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사람은 성장한다
오전에는 닭장을 만드는 걸 도왔다.
기능성 닭장이라고 해서 살짝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내 예상보다 크게 만들어졌다.
손재주가 좋은 아빠와 고모부, 그리고 나 또한 그럭저럭 손재주가 좋다 보니 금방 만들 수 있었다.
거기에 일을 거의 끝낸 안토니가 옆에서 거들어줘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전 내내 닭장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고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에일리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물론 에일리의 집에 가기 전에 대형마트에 들러 장난감과 소고기를 잔뜩 사느라 시간이 더 늦어졌지만 말이다.
‘미역국이라.....’
엄마는 에일리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소고기를 꺼내 미역국을 잔뜩 끓여주셨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솔직히 소고기가 들어간 스프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에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나는 에일리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한 다음 가지고 온 선물들을 전부 꺼냈다.
-띵동!
초인종을 울리고 잠시 후 예전에 봤던 루카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군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나를 맞이하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아. 여기 선물이에요. 에일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어요.”
저번에 왔을 때처럼 소고기를 선물로 건네자 루카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거.....”
커다란 보온병을 본 루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한국에서는 출산한 여성한테 이 스프를 먹입니다. 산모한테 좋다고 하더라고요. 에일리한테 먹여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내가 주는 선물을 기분 좋은 미소로 받아들며 나를 집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에일리를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앉아계시지요.”
“네.”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아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품에 아이를 안은 에일리가 내려왔다.
‘몸이.....’
목소리 상태로 봤을 땐 굉장히 건강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에일리의 얼굴 상태는 수척하기 그지없었다.
“왔어?”
“응.”
“고기는?”
“사 왔지. 나 가면 해 먹어. 비싼 부위로만 사 왔으니까.”
에일리는 아이를 조심히 안고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힘들어 보이네...”
그 말에 에일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웃음 안에 지금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전부 담겨있는 것 같았다.
“힘들어?”
“그럼..... 당연히 힘들지.”
에일리는 한 번 입이 열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뱉어내고 싶은 사람처럼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홀로 감당해야 했던 부담감,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았다는 우울함 또한 가감 없이 내보였다.
하지만 아이가 잠든 얼굴을 보면 행복했고, 또 한편으로는 불행했다고 한다.
아빠가 없는 아이가 과연 어엿하게 자랄 수 있을지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딴 녀석이 아빠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하루종일 우는 아이가 미웠고, 하루종일 자는 아이가 천사 같았다.
나는 가만히 옆에서 에일리의 불평불만을 들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미안. 집에 오고 나서 나만 말한 것 같네.”
“상관없어. 나도 좋은 정보를 얻고 가는 건데.”
딱히 인터뷰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에일리가 말한 것들에 내가 필요한 해답이 있을지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아이 좀 봐도 될까?”
“물론이지. 아이 안을 줄 알아?”
“음....”
에일리는 피식 웃음 지으며 아이를 안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물쭈물대다가 에일리가 건네주는 아이를 드디어 안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아이한테는 실례지만 튼실한 여자아이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갓난아이라 무척 가벼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아기의 무게라기보다는 생명의 무게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건강하고, 생기 있으면서도 고요한 생명체가 내 손에서 생명이라는 무게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이 건강한 아이의 몸에 해를 끼칠 것 같았다.
‘이 자세가 맞나?’
안고 있는 자세에서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동상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 딱딱한 내 모습에 에일리는 피식 웃으며 다시 아이를 데려갔다.
“뭐야? 보고 싶다면서? 그렇게 굳어져서 볼 수나 있겠어?”
“하하.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정도론 아이한테 충격도 안 가는데, 뭘. 그보다 그 miyeoggug? 그거 먹어봐도 돼?”
“아. 물론이지.”
그 말에 뒤에서 우리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루카스가 내가 건넨 보온병을 가지고 왔다.
보온병에서 흘러나오는 미역국의 담백한 냄새에 에일리는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버렸다.
‘생명의 무게인가......’
고작 4kg도 안 되는 작은 아이.
오늘 내가 사간 소고기보다도 가벼운 아이한테서 만근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던 그런 아이가 에일리의 품에서 곤히 자고 있으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저 아이도 자라겠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도 갓난아기일 때가 있었고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흘러가는 세월은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노인으로 성장한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그런 시간을 살아가며 이 작은 아이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지 궁금해졌다.
정작 나 역시 2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성장한다.....라.’
그 과정은 힘들 것이다.
다만, 이겨낼 것이라 믿어야 한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를 떠나야 하기 마련이니 그 과정을 홀로 이겨내야 할 것이다.
‘.....야. 악마.’
에일리가 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까지 나한테 악몽을 선사해주었던 악마를 속으로 나지막이 불렀다.
물론 내가 조현병은 아니었기에 그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로에 의한 환청일 수도 있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홀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읽어야 할 책을 빨리 출판하라고 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건 브록스의 얼굴이었다.
그 아이가 죽기 전에 나는 최대한 많은 글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드래곤 마스터] 같은 경우는 이미 완결까지 내용이 정해져 있었기에 그 내용을 옮기기만 한다면 일단 책은 완결이 날 것이다.
‘그걸 브록스가 원할까?’
물론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혼자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아니, 브록스는 원하지 않을 거야.’
그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글을 빨리 출판하는 건 좋아, 네가 강제로 완벽한 세계로 만들고 싶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말이야.’
아직까지도 눈앞에 힘없는 브록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브록스와 만났던 모든 감각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새로운 시대가 아닐까?’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라고 유치한 말을 중얼거리지만, 브록스와 지금 태어난 아기의 나이는 13년 정도의 차이였다.
같은 세기를 살아가지만 시대가 다르다면 다른 시대.
“그래......”
내 글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니 다음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글을 적으라고 나 자신 스스로 압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은 비단 처음이 아니었다.
[일곱 개의 죄악 : 【질투】]를 적을 때 나는 맨정신으로 글을 풀어나갔다.
여러 단계의 수정을 거치며 마지막으로 다이애나의 조언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글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의 글자도 쓸모없지 않았고, 단 하나의 문단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
글이라는 것 자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듯이 나는 처음으로 [일곱 개의 죄악 : 【질투】]를 보고 이건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완벽하니까.
‘이건.... 악몽이 아니야.’
모든 인간이든 성장한다.
나도 성장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단계 성장할 것이다.
‘내 몸은 성장을 원하고 있다. 나는 그에 맞는 답을 가지고 있어.’
글을 쓴다.
보다 더욱 완벽한 세계가 아닌, 보다 더욱 성장한 세계를 창조한다.
“에일리.”
“왜?”
생각이 정리된 나는 앞에 있는 커피를 들어 올렸다.
“미역국 맛있었지?”
“응. 맛있더라. 자극적이지도 않고..... 또 만들어 먹고 싶네.”
“하하. 레시피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많이 나올 거야.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너라면 쉽게 만들 수 있겠지.”
들고 있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린 커피는 향기만을 간직한 채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커피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경련이 일고 있었다.
몸이 글을 쓰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거절했을 신호였지만 오늘의 나는 기분 좋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커피 잘 마셨어.”
빈 커피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궁금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딸 이름이 뭐야?”
에일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지금 궁금해하는 거야?”
피식 웃음 지은 에일리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Ann(앤)”
히브리어로 ‘은혜’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느 때처럼 평범하고 평탄했다.
“왔냐?”
“네. 밥은 드셨어요?”
큰 깨달음이 찾아온 직후임에도 나는 평소와 똑같았다.
“아직 안 먹었다. 엄마가 밥하고 있으니 씻고 내려와라.”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더니..... 킁킁. 오늘은 닭갈비인가 봐요.”
매우면서도 담백한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배가 고파졌다.
식사 시간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나는 위로 올라가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왔다.
거실로 내려오니 안토니와 아빠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엄마를 도와준다고 주방에 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아빠의 옆에 앉아 안토니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벼룩시장이 열리지?’
내일 열릴 벼룩시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닭을 사고 필요한 나머지 물품을 사려는 모양이었다.
안토니도 벼룩시장은 처음인지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어? 언제 왔냐?”
“방금이요.”
아빤 대화에 집중하느라 내가 옆에 온 걸 지금에서야 안 것 같았다.
안토니는 소파 옆에서 멀뚱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하하. 다행입니다.”
기뻐하는 안토니를 보며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때로는 작은 사건이 큰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내 꼴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