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골촌놈인 줄 알았는데 천재작가였다-130화 (129/216)

130화. 가사 (2)

수첩에 적힌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곡으로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1분에서 2분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로 짧은 글이었다.

나는 나지막이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렸다.

“[나는 널 사랑한 난쟁이......]”

널 좋아하지만 뒤에서만 널 지켜봤어.

널 사랑하지만 애써 그 마음을 삼켰어.

너한텐 그저 웃는 얼굴만 보냈어.

그래. 그저 그거면 충분하니까.

너의 웃는 얼굴, 너의 말투 하나하나가 나한테는 그저 행복이니까.

그래.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저 지켜만 볼 걸 그랬어.....]”

보면 볼수록 너와의 미래를 상상하게 됐어.

상상만으로도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널 닮은 딸을 낳아 살고 싶었어.

작은 꽃다발 하나를 들고 네 집 앞에서 널 기다렸지

차에서 내리는 널 봤어.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널 부르려는데.

너랑 같이 차에서 내리는 저 남자는.

“[그거면 충분해......]”

난 그냥 네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충분해.

그래....그거면 됐어.

그거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잖아.

그저 네 얼굴에 있는 미소만 지켜준다면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녀의 미소가 사라진다면......]”

두고 봐.

내 모든 것을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야.

나를 스토커라고 불러도 좋아, 정신병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그의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야.

그러니.

“[그녀의 미소를 항상 간직해.]”

***

제시카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마디 했다.

“와. 미친놈.”

“흠흠!”

내가 쓰긴 했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캐서린의 안타까운 얼굴과 제시카의 미친놈을 바라보는 눈빛에 더욱 부끄러워졌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이거 누구 이야기예요?”

“아. 월리라고 있어요.”

그 말에 캐서린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이야기잖아! 에일리 언니한테 차였을 때잖아! 왜 우리 오빠를 모욕해!”

“......미안.”

내가 생각해도 이건 조금 심했다.

다이애나는 캐서린의 말에 장갑을 낀 손을 입에 가져가며 나를 바라봤다.

“이거 작가님 이야기에요?”

“네.... 뭐.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예요.”

“헤에......”

다이애나는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크흠! 그냥 어릴 때 사춘기 같은 거예요. 아무튼 어땠나요?”

“좋았어요! 물론 즉흥적으로 써 내린 거라서 수정할 부분이 보이기는 했지만! 저번 [블랙 & 월드] 가사보다 더욱 가사 같았어요!”

“음...... 그렇게 말하니 뭔가 마음이 복잡해지네요.”

며칠을 생각했던 [블랙 & 월드] 가사보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제목조차 없는 가사가 더욱 좋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가사가 복잡하고 의미를 담는 것도 물론 좋아요. 하지만 귀로 듣는 만큼 간단한 가사가 더 듣기에는 편하니까요. 물론 [블랙 & 월드] 가사도 좋아요. 하지만 듣고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복잡했으니까요.”

‘즉, 지금 생각한 가사는 듣기에는 좋으나 [블랙 & 월드] 가사보다는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건가. 반대로 [블랙 & 월드]는 가사가 복잡해서 노래로 만들면 사람들이 듣기 힘들다는 거고..... 어렵네.’

쉽게 말해 그 중간을 적어야 한다는 건가?

“근데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네요? 그냥 마음을 스토리로 적는 건 소설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예전에 엘리나한테 시집을 준 적이 있었는데, 노래와 시는 소설과 다르게 짧은 글이다 보니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게 연습하라는 의도였다.

막상 내가 가사를 적어보니 시집을 읽어보는 건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짧게 적히는 하나의 스토리니까.

“생각보다.... 할 만하네요.”

“작사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다만, 뛰어난 가사를 적는 건 물론 어렵죠. 작가님은 그때 처음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그냥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거예요.”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전설이라 불리는 에드워드 선생님과의 내기였기에, 보잘것없는 가사를 적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에, 나는 가사라는 본질적인 것에 파고들지 않고 괜히 어렵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재밌네요.”

생각보다 재밌었다.

***

제시카의 소원이었던 얼음낚시는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중간에 지친 다이애나는 텐트에 들어가 찬바람을 피하며 석유난로를 쬘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한 마리도 안 잡힐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제시카는 3마리나 잡았다.

나도 한 마리를 잡았고, 캐서린과 다이애나는 잡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추워......”

정오가 지나가자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도 간이 텐트에 난로를 피웠기 때문인지 감기에 들 것 같진 않았다.

캐서린을 차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따뜻한 온기가 방안에 퍼졌다.

다른 지역이라면 모를까 몬태나같이 발전이 덜 된 곳은 아직까지 장작을 때야 하지만, 그래도 장작을 때고 나면 방이 상당히 따뜻해진다.

“물고기는 잡았냐?”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가니 아빠가 텔레비전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계셨다.

“네. 뭐..... 그나저나 선생님은 또 저녁에 오신대요?”

“그래. 이번에는 도널드 노인이 데려다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뭐 잡았냐?”

“제시카한테 다 줬어요. 어차피 씨알도 별로 좋지 않고 몇 마리 잡지도 못했거든요.”

“잘했다.”

아빠가 내미는 맥주캔을 받아들며 소파에 앉았다.

“그나저나 아빠 강아지 키우신다면서요?”

“그래. 키울 생각이다.”

“어떤 강아지요?”

“진돗개.”

“.....진돗개가 이 동네에 있어요?”

아빠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미국 내에서도 진돗개를 구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 방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슨 그 양반이 한인 협회를 도와준 적이 있는데, 감사의 의미로 진돗개 두 마리를 받았다고 하더라. 나보고 다 데려가도 된다고 해서 데려올 생각이다.”

“진돗개라...... 생각해보니 전 미국에서 진돗개를 본 적이 없네요.”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어렸을 때 교육만 잘 시키면 가축을 지키는데 진돗개만큼 좋은 개가 없다더라. 영역이 강한 녀석이니까.”

“네.....”

왠지 모르게 말하고 있는 아빠의 기분이 굉장히 들떠 보였다.

상상만 하던 강아지를 키울 생각에 기분 좋으신 것 같았다.

“그나저나 LA에서 잘 지내냐?”

“뭐..... 운동도 하고, 글도 잘 쓰고 있어요. 다만......”

“다만?”

“조금 외롭더라고요.”

그 말에 아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혼자 살면 여자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평소에 뭘 하고 지내길래 외롭냐?”

“글 쓰고, 자고, 일어나고, 운동하고 뭐..... 반복?”

“그게 끝이냐? 밖에 나가 놀거나 그런 건?”

“얼마 전에 사인회를 했죠? 그 이후에는 나간 기억이 없네요. 아. 밥 먹으러 새벽에 가끔 나가요.”

“......그 나이 먹고 청춘을 바람처럼 날려버리네. 너 그러다 후회한다?”

“후회고 뭐고 간에 일이 바쁘니까요.”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없었다.

“내가 네 나이엔...... 에휴. 아니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

아빠는 2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는 다이애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아예 나한테서 시선을 떼고 거실로 온 다이애나를 보며 말했다.

“낚시 재밌었니?”

“네! 한 마리도 못 낚았는데 그 분위기가 재밌었어요!”

낚시의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얼음 천국이었던 그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옆집에 가 있어.”

루니아와 애니가 있다 보니 엄마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그 둘을 돌봐주러 가신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애니의 절친인 팡이도 데려가지만, 현재 팡이가 회복 중인 관계로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어야 했다.

애니가 우리 집에 온다면 모를까.

“작가님은 이런 환경 속에서 글을 쓰신 건가요?”

“그렇죠? 그런데..... 솔직히 환경이 글에 영향을 그렇게까지 주는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제 기준에서요.”

내가 글을 잘 쓰는 이유를 선생님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건 아마 환경보다도 노력과 노련미라고 하셨다.

하루에 한 번 글을 쓴 것이 지금에서야 빛을 발한 거라고.

“그래도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머리가 더 잘 돌아가고 글이 더 잘 써지는 게 아닐까요? 헤헤.”

“뭐.... 그 말은 부정할 수 없겠네요. LA에 있으면 가끔 그 소음이랑 공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가 있으니까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머리가 잘 굴러가기는 하니까.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엄마가 벌써 오신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이 있는 곳으로 가니, 그곳에는 엄마와 이사벨 그리고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팡이야! 애니가 와써!”

“아. 애니도 왔네.”

“아녕하세여!”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애니는 이제 날 보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팡이 보러 와써여! 팡이야아아아아!!!!!”

요 며칠 동안 팡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애니는 힘찬 목소리로 팡이를 불렀다.

반가운 마음에 크게 불렀지만 애석하게도 팡이는 애니에게 달려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작게 이름만 불러도 달려오는 팡이였기에 애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파, 팡이야?”

팡이가 반겨주지 않자 애니는 서둘러 팡이를 찾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애, 애니야? 여기는 신발 벗고 들어가야..... 애니야!”

이사벨은 서둘러 신발을 갈아신고 애니를 뒤따라갔다.

나는 멀뚱히 서서 애니가 어질러놓은 신발장을 정리하고 있던 엄마한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팡이가 원래 하루에 한 번, 못해도 이틀에 한 번 애니랑 놀아주러 가거든? 근데 중성화 때문에 못 오니까 애니가 우울해하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어.”

내년이면 친구를 사귀러 유치원에 가겠지만, 그래도 그전까지 애니한테 친구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렇기에 팡이라는 첫 친구가 소중한 거겠지.

“도와드릴게요.”

애니의 신발에 묻어 있던 눈 때문에 질퍽해진 바닥을 닦았다.

그러자 갑자기 거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에에에에에에에에엥!!!!!

“애니가 우는데요?”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엄마는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이사벨이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애니가 집안이 떠나가랴 울자 당황스러웠다.

거실엔 애니가 팡이를 끌어안은 상태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우에에에에에!!!!! 파이가..... 파이가.....”

예전이라면 애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좋아하고 있어야 할 팡이가 무기력한 표정으로 애니의 품 안에 축 늘어져 있었다.

“팡이가 주겄어!!! 우에에에에엥!”

“아니야. 살아있어.”

왜 멀쩡한 고양이를 죽여

남성성은 죽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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