었다.
내 말대로 배우 한 명을 뽑든, 딜런의 말대로 배우 두 명을 뽑아 각각의 역할을 맡기든 그 두 역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양측 다 연기를 수월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현실과 이면의 세계를 서로 공감할 수 있겠죠.”
딜런이 두 가지 연기를 수월하게 하는 사람을 원하는 이유였다.
배우가 두 명이기에, 각자의 역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물론..... 이번 오디션에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두 역할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보였으면 하네요.”
그 말에 에드워드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임스 작가가 원하는 배우는 나왔나?”
“아직이네요. 그보다 선생님은 마음에 드는 배우가 있으셨나요?”
“내가 심사위원도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아나?”
“프로듀서 TV Show를 보니까, 음악 만드는 사람은 자신만의 뮤즈가 있다고 하던데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내가 무슨 디자이너인 줄 아는가? 음악은 자유로운 거라네, 누구 한 사람한테 갇혀 있으면 음악이 아니지. 나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음악을 줄 수 있어.”
“아, 그럼 쉽게 말해 지금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직 없다는 거죠?”
“크흠.”
딜런은 우리의 대화에 슬쩍 킥킥거리며 다음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어?”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음 사람은 뭐랄까.....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느껴지는 샴푸 향 같은 여자였다.
오디션장으로 들어오자마자 화사한 꽃향기가 사방에 퍼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여자였다.
‘.....올리비아 콜린스.’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TOP 10 안에 들어가는 여자였다.
지금까지 몸을 과도하게 움직이는 액션 영화에는 출연한 적이 없지만, 로맨스 드라마와 영화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하는 배우로 유명했다.
올리비아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외모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올리비아 콜린스라고 합니다. 오늘 오디션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름다운 외모나 실력은 좋지만, 이번 작품은 액션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있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 액션 배우가 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액션 자체가 불가능한 신체라 액션 배우가 되지 못한 건지 우리는 이 오디션으로 그녀를 판단해야 했다.
“우선 에나에게 여우 꼬리와 귀가 생겨 가족들로부터 도망가다가 케이를 만나는 장면을 1분 내외로 연기해주세요.”
다른 배우들한테도 시켰던 장면의 연기를 똑같이 부탁했다.
올리비아 곧바로 연기를 시작했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애절한 장면이어야 하는데 묘하게 우아했다.
그녀의 외모가 더욱 부각돼서 그런지 애절하고 심적으로 힘들어야 하는 장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연기는 굉장히 좋은데.....’
연기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시선은 자꾸 그녀의 외모를 좇아갔다.
여주인공이 심적으로 망가져야 하는 장면에서조차 눈에 담기는 건 어이없게도 그녀의 뽀얀 피부와 발간 입술이었다.
“음.....”
딜런 또한 문제를 파악했는지 아쉬운 신음을 냈다.
연기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가 문제였다.
이 오디션장에 있는 이들 모두 그녀의 외모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만, 그 여운이 그녀의 연기력으로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올리비아 씨한텐 다른 장면의 연기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애절한 장면이 아닌 더욱더 처절한 장면, 혹은 주인공이 힘들었을 때의 장면을 말이다.
“환경, 음식, 취향, 노래 모든 것이 인간과 다른 몬스터들 사이에서 버텨야 하는 에나의 모습을 연기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올리비아는 군말 없이 연기를 시작했다.
작중에서는 그리 비중이 높지 않은 장면이었다.
영화 내에서도 짤막하게 나올 정도로 몬스터의 세계에 적응하는 장면이었지만, 올리비아가 연기를 시작하자 그 생각이 바뀌었다.
‘뭔 인간이 저렇게 우아하냐......’
같은 사람이 맞나 착각할 정도로 연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고상했다.
마치 유럽 왕실 쪽 공주처럼 손끝부터 발끝까지 고귀함이 묻어나 있었다.
‘적응이 아니라 무슨.....’
마치 평민들의 세계에 적응하는 몰락한 공주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적응은커녕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로 군중을 지배하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올리비아의 연기는 그렇게 다가왔다.
“음......”
고작 두 번의 연기였지만, 딜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녀가 이 배역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나요?”
올리비아는 싱긋 아름답게 웃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예..... 본인도 알고 있으신 것 같네요.”
“탐나는 배역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상관없어요. 전 조연으로 출연해도 괜찮은걸요?”
“예?”
“저는 오늘 작가님을 보러 온 거니까요.”
그 말에 주변에서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감독님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쏠렸다.
“크, 크흠.”
열렬한 팬이라고 들었기에 딱히 소스라치게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저런 노골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배역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도 괜찮아요. 저한테 어울리는 역할도 [블랙 & 월드]에는 있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드라이어드 역에 어울리....죠.”
“역시 그렇죠?”
“네.”
자연과 나무를 수호하는 드라이어드는 아름다운 외모로 상대를 유혹하여 그 정기를 빨아들인다.
그와 반대로 인간을 싫어하기에 작중에서는 인간인 케이의 몸을 먹어치우기 위해 하는 캐릭터였다.
브레이셔의 중요한 한 축을 맡는 요괴다 보니 주연급 조연이었다.
“작가님 혹시 미팅이 끝나고 저와 잠시 만나주실 수 있으신가요?”
“휘유~”
올리비아의 말에 옆에 있던 에드워드 선생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만나면 다이애나한테 이를 거야.”
“......”
다이애나와 만나지 말라고 하셔 놓고.....
‘하지만 거절하는 게 맞지.’
괜히 둘이 이야기를 하다 괜한 스캔들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거절하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훗. 작가님이 상상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장담할게요.”
“음.....”
내가 고민하자 올리비아는 더욱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콜린 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
그녀가 어째서 콜린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작가님.”
올리비아가 웃으며 나가자 에드워드 선생님이 슬쩍 다가와서 물었다.
“콜린은 또 누구인가? 여자인가?”
“.....남자예요. 저를 뭐로 보시고 그러세요.”
“다이애나한테 꼬리치는 늑대.”
“아니, 제가 언제 꼬리쳤다고 그러세요, 감독님! 그저 다이애나가 팬이라서 서로 도운 것뿐이잖아요...!”
“그런 건 상관없네. 아무튼 그럼 저 유명 배우가 어째서 자네를 만나려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녀가 콜린에 대해 알고 있는지.
“자자. 그만하시고 이제 한 명 남았는데 마지막 오디션까지 보고 나서 대화하시죠? 많이 기다렸을 텐데.”
“지금까지 제임스 작가가 추천한 배우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다음 배우가 그 배우겠군?”
“그럴 거예요.”
우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번 블루스타게이트에서 봤던 엘라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