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양장본 사인회 (3)
사인회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 사인을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오셨고,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분들도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작가님의 소설이 그분들한테 큰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루시아는 직원들이 사 온 햄버거를 가지고 나한테 다가왔다.
“제 소설이요?”
“네. 아. 여기 햄버거요.”
“잘 먹을게요.”
루시아가 주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을 곰곰이 되돌이켜 봤다.
나와 만나서 기쁘다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들, 양장본을 가지게 되어 함박웃음을 짓던 사람들.
‘내 소설이 도움이 된다고.....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 소설을 읽고 좋아해 주셨으면 그걸로 충분해.’
설사 그 사람이 장애인이든, 노인이든, 다른 인종이든 그런 건 나한테 전혀 상관없었다.
나한테 중요한 건 그저 그 사람이 내 소설을 읽고 좋아해 준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
시간은 계속 흐르고 흘렀다.
사인회도 다행히 별 탈 없이 진행 중이었다.
중간쯤에 자신도 양장본을 가지고 싶다고 강제로 사인회장에 들어오려던 사람이 있는 것 빼고는 순조로웠다.
‘별로 피곤하지가 않네.’
사인회가 끝나자마자 또 내일을 위해 사인을 기계처럼 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늦은 시간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양장본을 전해주고 나서야 오늘 사인회는 끝이 났다.
“수고하셨어요!”
“저분이 마지막인가요?”
“네!”
“후우.....”
그냥 서서 양장본을 전해주고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이다 보니 몸 자체는 지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또 사인을 해야 하지만.’
뭐. 그래도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서점 할아버지가 커피를 들고 나한테 다가왔다.
“수고했네.”
“뭘요.”
나는 뻐근한 손을 주무르며 할아버지가 준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따뜻한 커피 향이 몸 안 구석구석을 침투하자 서서히 몸이 노곤해져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은 이미 지쳐있었고 그저 팬분들과 만난 즐거움과 긴장감 때문에 내 몸이 지금까지 피로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지금부터 또 사인을 해야겠죠?”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만...... 흠.”
내 말에 스티븐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아무래도 나한테 줄 커피였던 것 같지만 이미 내 손에 커피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루시아한테 커피를 건넸다.
“아무래도 작가님 몸이 상당히 피로해 보이네요.”
“그간 계속 키보드만 두들겼으니 손목에는 힘이 없네요. 하하.”
“이건 문제군요......”
보통 1만 권 정도의 사인이라면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할 때나 가능한 수량이었다.
각 나라마다 사인을 해주고, 호텔과 비행기 등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기에 제임스 작가처럼 단기간에 힘들진 않다.
“지금 체력은 있으십니까?”
“아예 없지는 않은데..... 사인을 하기엔 조금 버겁기는 하네요.”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주무시고, 내일 새벽부터 하시는 게 편하실 것 같군요. 그리고 오늘처럼 서서 양장본을 주는 것보단 앉아서 양장본을 주시는 게 체력적으로 좋을 듯싶습니다.”
냉철한 스티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밥은 먹고 가죠. 모두 고생하셨는데 제가 살게요.”
“아뇨. 대표님한테 법인카드 받아왔습니다. 저녁은 SC라스틱 측에서 사겠습니다.”
“그럼 얼른 정리하죠. 아.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실래요?”
“손자 보러 가야 하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못 말리신다.
내일은 다른 서점에서 사인회를 진행하기에 직원들은 주섬주섬 현장을 정리했고, 나도 도울까 했지만 차라리 그 체력을 아껴 사인을 하는 게 좋다는 루시아의 말에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인을 쉬운 걸로 할걸.’
Dragon two는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사인이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사인을 간단하게 만들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스포츠 선수들 사인을 보면 어떤 건 굉장히 정성스러워도 어떤 격투기 선수는 대충 동그라미만 그려주던데...
쩝.
‘그래도 의미가 있는 게 좋지.’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떼우고 있을 때 정리를 끝낸 루시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작가님! 얼른 밥 먹으러 가요!”
“네네. 알겠어요.”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
SC라스틱 측에서 나를 위해 이미 저녁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기에 근처에 있는 Korea BBQ집으로 향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과거에 Korea BBQ집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좌석 몇몇 곳에 아시아인이 앉아있는 정도였지만, 이번에 들어온 식당에는 인종 상관없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예약 좌석이라 적힌 곳에 앉았다.
‘비싸네.’
메뉴판을 보니 내 예상보다 비싼 가게였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가격만큼 맛있는 식당인 것 같았다.
“저. Korea BBQ 처음 먹어봐요!”
“저도 처음입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루시아와 내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은 Korea BBQ가 처음인지 살짝 설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메뉴판에 있었다.
‘냉면이 무슨 $15나 하네.’
한화로 대략 17,000원 정도의 냉면이라니.... 무슨 금가루를 뿌린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있을 때 가장 비쌌던 냉면집도 기껏해야 만 원 정도였는데.’
여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한국에 있는 냉면집보다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작가님 Korea BBQ는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하나요?”
“......”
“.....작가님?”
“......”
“작가님?”
“네? 아.... 네.”
메뉴판을 너무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스티븐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메뉴판 좀 보느라 못 들었네요. 뭐라고 하셨죠?”
“저희 직원들이 Korea BBQ가 처음인데, 혹시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하는지 방법이 있을까요?”
“아..... 그거야 뭐.”
군대에서 동기들하고 같이 나가면 항상 찾는 식당이 있었다.
무한리필.
단돈 3만 원이면 소고기부터 돼지고기, 닭고기에 냉면에 밥까지 주는 혜자스러운 느낌만 주는 식당.
막상 가면 고기 상태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지만 그래도 한국인 동기들 덕분에 어떤 식으로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생고기부터 구워 먹어요. 양념부터 먹으면 생고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까요. 음.....”
고기 종류들은 하나같이 맛있는 것들뿐이었지만, 처음 오는 사람들은 돼지고기 부위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헷갈릴 수 있었다.
“전부 처음이시면 차라리 제가 시켜드릴까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아. 그러면 그래 주시겠습니까?”
“네. 잠시만요.....”
나는 다시 메뉴판을 바라보며 팔을 들었다.
그러자 한쪽에서 메뉴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남자 직원이 우리한테 다가왔다.
“주문은 정하셨나요?”
“네. 여기 허브 통삼겹살 5인분 먼저 주시고요. 거의 다 먹었을 때 양념갈비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종합 소스로 부탁드립니다.”
“쌈은 괜찮으신가요?”
“아. 모둠 쌈으로 주세요. 그리고 술은.... 와인하고 막걸리. 그리고 소주로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메뉴를 다 적은 직원이 나한테 힐끗 시선을 보냈다.
지갑을 꺼내 직원한테 지폐를 건네자 남자 직원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떠났다.
보통은 식사를 다 하고 주지만 이곳은 미리 팁을 건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술은 한국 술하고 와인을 시켰는데 괜찮으실까요?”
“저, 저! Makgeolli 좋아해요!”
“정말요?”
루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네! 한국 친구랑 마신 적이 있어서요! 예전에 한국에 간 적도 있고요!”
“......정말요?”
“대학 친구가 한국인이라서요. 헤헤.”
“전혀 몰랐네요.”
“헤헤.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루시아가 한국하고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스티븐도 루시아가 한국하고 인연이 있던 게 뜻밖인지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Korea BBQ 안 드셔보셨어요?”
“네. 2박 3일 여행이었고, Korea BBQ보다는 Korea Chicken을 많이 먹었어요. Tteokbokki도 많이 먹었는데 저한테 조금 매웠지만요.”
“떡볶이도 먹어봤어요?”
“네!”
저번에 에드워드 선생님을 만나러 뉴욕에 갔을 때 루시아가 생각보다 한국 음식을 많이 알았던 게 기억났다.
순두부찌개나 콘도그 정도는 요즘 SNS상으로 유명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그 이후에도 한국 음식에 관해 뭐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당시에는 피곤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에 관심이 없다면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스티븐도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번 몬태나주에 있는 우리 집에 왔을 때 스티븐도 친구 중에 한국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네. 있습니다. 정확히는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게 맞겠군요. 미국에서 살다시피 하던 녀석입니다.”
“그분하고 한국 음식 안 드셔보셨나요?”
“하하. 그 녀석 집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거기서 Bulgogi라는 음식은 먹어봤습니다.”
“두 분 다 Korea BBQ가 처음이시면 약간 충격받으실 수 있으시겠네요.”
“예?”
“보시면 아실 거예요.”
곧이어 직원이 숯과 불판을 가져왔다.
***
-치이이익.....!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에 스티븐은 불판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래서 앞치마가 있는 거군요.”
기름이 튀지 않게 앞치마를 입은 상태로, 직원이 자르고 있는 고기를 바라봤다.
미리 팁을 건넸기 때문인지 직원은 굉장히 친절하게 고기를 구워주었다.
“그 자리에서 구운 다음에 집게와 가위로 고기를 자른다..... 말로만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재밌네요.”
고기가 다 구워지고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계속 대화를 나눴다.
외국의 문화를 듣는 게 흥미로운지 스티븐은 궁금한 점을 나한테 연신 물어봤고, 나 또한 스티븐한테 최대한 정성스럽게 답을 해주었다.
딱히 거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분위기가 다운되지 않게 노력하는 느낌이라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니 스티븐이 서서히 본론을 꺼냈다.
“외국의 문화를 들으니 역시 재밌습니다. 하하..... 외국 이야기가 나왔으니 해외 진출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 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원래 사인회가 끝날 때쯤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이왕 이렇게 대화하는 김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말씀해주세요.”
“해외 진출은 아마 내년 1월쯤에 시작할 것 같습니다.”
“1월이라면......”
“[사막의 전갈] 영화가 개봉한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내 인지도는 미국에 국한되다 보니, [사막의 전갈]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해외 진출의 성적이 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