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괴도 레이븐
“우선 이게 [드래곤 마스터] 다음으로 적었던 거란 말이지...... 문제는 무엇을 모티브로 했는지 모르겠어.”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날짜별로 정리해놓는 습관이 있기에 이게 [드래곤 마스터]를 쓴 다음에 쓴 것으로 보였다.
‘기억이 안 나네......’
의적이라는 컨셉으로 정한 이유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은행에서 강도질을 한 남자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초능력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세계관에 만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릴 때 나는 판타지를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여느 아이가 그렇듯 초능력이라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초능력이라는 것을 이야기의 주재료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건 근데 히로인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어렸을 때 일찍 이성에 눈을 떴었나?
“소꿉친구에, 학교 클래스 메이트에, 옆집으로 이사 온 수수께끼 소녀에, 자주 가는 음식점의 종업원에, 첫눈에 반한 대기업 딸과 얼떨결에 구해준 공주......”
이 외에도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히로인이 있었다.
“전부 삭제하고 필요한 역할만 남겨야겠네.”
그렇게 삭제하려는 순간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스토리가 전부 히로인을 중점으로 두고 있네...... 에휴.”
소꿉친구가 빼앗긴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이후 클래스 메이트의 물건을 찾아주거나, 이사 온 수수께끼 소녀한테 의뢰를 받거나, 가난한 음식점 종업원을 도와주거나.
스토리 대부분이 히로인한테 맞춰져 있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겠는데......”
말했다시피 판타지 소설이라는 로망이 존재하고, 그런 판타지 소설에서 항상 나오는 게 위기에 처한 히로인(공주)을 구하는 주인공(용사)이었다.
[드래곤 블러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기에 아마 내 어린 시절 판타지 소설에는 그런 장면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에휴.”
아무리 로망이 있는 장르라고 해도 이렇게 히로인이 많이 나오는 건 내용적 측면에서 좋지 않았다.
“줄이고 바꾸자.”
우선 히로인을 최대한 줄여보고, 한 번만 등장하고 나오지 않을 히로인들을 제외하자.
그리고 이사 온 수수께끼 소녀같이 주인공한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할아버지나 남자로 바꿔놓자.
마치 집사처럼.
“그리고 이건 또 어떻게 손봐야 하나...... 에휴.”
가장 고민인 초능력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모든 인간이 사용하는 걸로 할지, 선택받은 자만 사용할 수 있는 걸로 해야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할지.
“그러고 보니까 거미인간도 거미에 물려 초능력을 얻었지?”
다만, 그렇게 하면 현실 세계에 왕국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진다.
물론 지구에도 아직 왕이 있는 나라는 많았다.
태국처럼 왕이 경제를 잡은 나라도 있었고, 일본처럼 그저 왕의 권위만 있는 나라도 있었다.
다만, 이 이야기 속 왕은 왕이 나라의 경제를 담당하면서도 약간 판타지스러운 그런 느낌이 들어야 했다.
도심 속에 최첨단 왕국이 있는 그런...... 쉽게 말해서 미국에 왕국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너무 어려우면 아이들이 읽기 힘들어지는데......”
스토리나 세계관이 복잡해지면 아이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사막의 제국]에서 생각했던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음......”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은 계속해서 움직였지만, 내용이 크게 바뀌고 있진 않았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계속 생각하다 결국에는 결론은 내렸다.
“이렇게 하자. 인간은 초능력을 선택할 수 있는 거야. 왕국이 만들어낸 알약을 먹으면 초능력이 생기는 거지.”
그 초능력은 인간마다 다르기에 초능력에 따라 사회적 인식이 바뀐다.
부모의 유전자가 뛰어난 아이들은 자연스레 높은 등급의 초능력을 얻고, 그렇지 못한 평민들은 중등급, 그보다 더욱 낮은 사회계층들은 초능력이 발현되지 않거나 혹은 초능력이 좋지 않거나.
“빈민..... 음. 빈민.....을 뜻하는 비속어를 ‘위드’라고 하자.”
잡초라는 뜻을 가진 위드.
사회가 그들을 얼마나 안 좋게 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주인공도 위드에 속하는 학생이고, 학교에서는 그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거야. 소꿉친구가 상급인 그러니까 귀족인 ‘포레스트’ 아이들한테서 물건을 빼앗겼는데, 그걸 되찾아 주면서 자신의 장점을 알게 되는 거지.”
스토리의 윤곽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주인공 이름도 바꾸자. 흑색 옷을 입은 괴도라는 컨셉이니 까마귀는 어떨까? 까마귀를 뜻하는 크로우..... 아니 크로가 좋겠네, 그렇게 되면 활동명은 레이븐으로 하면 되겠고.”
두 개 다 까마귀를 뜻하는 말이며, 종이 다를 뿐이다.
“약을 거부하는 자들도 있어야지. 인권단체 같은 느낌으로 말이야.”
초능력이라는 차별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도 언젠가 주인공한테 도움을 주어야 하니 초기 설정에 넣어두는 게 좋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주인공의 초능력을 바꾸자.”
본래 원작에서는 번개를 조종하는 능력인데, 문제가 있다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질려 했던 것일 수도 있지.’
능력이 무슨 왕보다 강하다 보니, 내용이 점차 긴장감이 없어지며 결국에는 연중을 선택한 것이다.
“번개는 번개인데..... 해킹? 그런 걸로 바꿀까?”
상대한테 나름 충격을 줄 수 있고, 몸에 둘러서 신체 부위까지 강화시키며 전자기기를 해킹하는 그런 능력.
“이게 더 사기 같은데......”
나는 한참을 더 생각해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접촉해야지만 발동되는 능력으로 하면 되겠네.’
-투두두둑!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푼 나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
어릴 때부터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초능력의 발현.
아빠는 성냥 같은 작은 불꽃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엄마는 부채질 정도의 바람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은 화목했다.
특히 캠핑을 갈 때면 아빠가 불을 붙이고 엄마가 바람을 일으켰기에, 항상 볼 때마다 궁합이 좋은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가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후 엄마는 나를 기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셨고, 나는 그런 엄마를 위해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에 매진하고 노력해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초능력이었다.
초능력은 군사력, 권력, 경제력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도, 초능력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유전 때문인지 정점에 서지 못했다.
미친 듯이 노력해도 기껏해야 중간 계급에 있는 아이들이나 따라잡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노리기는 어려웠다.
포기할 수밖에 없던 현실에서 어느 날 인생을 바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그거 내놔! 내 거란 말이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위드 계급의 소꿉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귀족이라 불리는 포레스트들이 소꿉친구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팬던트를 뺏은 것이다.
‘위드 주제에 너무 비싼 걸 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이건 우리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졸업하면 찾아와. 그때 줄게. 킥킥!’
‘내 거라고!’
론은 팔이 두 배로 늘어나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숭이처럼 두 팔을 흔들며 팬던트를 뺏으려 했지만, 상위 등급인 초능력 염동력에 미치지는 못했다.
‘흐윽......’
결국 팬던트를 가져오지 못한 론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론......’
‘크로..... 나 어떡해?’
크로는 눈앞의 광경에 가슴이 점차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친구의 울음을 보며 불합리한 세상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론.’
‘으, 응?’
‘내가 어떻게든 찾아줄게.’
‘어, 어떻게? 아, 아니야! 하지 마!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나, 나는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론의 얼굴에 크로는 괜찮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걱정하지 마.’
***
“음...... 여기서 사건을 키우자.”
본래는 캐비넷에 있어야 할 론의 펜던트가 사라지자, 크로가 귀족인 그를 찾으러 식당, 카페, 운동장 등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결국 귀족들만 산다는 포레스트 지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백분 활용하는 거지.....”
과거에서부터 노력한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남겨왔으니 그것도 활용해야지.
‘초반에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는 게 좋겠어.’
크로가 어떤 방식으로 노력했는가를 말이다.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라는 재능을 가진 크로는 확실히 어린아이들한테 좋은 영웅이었다.
소년만화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누구보다도 노력을 했으니 말이다.
“초능력만 인정받는 세계라면, 초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쓸 수 있는지도 따져야지.”
신선한 충격으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예로부터 의적이라는 건 동경의 대상이었지.’
힘이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 밀려난 자들한테 의적 혹은 괴도라는 것들은 로망의 대상이었다.
오만하고 콧대 높은 자들을 통쾌하게 한 방 먹이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게 권력의 힘으로부터 도망다니는 그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쾌감이 느껴지기 마련.
무엇보다도 의적이 훔친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면, 힘이 없는 자들은 의적의 편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니 크로는 영웅이 되어야 해.”
고작해야 몸에 전기를 흐르게 하는 능력.
접촉을 해야 상대한테도 전기를 흐르게 하는 게 다인 그런 능력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 무궁무진한 활약을 펼친다.
‘다만..... 이 경우는 오로지 상상으로만 처리해야 해.’
아이들이 읽는 건데 현실적이어선 안 된다.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혹여나 아이들이 따라 할 수 있으니, 이 부분은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기면서도 보다 화려하게 적어야 한다.
아이들이 가장 흥미진진하게 볼 부분이니까.
“이렇게 되면...... 제목도 슬슬 정해지지.”
레이븐, 크로운, 까마귀, 괴도.
까마귀처럼 칠흑의 옷을 입고 순식간에 물건을 훔치는 괴도.
[괴도 레이븐]
이 책의 제목이었다.
‘제목이 정해졌으니 슬슬 글을 써볼까?’
***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라 예상보다도 빠르게 수정이 끝이 났다.
스토리 전체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신의 한 수였는지 저녁 8시쯤 되자 1차적으로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나는 [괴도 레이븐]이라고 파일 이름을 수정한 뒤 루시아한테 메일로 전송했다.
내일 아침이면 확인해보고 전화를 주겠지.
“근데 원래 물고기는 잠을 안 자나?”
내가 몇 시간 동안 글을 쓰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던데 잠을 자긴 하는 건가 의문이 생겼다.
“끄응......”
-지끈!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있어서인지 기지개를 켜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눈앞을 어지럽혔던 현기증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저녁 8시인가......’
저녁을 배달시킬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는 습관도 기를 겸 오늘은 만들어 먹자.’
뭐. 먹을 수 있는 수준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