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휴식 (2)
안토니의 얼굴이 창백한 이유는 어제까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로가 쌓였는데 거기에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을 무서워하다 보니, 며칠 만에 또 비행기를 타게 된 안토니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병실에 안 들어온 거구나.’
어째서 에드워드 선생님이 병원에 왔을 때 안토니에 대한 이야기를 얼버무렸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가는 길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서 안토니한테 내밀었다.
고소공포증이 심해 고층 건물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워한다는 안토니는 창백해진 얼굴로 커피를 받았다.
“예, 예에......”
비행기에서 내린 뒤로 천천히 상태가 괜찮아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멀쩡해지려면 먼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받아든 안토니는 창문 밖 배경을 보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후우..... 역시 사람은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빠는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것 때문에 출장도 못 가고 미션 월드도 못 가잖아.”
다이애나의 말에 안토니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왔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높은 놀이기구가 뭐가 재밌다고......”
“아빠는 가면 맨날 회전목마만 타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뭘 또 바라? 무엇보다 미션 월드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구나.”
에드워드 선생님이 미션 그룹에 종사하신 분이라 그런지, 정기 무료 이용권이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어찌저찌 비행기를 타고 몇 번 가 보긴 했지만, 가서 유명한 놀이기구는 타지 못하고 회전목마만 5번 넘게 탔다고 한다.
“아. 도착했네요.”
창문 너머로 우리 동네가 보였다.
***
“저 왔어요.”
“왔냐?”
그 난리를 피우셨다고 했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도 마찬가지로 나를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기에, 나도 그냥 이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꺼내면 귀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미 손님과 같이 갈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 안 잤냐?”
아빠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잠을 안 잤다는 것을 눈치채신 것 같았다.
“네..... 뭐. 자려고 해봤는데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잠 좀 설쳤어요.”
“에잉..... 쯧쯧.”
아빠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피로감을 줄이고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라고 자취를 권유한 것인데, 거기서 기절할 때까지 글을 썼으니 당연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어차피 일어난 거 다시 말해봤자 입 아프다.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으면 됐지. 그나저나 소개 안 해 줄 거냐?”
“아. 네.”
집에서는 한국어로 말하기에 다이애나는 아빠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마자 씩씩하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이에요!”
“오랜만이구나. 이번에도 푹 쉬고 가거라.”
“네!”
다이애나의 인사가 끝나자 안토니는 아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이애나의 아빠인 안토니라고 합니다. 잠시 신세 지겠습니다.”
“체이스입니다. 편히 있다 가세요. 근데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곧 괜찮아질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집이..... 정말 놀랍군요.”
거실이 팡이를 위해 개조된 상태였기에, 이런 집을 영상으로나 보던 안토니는 놀랍다는 듯이 거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팡이는요?”
“저깄다.”
아빠는 천장 한구석을 가리켰다.
천장에 박아놓은 캣타워 집안에 팡이가 들어가 고개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이 와도 친근하게 굴었는데, 배신당한 기억이 있는 건지 약간 경계하는 느낌이 있었다.
“잘 지내요?”
“그래. 너 떠나고 며칠 더 지나니까 상태가 괜찮아졌더라. 한 번 열이 오른 적이 있어서 병원에 데려가 해열제 맞히고 왔다.”
“건강해서 다행이네요.”
아빠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토니 씨라고 했죠? 식사는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하..... 아무래도 이번 한 끼는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조금 괜찮아졌나 싶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이런..... 제임스 방 안내 좀 해주고 내려오거라.”
“네.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저번에 에드워드 선생님이 머물렀던 내 책방 겸 창고로 안토니를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내려왔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아들이 찾아와서인지 엄마는 부엌에서 맛있는 한식을 만들고 계셨다.
언제나 먹어도 맛있는 돼지갈비가 탑을 쌓을 듯이 접시에 올려져 있었다.
“와서 밥 먹어.”
“네에.”
식탁에는 돼지갈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각종 소고기 요리부터 시작해서 잡채나 전처럼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이 수두룩했다.
“우와..... 오늘 무슨 날이에요?”
“내 생일은 아닌데.....”
평소보다 과한 음식들에 다이애나도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네 몸이 허해서 쓰러진 거 아니냐? 그래서 엄마가 아침부터 준비했다.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어.”
여기 있는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엄마의 손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아빠도 이건 좀 너무 과하다고 느낀 건지 표정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도 나를 위해서 새벽부터 만들어 주셨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맛있네.’
오래간만에 먹는 집밥이라 그런지 피곤한 거치고는 음식이 술술 들어갔다.
“이제 뭐 할 거냐?”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가자 아빠가 물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방송해야 해요. 저번 주에 쉬기도 했고 혹시라도 팬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을 이해시켜주려면 Live 방송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영상을 찍었지만 아직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방송과 동시에 진행할 생각이었다.
“도와 드릴게요!”
“고마워요.”
이제 몇 번이고 혼자 해봐서 괜찮았지만 그래도 도움이 있으면 편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프렌한테서 연락이 왔었지......’
저번 주 방송을 말없이 쉬어서 그런지 프렌한테 연락이 많이 왔었다.
이번 방송은 정상적으로 진행해야지.
“잘 먹었습니다. 올라가 볼게요.”
***
보통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Live 방송을 진행하는 나였지만, 오늘은 집에 오는 데 시간이 걸렸기에 4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집에 온 피로감 때문에 그냥 방송을 쉴 수도 있었지만, SNS에 오늘 방송을 한다고 공지도 했고 무엇보다도 쌓인 오해를 푸는데 Live 방송만 한 게 없었다.
영상으로 찍었음에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음..... 오늘은 이걸로 하자.’
방송을 하기 전 나는 방에 있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해명 아닌 해명 방송이었지만 그 후론 평상시처럼 책을 추천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그 책.....”
다이애나는 내가 고른 책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코미디 책이네요?”
“아시나 보네요?”
“네. 병맛 코미디 책이잖아요. 저도 이거 읽고 한참 동안이나 웃었어요.”
“명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운 책이지만, B급 감성을 잘 살린 책이죠. 이런 책은..... 솔직히 유명해지기 쉽지 않죠.”
“그렇죠..... 작품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 거기에 B급 감성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쩝.....”
병맛 코미디 소설. 즉 웃기는 걸 주력으로 한 작품으로 내용에 객관성이나 연관성 따위를 전부 무시해 버린다.
막장에 막장으로 가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작품들도 있었고, 배신에 배신으로 전개되는 작품도 있었다.
즉, 그냥 그날 하루가 우울할 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재미는 있지만 추천한다고 보실 분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이 소설은 꽤 유명하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죠.”
B급 감성을 가진 책들 중에서도 나름 유명한 책이었다.
나는 책을 집어넣고 다시 책장을 살펴보며 결국 분홍색 표지를 가진 책을 꺼냈다.
“그건.....”
“이건 모르시죠?”
“네. 처음 보는데요?”
책을 많이 읽는 다이애나가 모르는 책이라고 하니, 이 책이면 충분할 듯싶었다.
“Live 방송 시작하죠.”
“네!”
나는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이 시작되었고, 다이애나는 조용히 화면 밖으로 나갔다.
-작가님! 저번에 봤던 집에 계시네요!
-휴식을 가지신다고 들었는데 고향 집으로 가셨나 보네요.
-작가님! 몸은 괜찮으세요?
-오늘은 무슨 방송 하실 거예요? 해명방송이라 쓰여있기는 한데 해명할 게 뭐가 있어요?
일단 시청자들이 들어올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청자들 수가 안정화되자 그제야 입을 열 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2주 동안 글만 쓰다 돌아온 제임스입니다!”
-그렇다면 저번에 안 한 시간까지 합쳐서 방송하는 건가요?
-2시간 방송?
“하하. 그건 아니고요.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으니 양해해주세요.”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쓰러졌다는 기사 때문인지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몸을 걱정해주는 채팅을 올렸다.
“우선 해명 방송이라고 하긴 했지만 대단할 건 없어요. 정장 입고 나와서 진중한 분위기로 해명하는 게 아니라, SNS에 영상을 올렸다시피 이번에 제가 기절한 건 순전히 제 잘못이라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안 믿는 녀석들도 있었지?
-아.... 그것 때문에 해명이라고 적은 거구나.
“맞아요. 저는 출판사와 제작사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히잉..... 작가님 앞으로도 건강하셔야 해요.
-건강하셔야 글을 오래 쓰죠.
-원래 노예도 막 부려 먹지 않아요. 작가님은 글 노예니까 충분한 휴식을 취하신 다음에 재밌는 글을 써주세요.
글 노예라는 어감이 참 좋지 않았다.
“하하.....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그런 의미로 집에서 열흘 정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에요. 물론 다음 주에 Live 방송도 할 생각이고 근근이 SNS로 근황을 알릴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고작 열흘 휴식하는 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나한테는 열흘이라는 휴식도 굉장히 긴 시간이라 생각하지만, 작가님들 중에서 휴식을 취하면 길게는 10년 동안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네. 괜찮아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푹 쉬고 앞으로도 더욱 재밌는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슬슬 책 추천을 시작하려는 찰나, 갑자기 요상한 채팅 하나가 올라왔다.
-작가님! 저희들이 준비한 선물 확인하셨어요?
“.....선물?”
그 채팅과 함께 선물이라 적힌 채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선물이라니요?”
-[나인 드래곤]에 들어가 보세요! 그럼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얼른요! 히히히히!
-빨리요! 빨리!
나는 시청자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책 추천은 뒤로 하고 일단 [나인 드래곤]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공지 사항에 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성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