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에나 오디션 (2)
블루스타게이트에서 봤던 엘라와 현재의 엘라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과거에 없었던 독기가 서려 있었다.
“호오?”
에드워드 선생님은 그녀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엘라라고 합니다.”
엘라의 머리카락은 본래 은색이 아니라 금색이지만, 그 색이 옅어 은색에 가까웠다.
그 때문인지 오디션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네요.”
딜런도 인정할 정도로 엘라의 머리카락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작중 구미호처럼 말이죠.”
하얀색에 가까운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구미호다 보니 엘라가 겹쳐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보다 엘라라고 하면..... 과거에 ‘라틱 스쿨’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신 적 있으시죠?”
“네. 잠깐 단역으로 출연한 적 있어요.”
“그때는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염색하셨던 건가요?”
“머리카락 색이 너무 눈에 띈다고 염색을 하라고 하셨거든요.”
“하긴, 너무 튀기는 하네요.”
딜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엘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유명 영화에 출연한 알아주는 배우는 아니었다 보니 엘라에 대한 조사는 금방 끝났다.
‘어째서 제임스 작가님은 엘라 배우를 눈여겨보신 거지?’
은색의 머리카락만 빼면 어떤 점이 제임스의 눈에 들었던 건지 의아했다.
‘연기가 그렇게 좋은가?’
연기력이 좋다면 지금까지 안 뜬 것도 희한한 일일 텐데...
“일단 오디션을 시작하죠.”
엘라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작가는 빵 한 조각 먹는 걸로도 만 글자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제임스가 좌우명으로 새긴 말로 오직 캐서린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만 글자의 소설과 반대로 짧은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빵 한 조각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거나, 영상을 보거나,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1분 동안 무엇을 할 줄 알아야 할까?
작가가 짧은 시간 동안 긴 스토리를 글에 담을 줄 안다면, 배우들은 1분 동안 긴 스토리를 짧은 시간 안에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1분이라는 시간에 하루의 희로애락을 연기할 줄 알아야 명품 배우라는 말을 듣는다.
오늘 오디션을 보러 온 모든 배우들이 1분 동안 심사위원이 시킨 씬을 연기하였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리비아는 1분에 심사위원이 원하는 그 이상의 연기를 펼쳤다.’
만일 그녀한테서 느껴지는 과한 고상함만 아니었다면 올리비아가 에나의 배역을 따냈을 것이다.
‘올리비아와 비견되는 배우가 없어. 두 명을 뽑는 것도 무리야.’
이렇게 되면 화이트 워싱 논란이고 뭐고 간에 그 누구도 뽑을 수 없었다.
두 명의 배우를 뽑을 예정이었던 딜런조차도 만족스럽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력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두 명은커녕, 한 명이라도 이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두 가지 역할을 뛰어나게 할 수 있는 두 명의 배우는 이제 포기했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 두 가지 역할을 뛰어나게 할 수 있다면 CG를 통해서 얼굴을 약간 조절하는 걸로 내적 타협을 본 상태였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아 고심하던 두 남자의 앞에서 엘라가 연기를 시작했다.
‘......’
딜런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기를 시작한 단 1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처절하지만 그 속에서 행복하고, 기뻐하는.
에나라는 캐릭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엘라의 연기는 에나와 동일시될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았다.
딜런은 그제야 어째서 제임스가 엘라라는 여인을 이번 배우로 적극 추천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님이 엘라를 보고 [블랙 & 월드]를 적은 건 아닐 텐데?’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엘라는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한테 드러내고 있었다.
자기가 아니면 이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가 없다는 듯 에나 자체를 보여주었다.
단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엘라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구미호인 에나가 [여우 구슬]을 케이한테 넘겨주어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기절하는 장면을...... 보여주세요.”
묻혀있던 보석을 찾은 트레져 헌터가 이런 느낌일까?
영화에 딱 맞는 배우를 찾게 된 것 같은 느낌에 딜런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딜런과 마찬가지로 나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엘라의 가장 큰 약점은 스토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었지.’
자신한테 주어진 대본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파악하지 못하여, 매우 편협한 연기를 구사한다는 게 그녀의 단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주연을 차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짧게 출연하는 단역이나 단역 수준에 가까운 조연 정도만 맡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엘라는 과거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연기를 하고 있어.’
저번 [사막의 전갈] 오디션 때도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를 파악하고 스토리에 맞게 연기를 하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과거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고 연구하고 고민했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으리라.
“허억.... 허억.....”
연기가 끝나자 그녀는 에나에서 엘라로 돌아와 숨을 헐떡였다.
올리비아와는 달리 그녀는 주어진 모든 상황을 연기했고, 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자신한테 주어진 ‘6분’에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다.
-짝짝짝짝짝짝짝!!!!!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던 심사위원들과 감독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박수가 서서히 잠잠해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케이의 역할에는 시간제한이 없었지만, 에나의 역할에는 1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나의 역할이 1인 2역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에나와 구미호를 넘나드는 역할이기 때문에 1인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두 번으로 나누어지죠, 그러니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감정을 보여줘야 하고요.”
“예......”
엘라는 나와의 대화에 긴장한 듯 보였다.
“그래서 두 명의 배우를 구하기로 했었습니다. 바뀌는 캐릭터마다 감정을 온전히 넣을 수 있게요. 하지만......”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제임스의 말에 엘라는 ‘이번에도 역시.’라는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엘라가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봤다.
내 말에 딜런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이 배역에는 엘라 씨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죠. 다만, 혼자서 2역을 해낸다는 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엘라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화이트 워싱..... 솔직히 이제는 그런 논란을 잠재울만한 더 재밌는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엘라.”
엘라의 연기는 화이트 워싱 논란이고 뭐고 모든 게 다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연기와 탄탄한 스토리, 거기에 약간의 CG라면 그런 논란을 최대한 잠재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현장에서 캐스팅 확정을 지어버리는 건 또 오랜만이네요.”
엘라의 힘찬 목소리에 나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늦게 시작한 오디션이라 오디션이 끝나는 것도 굉장히 오래 걸렸다.
거기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헤어지는 인사까지 마무리하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끄응......”
하루 종일 밖에서 기다렸던 메디슨 누나는 나를 만나자마자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구나.”
“수고했어.”
“뭐... 월급 받고 놀게 해주는 거니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제임스 작가님.”
오늘 내내 미션 컴퍼니를 구경했던 메디슨은 몸이 굳었는지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 어딨어?”
“올리비아?”
“응.”
“같이 밥 먹자고 레스토랑으로 오라더라. 위치는 아니까 차에 타.”
우리는 차에 타고 올리비아가 있는 레스토랑을 향해 달렸다.
“일은 잘 끝났어?”
“어찌저찌..... 될 것 같기도 해.”
“에드워드 선생님한테 인사는 잘했고?”
“어. 나중에 한번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어.”
“우리 집이라면..... 몬태나주에 있는 집을 말하는 거야?”
“응. 선생님이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거든. 나중에 다이애나와 연락해봐야지.”
“다이애나? 누구야?”
“에드워드 선생님 손녀인데 가끔 연락하거든. 내 소설을 보고 노래도 만들어줬어.”
“헤에......”
누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혹시 마음에 둔 여자야?”
“아니야.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된 애한테 무슨 소리야?”
“아. 그래? 난 또 내심 기대했네.”
“나 말고 누나나 걱정하지? 누나 남친도 없잖아.”
“자기는 여친 있던 것처럼 말하네.”
“크흠.”
“아무튼 도착했네. 이곳이야.”
“여긴.....”
“3성급 레스토랑이네.”
“......”
호텔처럼 높은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약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누나도 같이 먹게?”
“그럼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너 밥 먹는 것도 밖에서 기다리라고?”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당황하자 누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 매니저라는 사람과 먹기로 했으니까. 둘이 대화하면서 천천히 식사해.”
“.....참고로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게 아니긴? 우리 제임스 참 많이 컸네? 예전에 누나 좋다고 쫄쫄 쫓아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누나는 슬슬 결혼 생각해야 할 나이 아니야?”
“닥쳐.”
나랑 10살 차이가 날 정도로 꽤 터울이 있었기 때문에 슬슬 결혼하라고 가족이 눈치 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빌딩의 맨 꼭대기 층에 도달했다.
“두 분이신가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이 우리한테 다가왔다.
“아뇨. 예약이 되어 있을 텐데요.”
“예약되어있는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콜린스예요.”
“아. 이쪽으로 오시죠.”
종업원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데려갔다.
야경이 훤히 보이는 방에는 식탁 테이블이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올리비아와 그녀의 매니저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안녕하세요 콜린스....”
“올리비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올리비아.”
나는 그녀와 인사를 하고 슬쩍 그녀의 맞은편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식사는 제가 알아서 여러 개 시켰어요. 여기 단골이거든요.”
“네.... 뭐. 그럼 식사하기 전에 어째서 콜린을 알고 있는지부터 말씀해주시겠어요?”
“급할 거 없는데.....”
올리비아는 와인 잔에 따라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나인 드래곤] 최우수회원 중 한 명이거든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