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교수형
“살인 사건이면서도 살인 사건이 아니게 되는 살인 사건도 있단 말이지.”
복잡한 말이지만 실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술 마시고, 심신미약 상태로 저지르면 살인 사건만큼의 형량을 주지 않지.’
이 외에도 살인 사건만큼의 형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범죄자도 천재로 만들자. 법에 관해 빠삭한 범죄자로 말이야.”
다크 히어로의 최대 적은 천재 빌런이어야만 긴장감을 몇 배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음.....”
그렇지만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한 가지 정해야 할 것이 있었다.
‘콜린한테 들려오는 목소리는 콜린 그 자체라는 거야. 그의 정체가 악마도, 천사도 아닌 그 자신이라는 건 계속 설정으로 가져가야 해.’
즉, 소리의 주인이 알고 있는 사실은 콜린도 본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리가 편리한 것도 있지만, 콜린은 소리의 주인이 자신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 내용을 풀이하는 데 더 좋겠지.’
그렇게 하려면 글에 계속 콜린이 목소리 주인과 다투는 장면을 주로 넣어주어야 한다.
‘반대로 목소리는 콜린과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장면을 넣어주어야겠지.’
일단 주인공의 성격과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이후에 벌어지는 범죄행위에 대해선 더 생각해봐야 했다.
“[그건......] 다음엔 어떤 식으로 전개하는 게 좋으려나......?”
소리의 주인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를 먼저 생각해봐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부모가 죽는 스토리인데...... 다만, 여기서 범죄의 천재성을 보여주자.”
잠시 고민한 나는 키보드를 다시 타이핑했다.
***
[.....당연히 전부 스스로 죽은 거지.]
‘......’
소리의 말에 콜린은 분만실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범행은 지금으로부터 하루 전 17시 44분에 일어났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피해자들끼리의 관계를 찾는 중이며, 아직까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으로 파악......’
‘......’
옆에 있는 관계자가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콜린의 머릿속은 오직 소리의 주인이 한 말뿐이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분만실은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
[왜 부르지?]
‘네가 자살이라고 단정 지은 이유가 저것 때문이지?’
[맞아.]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간에 단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시신들의 목에 매달려 있던 줄.
그 줄이 묶여있어야 할 천장이 어딘가 이상했다.
[너도 몇 번이나 봤잖아? 사람은 ‘삶’이라는 것에 집착해. 물에 빠져 뒤진 인간이든, 집을 불태워 자살한 인간이든 모두가 다 ‘삶에 다시 집착’하지. 인간은 죽음을 각오해도 죽음이 실제 다가오면 망설이게 되어있어.]
소리의 말대로 지금까지 봤던 자살한 시신들한테선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바로 고통 때문이었다.
질식해오는 고통, 물이 폐 안으로 들어오는 고통,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 등.
사람들은 괴로움을 느끼면 반사적으로 삶을 갈구한다.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짧은 순간에 죽으려면 목뼈가 부서지는 방법밖에 없어. 그러려면 목을 매달고 점프를 했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더럽지 않아?]
줄이 묶여있던 천장에는 ‘질식하는 괴로움 때문에 생기는 흔적’이 너무 많이 보였다.
‘교수형을 당한 건 아니야.’
갑작스럽게 목에 충격이 가해지는 교수형 같은 경우에는 목뼈가 부서지면서 생명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수형이라기엔 고통의 자국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살이라 단정 짓진 못할 텐데?’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왜 계속 나한테 묻는 거지?]
소리의 말에 콜린은 줄이 묶여있던 흔적을 유심히 살폈다.
‘시신들 발밑에 신생아가 있었다고?’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부모로 추정되는 두 명의 발밑으로 신생아가 있었습니다. 총 15명의 신생아가 있었죠.’
‘살아 있던가?’
‘그렇습니다.’
‘이상한 부분은 없었나? 예를 들면 신생아 치고는 너무 조용했다든지.’
‘그런 부분은 없었습니다만...... 증인한테 다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됐어.’
‘예?’
콜린은 말없이 상상을 시작했다.
‘신생아, 부모, 자살... 이라...’
이내 생각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신생아를 두고 부모의 생명을 저울질한 건가.’
‘그, 그게 무슨......’
‘간단히 말하지...... 자신의 아이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죽을 것인지 부모한테 선택시킨 거다.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지키겠다는 선택을 했지만...... 목을 매달고 단번에 죽으려면 갑작스럽게 발밑이 사라져야 해. 그래야 목뼈가 부서지지. 하지만, 발밑에 아이가 있으니 부모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죽었겠어.......’
‘자, 잠깐만요. 더욱 고통스럽게라니요? 그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짧은 시간에...... 목을 매달아도 목뼈가 부서지지 않으면 사람은 금방 죽지 않잖아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설마......’
‘제한 시간 안에 부모가 죽지 않으면 신생아를 죽인다고 협박하면 돼. 그럼 부모들은 목을 매단 상태로 제자리에서 계속 점프를 했을 거야. 목뼈가 얼른 부서지게 말이야....... 하지만 그보다도.’
[낄낄낄낄...... 얼른 물어봐. 여기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말이야.]
소리의 말에 콜린은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지금 말한 30명뿐인지부터 알아봐.’
***
하루 동안 꼬박 글을 써서인지 몸은 아예 만신창이였다.
“끄응..... 스트레칭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어서 그런가..... 몸이 말이 아니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 마디가 삐꺽거렸다.
화요일 오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수요일 오후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굳어진 관절과 근육을 풀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뿌드득!
관절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몸은 여전히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제 진짜 운동을..... 해야겠지?”
몬태나주에 있을 때는 그래도 거리를 걷거나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며 몸을 풀었지만, 이곳에서는 할 게 없으니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누나가 필라테스를 해보라고 했던가?’
이 건물에는 헬스장이 있으니 거기서 운영하는 필라테스를 해보라고 권유했던 기억이 났다.
“필라테스가 정확히 뭐지?”
이상한 기구에 매달려 괴로워하는 영상을 보긴 봤지만, 정확히 어떤 식의 운동인지는 알지 못했다.
안마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필라테스에 대해 알아봤다.
‘남성 포로들을 위한 재활치료에서 요즘은 여성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인가..... 그럼 남자들은 안 하는 건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남자들도 많이 하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누나가 추천해 준 거겠지.
“스트레스 완화, 척추 건강과 올바른 자세, 신체 밸런스, 잔근육 강화, 허리 강화, 유연성이라......”
생각해보면 전부 나한테 필요한 거 아닌가?
‘글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척추도 안 좋아졌고, 다리 꼬고 글 쓴 적도 많으니 신체 밸런스도 안 맞을 테고, 허리도 요즘 슬슬 아파오고......’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나한테 딱 적합한 운동이었다.
“한번 상담이나 가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몇십 층 아래에 있는 헬스장이다 보니 엘리베이터로 내려가기만 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몸이 굳어서 글을 계속 쓰는 건 무리니까.’
나는 안마의자에서 일어나 가벼운 옷차림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은 2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헬스장 특유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땀 냄새가 심하지는 않네.’
헬스장 냄새를 먼저 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국 헬스장은 비싼 기구를 사용하지만, 사용하고 나면 그냥 그대로 닦지 않고 내버려 두는 곳이 허다했다.
여기서 더 문제인 건 땅덩어리가 넓어서인지 헬스장이 적었고,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청소도 개판이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헬스장에 갈 바에 집에 홈짐을 차려놓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쉽게 말해 냄새가 많이 나면 좋지 않은 헬스장, 냄새가 괜찮으면 괜찮은 헬스장이라는 의미였다.
‘보통 이런 곳은 개인 회원제일 텐데.’
개인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 헬스장은 가격이 비쌌다.
거기에 오토 페이 시스템이라 매달 돈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는 시스템이었고, 회원제는 등급마다 약정이나 계약도 달랐다.
‘일단 들어가 보자.’
안쪽으로 들어가니 계산대 앞에 근육이 우락부락한 흑인 남성이 앉아있었다.
“어쩐 일이시죠?”
“아. 전단지 보고 왔는데요. 등록 좀 하려고요.”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은 힐끗 나를 바라보더니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 건물에 살고 계시면 할인이 되거든요? 주소하고, 나이, 이름 좀 알려주시겠어요?”
헬스장 등록에 필요한 정보를 듣고, 멤버십에 관한 조항을 들은 나는, 약정을 언제든지 정지할 수 있는 멤버십을 골랐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지...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
그렇게 헬스장 등록을 끝내고 난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슬쩍 직원한테 물어봤다.
“그나저나 남자들도 필라테스를 하기도 하나요?”
“과거에는 거의 없었는데 요즘에는 몸에 좋은 게 알려졌는지 많이 하기도 합니다. 다만, 보통 강사분이 여성분이셔서 부끄러워하시는 분들이 많죠.”
“그렇게 부끄럽나요?”
“뭐어...... 방귀도 낄 수도 있고, 고함도 지르고, 심한 경우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발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부끄러워서 중도에 그만두시는 분도 많습니다.”
“혹시 남성 강사분은.....”
“없습니다. 정 여성 강사분이 싫으시면 뮤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따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물론 어중간하게 따라 하다간 척추가 나갈 수 있겠지만요.”
“......수강료가 얼마죠?”
역시 운동은 전문가한테 받아야지.
나는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필라테스까지 등록했다.
“지금 딱 빈 시간이라 해보실 수 있는데 당장 해보시겠어요?”
“원래 수업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나요?”
“어차피 강사님이 이 건물에 사시거든요.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수업을 등록하신 분이 오시면 내려오십니다.”
“아.....”
“물론 저녁 10시 전까지만 가능하고, 손님이 등록하신 김에 체험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다음부터는 수업 시간을 정한 후에 수업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좀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 쉬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안내해준 휴식실 안으로 들어갔다.
***
필라테스 강사를 하고 있는 아리아나가 가장 좋아하는 건 운동을 마친 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
강의로 지친 몸을 목욕으로 개운하게 씻어내고, 커피로 머리를 맑게 한 다음 음악으로 귀를 막는다.
그렇게 맑아진 머리로 책을 읽으면, 책 내용이 더욱 세세하게 들어오기에 좋아하는 루틴이었다.
-띠리리리리!
클래식 음악 사이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 딱 재밌을 타이밍인데...!”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에 알게 된 유명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한 번 보고 나서 푹 빠져 버렸다.
벌써 5번 이상 읽고 있는데도 읽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재밌었다.
그런데 방해를 하다니.
아리아나는 어차피 집에 혼자 있기에 짜증 난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내려와. 필라테스 등록하신 분이 수업받고 싶으시대.
“어차피 몇 번 나오고 안 나올 게 뻔한데 뭐.”
필라테스 강사를 하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하지만 대부분이 두세 번 정도 나온 뒤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도전하지만 온몸의 근육을 섬세하게 찢어버리는 필라테스의 고통을 알게 되면 그 이후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금방 갈게.”
아리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고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