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조립식 창고
악마가 나를 조종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은 브록스의 아픈 얼굴로 가득 찼다.
지금도 귓가에 브록스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손바닥에는 브록스의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이 잡히는 촉감이 느껴졌다.
병원에서 느껴지던 소독약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켰고, 그때 느꼈던 쩍쩍 마른 침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몸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이 나를 괴롭히며 자극시켰다.
쉴 틈 없이 글을 쓰라고, 여기서 만족할 거냐고, 너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냐고 또다시 속삭였다.
아이들이 재밌어할 책, 어쩌면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너는 여기서 만족하는 거냐고 계속해서 부추겼다.
-스윽.....
나는 조용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손가락은 Alt와 Delete 위로 뻗어지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책을 삭제하고 또 다른 완벽한 세계를 작성하기 위해서.
‘나는..... 그때......’
어째서 만족한 것일까?
기절하기 직전 나는 분명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에 만족함을 느꼈다.
몸이 지쳤기에 어쩔 수 없이 만족함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이 내 최후의 저항인 것처럼 그때의 행동, 감정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여전히 느릿하게 ‘삭제’ 버튼에 다가가던 그때.
-똑똑!
-밥 먹어라.
엄마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아. 네!”
그제야 나는 내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덜덜덜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는 손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신 차리자.’
나는 곧바로 파일을 닫고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다.
***
아침은 미국식 식단이었다.
다이애나와 안토니가 있었기에 빵과 베이컨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있었다.
나는 그릇에 시리얼을 부은 다음 식빵에 딸기잼을 바른 뒤 달걀 프라이를 얹었다.
“오늘은 뭘 할 거냐?”
몸에 구멍이 난 노란 녀석이나 좋아할 법한 월요일이지만, 어차피 나는 일이 없었기에 상관없었다.
다만, 나는 본능적으로 글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끝나고 월리 집에 다녀올까 생각 중이에요. 그 이후에는..... 아. 그러고 보니 아빠.”
“왜?”
“창고 만드실 줄 아세요?”
“무슨 창고?”
“아니 왜. 팬한테 온 편지나 선물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보관할 창고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음..... 하긴, 그게 좋긴 하겠구나. 양으로 봐선 간이 창고는 안 될 것 같으니 만들 생각이냐?”
“네. 저희 집만 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고..... 곡식 저장창고는 너무 크고, 그냥 아빠가 생각 좀 해봐 주세요.”
“자재 구매는?”
“제가 부담해야죠. 그 전에 고모부한테 남는 자재가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와야겠네요.”
“음. 아마 자재를 줄 수 없을 거다. 차라리 조립식 창고는 어떠냐?”
“네?”
“조립식 창고 중에서 크게 나온 것들도 있다더구나. 다이애나랑 월리네에 갔다가 마트 가서 확인하고 와봐라. 월리도 요즘 할 게 없다고 하니 데려와서 짓게 해.”
“자리는요?”
“집 뒤편에 정리해 놓은 곳이 있는데..... 쯧. 닭장 놓으려 했는데 무리겠네. 거기 써라.”
“그럼 닭장은요?”
“다른 곳을 알아봐야지. 에잉.....”
슬슬 가축을 더 기를 준비를 하고 계신 아빠는 찜해놓은 자리가 사라지려고 하자 기분이 좀 언짢으신 듯했다.
그래도 창고같이 거대한 게 집 앞 정원에 있으면 외관상 좋지 않다 보니 집 뒤에 놓는 게 여러모로 좋기는 했다.
“닭장도 사 올까요?”
“돈 아깝게 왜 사? 자재가 남아 있는데.”
아무래도 고모부한테 남아있는 자재는 아빠가 쓰실 생각이신가 보다.
“철조망이나 사와. 그리고 올 때 팡이 간식 좀 사 와라. 브랜드는 알지?”
“네. 알겠어요.”
나는 식빵을 베어 물었다.
***
차를 타고 월리의 집으로 향했다.
월리의 집은 여전했고, 집에 도착하니 월리가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있었다.
시험이 끝났다 보니 할 일이 없어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야!”
차 창문을 내리고 월리를 부르니, 에어로 눈을 치우던 월리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뭐야? 또 왔냐?”
“응. 할 게 없으니까. 그보다 너 눈 치우고 또 뭐 할 거 있어?”
“딱히? 그냥 게임이나 하려고 하는데?”
“잘됐네. 할 거 없으면 우리 집 조립식 창고 만드는 거나 좀 도와줘.”
“조립식 창고? 그게 지금 집에 있어?”
“아니, 사러 가야지.”
“너 그거 못 들고 올걸?”
“무거워?”
“당연히 우리 둘이선 절대 못 들지. 배송시켜야 할걸?”
“흐음..... 그럼 차를 바꿔와야 하나?”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건 아빠한테 선물해준 포드 차량이었다.
월리 말에 따르면 조립식 창고의 크기가 상당하다 보니 트럭을 끌고 가야 한다는 것 같았다.
“네 아빠 차 끌고 가도 되냐?”
“물어보고 올게. 근데 드는 건?”
“차에서 해체해서 부품 하나씩 옮겨야지. 실어주는 건 그쪽 직원에서 도와주겠지.”
“아빠 차는 일단 허락을 구해봐야 하는데..... 일단 주차하고 들어와.”
차를 주차하고 월리한테 다가갔다.
“아주머니는?”
“일.”
“아저씨는?”
“일.”
“두 분 다 일 가셨어?”
“엉. 지금 집에 캐서린밖에 없어. 불러줄까?”
“됐어. 그냥 내버려 둬.”
“웬일이야? 항상 올 때마다 찾았잖아?”
“글 쓰는 데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애초에 캐서린 보려고 온 것도 딱히 아니고.”
그냥 나 멀쩡하다고 월리 집에 인사차 온 것이었고, 아침에 갑작스럽게 생각난 창고 때문에 월리를 데리러 온 것뿐이었다.
그렇게 거실로 들어가니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상태로 오이를 얼굴에 붙이고 있는 캐서린이 있었다.
“응?”
“어?”
“너 여기서 뭐 하냐?”
“뭐, 뭐야? 왜 둘이 같이 들어와?”
얼굴에 붙어있던 오이 한 조각을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던 캐서린은 당황한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니, 너 글 쓴다고 눈 치우는 거 나 혼자 하라며?”
“글 다 썼으니까 내려왔지! 그보다 누가 들어오는 거면 말을 하라고!”
“이년 정신이 미처 돌아가나 보네.”
혼자서 눈을 치운 월리와 갑작스럽게 우리가 들어오는 걸 막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캐서린은 역시나 한참이나 싸웠다.
다이애나는 안절부절못했지만, 나는 익숙한 듯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 음료 두 개를 꺼내 식탁에 앉았다.
“아, 안 말리셔도 돼요?”
“사이좋은 녀석들이라 괜찮아요. 곧 진정될 거예요. 그보다 이거 한잔하세요.”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게 식탁에 앉아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예상대로 그들의 싸움은 3분도 가지 않았다.
“.....후우. 그보다 왜 왔어?”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캐서린은 나를 바라봤다.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월리 데리러 왔지.”
“뭐야..... 난 또 내 소식 들어서 온 건 줄 알았네.”
“소식? 뭔 일 있어?”
“으흥! 곧 있으면 2권이 발매되거든!”
“아. 그래..... 수고해라.”
캐서린이 쓰고 있는 글이 과연 몇 권까지 나올지 모르겠지만, 2권이 나온 것만으로 기뻐하는 캐서린을 보자 곧 지옥문이 열릴 것임을 암시할 수 있었다.
물론 한 권을 끝내놓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더없이 따뜻하겠지만, 그것이 고작 한 걸음일 뿐, 앞으로의 상황을 보면 절망으로 바뀌겠지.
“그보다 너 쓰러졌다며?”
“너가 뭐냐? 오빠한테.”
“아무튼! 왜 쓰러진 거야? 정말 빌에이든 미디어가 글 쓰라고 강제로 굴렸어?”
“.....너구나? 그 루머를 믿는 신봉자가.”
“응?”
캐서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됐어. 아무튼 그런 일 아니야. 몸도 괜찮아졌으니까 그만 지껄이고 너도 함께 가자.”
“어딜 가는데?”
“조립식 창고 사러. 만드는 것도 오늘 할 거야.”
“으엑..... 엄청 힘들겠다.”
“너. 살쪘다며? 이런 걸로 다이어트 해야지.”
캐서린은 슬쩍 자신의 배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끝나고 맛있는 거 사 줄게.”
“어차피 채소만 먹을 건데 뭘. 아무튼 얼른 가자! 서둘러 하면 금방 끝내겠지!”
그 말과 동시에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아빠랑 전화통화를 하던 월리가 우리한테 다가왔다.
“써도 된대.”
“그럼 가자. 가지고 온 차는 여기 놓고 가야겠네.”
음료를 입으로 탈탈 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간이 창고가 기껏해야 청소도구나 겨우 넣는 수준의 크기라면, 조립식 창고는 하나같이 크기가 상당했다.
그중 최고로 큰 간이 창고 같은 경우는 확실히 내가 원하는 수준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가격도 자재를 구입해서 만드는 것보다 저렴했기에 나름 괜찮았다.
조립식 창고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빠가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에 차곡차곡 조립을 시작했다.
안토니는 일을 하고 있고, 아빠와 엄마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팡이를 데리고 고모부 집에 간 것 같았다.
4명이서 만드는 거지만, 힘쓰는 일은 나하고 월리 두 명이 주로 하고 자잘한 건 다이애나하고 캐서린이 도맡아 했다.
아무리 조립식, 간편식 창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만들다 보니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겨울이라 빨리 저무는 것도 있었지만 오전부터 시작했던 창고 만들기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후우......”
창고 만들기가 끝나고 나는 푹 젖어버린 옷을 말리기 위해 입고 있던 파카를 벗었다.
월리 또한 힘들었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옷을 벗었다.
“고기 사줘.”
“알았어. 그 전에 일부터 모두 끝내자.”
“.....아직도 남았냐?”
“그럼 이게 끝이겠냐?”
우리가 앉아 있자 주방에서 캐서린이 따뜻한 율무차를 타왔다.
한인 마트에서 구매했는데 맛이 괜찮아서 추운 날에 커피 대신 마시고 있었다.
월리도 마음에 드는지 두 손으로 율무차를 꼭 쥐며 추위에 맞섰다.
“남은 게 뭔데? 나 배고파.”
“이제 창고를 채워야지.”
“그것도 너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야?”
“혼자 하면 오래 걸리잖아.”
“.....에휴.”
월리는 차가운 공기에 순식간에 식어버린 율무차를 원샷으로 마시고 일어났다.
“얼른 하자. 뭔데?”
“팬레터.”
“팬레터....? 그럼 고작 그거 저장하려고 이걸 산 거야? 이 큰걸?”
“응. 근데 너도 막상 보면 그런 말 안 나올걸?”
궁금한 표정으로 월리는 내 뒤를 따라 내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월리뿐만 아니라 캐서린과 다이애나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여있는 상자들에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 팬레터라고?”
“그렇다니까? 일단 이것 말고도 더 있으니까 얼른 옮기자.”
“.....더 있다고?”
“빈방에도 더 있고, 고모부 집에도 더 있어. 참. 숫자 표시해놨으니까 차례대로 넣어줘.”
“숫자는 왜?”
“차례대로 읽어봐야지.. 아무튼 빨리 옮기자.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쏠게.”
월리와 캐서린은 코 꿰었다는 표정으로 할 수 없이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