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품평
오랜만에 돌아온 몬태나주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겨울 왕국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우와아아......”
다이애나와 에드워드 선생님은 차에서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깨끗한 눈 덮인 산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메디슨 누나와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눈이 많이 왔네.”
“그러게. 치우는데 힘들었겠어.”
아름다운 풍경도 한두 번 봐야지, 몇 번이고 보다 보니 이제는 질렸고 오히려 산에 쌓인 눈을 보며 추위를 예측할 정도였다.
우리는 신발에 쌓인 눈을 털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신발은 벗고 들어가나?”
“네. 슬리퍼를 신고 가면 괜찮아요.”
나는 문 앞에 놓여있는 슬리퍼를 선생님 발 앞에 가져갔다.
솜이 가득한 슬리퍼라 그런지 신발을 벗고 있어도 따뜻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음식을 준비하는 도중에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에드워드라고 하네.”
“다, 다이애나 잭슨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다이애나라고 불러주세요.”
“어머. 제시 김이라고 해요.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안히 계시다 가세요. 그보다 다들 밥 아직이시죠? 음식 준비 중이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 저도 도와드릴게요!”
“괜찮아요. 손님인데 편안히 있으세요. 어차피 다 끝났거든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나는 팡이를 찾았다.
“팡이야. 어딨니?”
보통 때라면 팡이 이름만 불러도 달려왔을 텐데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엄마한테 어딨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 팡이 어딨어요?”
“밥 먹고 동물 병원 좀 다녀와.”
“네 갑자기요?”
“아빠가 나간 김에 중성화시키러 보냈다.”
“......!”
그 말에 같이 들어왔던 아빠가 뜨악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
“별로 안 걸린다더라. 예약도 안 하고 갔는데 그냥 해주시겠데. 중성화한 다음에 상태도 봐야 하니 한 4시간 정도 걸린다더라. 그러니까 밥 먹고 갔다 와.”
“......”
예전부터 엄마가 결단력이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빠 사업이 망한 이후로 미국에 오는 것도 엄마가 바로 행동에 옮겨서 가능했다고 들었는데, 한 고양이의 인생을 이렇게 빠르게 결정할지는 몰랐다.
“......나도 모르겠다.”
“화 안 내?”
“이미 쨌을 거 아니야? 다시 복구시킬 수도 없는 걸 어떡해?”
이미 뺀 걸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빠는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앉았다.
‘우리 불쌍한 팡이......’
내가 집에 있을 때도 한참 발정기 시즌이라 여기저기 오줌을 갈기고 다녔었다.
그래도 막상 중성화를 시켜 고자가 될 팡이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너무 아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밥 먹어라. 오랜만에 갈비찜 했으니까 많이 먹어!”
“네!”
갈비찜은 못 참지.
***
식사를 시작하고 갑자기 아빠는 어디선가 술을 한가득 가져왔다.
“에드워드 선생님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좀 많이 챙겨놨습니다.”
“으, 응?”
박스 안에 있는 독한 술들을 보자 에드워드 선생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저희 집안이 대대로 술을 잘해서 잘 됐습니다! 하하! 자자 한 잔 받으시죠.”
아빠는 500cc 맥주컵을 가져와 그곳에 보드카를 잔뜩 따랐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 선생님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아시죠? 아. 당신도 한잔할래?”
“그럴까요? 그럼 가볍게 한 잔만 할게요.”
그러더니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술을 가득 따랐다.
“너도 한잔할 거냐?”
“.....아빠. 다른 사람들한테 그러면 진짜 죽어요.”
어린 시절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술꾼이었던 아빠와 엄마는 이곳으로 처음 이사 온 날 고모부와 함께 술을 마셨다.
한국인 특성상 술을 마시면 끝까지 가다 보니 고모부도 그 장단을 맞춰주려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결국 기절했었다.
“아. 이런 실수를 했네. 작은 잔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닐세.”
그 말이 에드워드 선생님을 자극시켰는지 선생님은 작은 컵을 거절하셨다.
“하, 할아버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정도는 거뜬하니까.”
잔에 따르자마자 풍겨오는 독한 알코올 냄새에 다이애나도 뭔가 불안함을 감지했다.
“용일아 너는 어떻게 할래?”
“지금부터 뻗어있기 싫어요. 다이애나 양 마을 구경도 시켜줘야 하니까요.”
“그래? 그럼 우리끼리 마셔야겠네.”
그러더니 아빠는 보드카를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쓰읍.....
보드카에서는 역한 향이 풍기기에 술을 마시자마자 향이 강한 안주를 먹어 그 향을 최대한으로 억제시켜야 한다.
“.......”
에드워드 선생님도 이에 질세라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게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꽤 괜찮습니다. 하하하하!”
옆을 보니 엄마도 이미 한잔했는지 잔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탁.
술을 전부 들이켠 선생님의 얼굴엔 자신만만함이 가득했지만, 이어지는 아빠의 행동에 다시 어두워졌다.
“술을 좋아하신다는 말이 사실이셨네. 자자. 한 잔 더 쭈욱 드세요.”
잔이 비기가 무섭게 잔에 술을 채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다이애나한테 말했다.
“다이애나 동네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셨죠?”
“아..... 네!”
“지금 가실래요? 아무래도 이 자리가 파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거든요.”
마침 다이애나도 밥을 다 먹은 상태에서 뻘쭘하게 식탁에 앉아있었기에 서둘러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새벽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집에 도착한 시간은 기껏해야 오후 1시 정도였다.
밥을 다 먹고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있는 터라 다이애나한테 마을 구경을 시켜주었다.
“뭐랄까..... 제가 생각했던 시골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발전이 덜 되어서 그런 걸 거예요.”
시골이라고 해도 근처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이 있다면 그 근처 마을의 질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곳은 천연자연이 많은 곳이라 발전이 많이 안 되어 있었다.
몬태나주도 굉장히 넓기에 어느 곳은 웬만한 도시처럼 발전이 되어 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동네는 발전이 더디었다.
“후하~! 그래도 공기는 정말 깨끗해요!”
“하하 유일한 장점이죠.”
나는 다이애나를 데리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딱히 대단할 게 없는 마을이지만, 그래도 도심 속에서 살고 있는 다이애나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한 것 같았다.
“아! 작가님 혹시 북 페스티벌에서 저희가 공연하신 거 보셨나요?”
“네. 뮤튜브에서 봤어요. 악기를 정말 잘 다루시는 것 같더라고요.”
“헤헤. 그렇게 잘 다루는 건 아니에요. 저희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다루시는 걸 보면 항상 제가 모자라다는 걸 느끼는걸요?”
“......에드워드 선생님의 친구분들이면 그럴 만하죠.”
전설의 친우분들 또한 각자가 또 다른 전설이라 불린다.
그런 분들과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근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제 친구 집에 가고 있어요. 캐서린 집에 가고 있는 건데 기억하시나요?”
“아! 그 북 페스티벌에 같이 오셨던.....?”
“네. 맞아요. 아. 저기 보이네요.”
우리는 금세 월리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월리의 어머님이 나타났다.
“어머 제임스? 집에 돌아온 거니?”
“네. 이번 주만 이곳에 있을 예정이에요. 혹시 캐서린하고 월리 있나요?”
“캐서린은 지금 글 쓰느라 방에 처박혀 있고, 월리는 공부하느라 책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데 누굴 꺼내줄까?”
“.....캐서린이요.”
“그럼 잠시 들어와 있을래? 근데 옆에 있는 아가씨는 누구니?”
“음..... 제 지인 분의 손녀세요.”
다이애나는 캐서린 어머니의 거친 목소리에 당황하며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다이애나라고 합니다!”
“어머.....! 꼭 내 어렸을 때 보는 것 같네 예뻐라..... 추운데 얼른 들어오세요.”
“네!”
우리는 월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핫초코 좋아하시나요?”
“네! 좋아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핫초코 타다 줄게요.”
“저는 커피.....”
“이번에 맛있는 코코아 가루를 샀거든요. 조금만 기다리렴.”
내 말을 가볍게 씹은 아주머니는 그대로 주방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캐서린이 2층에서 내려왔다.
“으으..... 무슨 일이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머리에는 밴드를 쓰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내려오는 캐서린의 모습에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글이 또 안 써지나 보네.”
“작가가 늘 글이 잘 써지는 게 이상한 거라며.”
“그것도 그런데...... 너 살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식단 조절하고 있어.”
살쪘다는 말에 화도 내지 않을 정도로 캐서린의 모습은 딱 봐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오빠는 안 불러?”
“공부하고 있다며? 저녁에나 불러야지.”
“그럼 나는 왜 불렀어?”
“약속했잖아?”
“약속?”
“잊어버렸냐?”
“......설마.”
캐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일곱 개의 죄악 : 【질투】] 집필이 끝났거든. 이왕 이곳에 온 김에 보여주러 왔는데 싫으면 말고.”
“히이이이익! 그걸 진작 말해야지! 얼른 내놔! 얼른!”
“오빠한테 내놔가 뭐냐? 아무튼 기다려 봐. 너한테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니까.”
옆을 보자 캐서린보다 더 흥분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상기되어 있는 다이애나가 있었다.
제임스 작가의 신작.
드래곤 원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추리 소설이 지금 현재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이애나와 캐서린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가장 베일에 싸여있었고,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인데 어떻게 [죄악]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유추하느라 내용을 예상한 소설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거기에 추리 소설은 과거에는 인기를 끌었을지라도 현재에는 살짝 주춤하고 있는 장르였다.
그렇기에 많은 추리 소설 매니아들은 제임스 작가가 다시 추리 소설의 붐을 이끌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마치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필력을 자랑하는 제임스다 보니 추리 소설에 대한 기대감은 풍선처럼 부풀어지고 있었다.
그 풍선 안에 공기가 아닌 꽃가루가 있어야 할 테지만.
“저, 저도 봐도 되나요?”
“어차피 수정이 전부 끝난 게 아니라서 괜찮아요. 거기에 다이애나가 어디에 표절을 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냥 공짜로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얼마를.....?”
“하하. 돈은 안받고요. 어릴 적부터 추리 소설을 집필하다가 실패한 적이 많아요. 그래서 품평을 부탁 드리는 거예요.”
“품평......?”
내 말에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빌에이든 미디어나 SC라스틱에 문의하면 되잖아.”
“그 둘 중 어디를 고를지 아직 명확하게 고르지 못했어. 현재 빌에이든 미디어 쪽으로 생각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정한 건 아니라 어디에 부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부탁만 했다가 실례가 될 수 있으니까. 아무튼 부탁할게.”
“지금 바로 읽어도 돼?”
“물론이지. 노트북 줘봐 USB로 가져왔으니까.”
“응!”
캐서린은 헐레벌떡 2층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