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악의
홀로 떨어진 세상에 버려진다면 어느 느낌일까.
티아가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분명 공항에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비행기에 내리고 공항에 들어갔음에도 아무도 없으니 무서웠을 것이다.
왜 남자가 3명이 모으면 군대 이야기로 술안주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던 우리는 서둘러 티아 앞으로 달려갔고, 그제야 티아는 안심하며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한바탕 해프닝이 지나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저기 무서운 검둥이 아저씨가 월리야. 내 친구인데 그냥 편하게 월리 아저씨라고 해.”
“야! 너하고 나하고 동갑인데 무슨 아저씨야!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캐서린하고 안 닮아서 참 다행이네.”
“아, 안녕하세요, 월리 오빠.”
“그래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만 해, 그리고 제임스가 못살게 굴면 내가 혼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놈이 미쳤나.’
그런데 왜 내 지인들은 전부 월리랑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내 성격이 그렇게 모지나?
무엇보다도 월리의 흐뭇한 표정을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야. 운전이나 똑바로 해.”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뭔 상관이야? 아. 티아야 저기 봐봐 순록이 뛰어다닌다.”
“어디, 어디요?”
“하하하. 저쪽에 뛰어다니잖아. 아. 춥지 않니? 코코아 마실레?”
‘......미친놈.’
여동생한테 시달리고 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처음 보는 월리의 자상한 모습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아빠와 엄마한테 인사를 드리려 하였지만, 역시나 아빠와 엄마는 내가 아닌 티아를 반겨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티, 티아라고 해요! 작가님한테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공손이 허리를 숙이는 동양식 인사를 하는 티아의 모습에 아빠와 엄마는 정말 오래간만에 흐뭇하게 웃음 지으셨다.
“그래 반갑구나.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렴.”
“네!”
“어머나..... 만일 제임스가 못살게 굴면 아줌마한테 말하렴. 내가 혼내줄 테니까. 어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울까..... 애니도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야 할 텐데. 달달한 유자차 있는데 마시겠니?”
“가, 감사히 마실게요!”
“어쩜.....! 소파에 앉아있으렴.”
“......”
엄마의 아빠의 차가운 모습에 나는 한쪽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는 팡이를 바라봤다.
“팡이야......”
-냐앙?
팡이는 내 말에 그루밍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냐아아앙~
오래간만에 나를 보자 팡이는 기쁜 듯이 나한테 다가왔다.
“흑..... 너만 나를 반겨주는구나.”
그렇게 다가오는 팡이를 끌어안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냐아아앙-!!!
하지만 팡이는 내 손길을 거부하며 ‘저리 꺼져!’라고 소리친 뒤 티아한테 다가갔다.
‘.....재롱아 보고 싶다.’
지금은 아리아나가 돌봐주고 있겠지?
“너는 왜 여기에 서 있니? 얼른 옷 갈아입고 오렴. 티아는 갈아입을 옷 가져왔니?”
엄마의 말에 팡이를 쓰다듬고 있던 티아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를 바라봤다.
“네, 네! 가져왔어요!”
“우리 집은 온돌식으로 만들어져서 따뜻할 거야. 그래도 옷은 갈아입고 오는 게 좋겠다. 용일아 티아 방 좀 안내해주고 오렴.”
“네에.”
나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티아를 2층으로 데려갔다.
“작가님은 언제까지 집에 계실 거예요?”
“그리 오래는 못 있지? 다음 주 화요일? 월요일? 아마 그때쯤에 돌아가야 할 거야. 해외 일정도 있으니까.”
“해외 일정.....?”
“팬미팅이지 뭐. 아무래도 좀 오래 다니다 올 것 같기도 해. 거기에 공모전도 있으니까.”
“공모전.....”
그 말에 티아는 흥분된다는 듯이 콧바람을 뀌었다.
“저, 저도 공모전에 참여할 거예요!”
“너도? 소설로 참여하려는 거야?”
“네! 그리고 코스프레도요!”
“코스프레?”
몇 개를 참여해도 상관없었기에 뭘 해도 상관없지만
“그건 반칙 아니야?”
이미 엘리시아 역에 당첨된 티아였기에,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할 것이다.
“아, 아니에요! 엘리시아 역할은 안 할 거예요!”
“그럼?”
“링링이요!”
“......링링?”
링링이라고 하면 [사막의 제국]에 나오는 툰툰을 속인 사막여우다.
도둑 여우? 사기꾼 여우? 아무튼 그런 포지션을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 툰툰의 진심을 알고 동료가 되는 포지션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동물이잖아?”
“네! 그래서 귀하고 꼬리를 달고, 복장만 똑같이 할 생각이에요! 엄마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직접 만들어주신대요!”
‘......어머니.’
내가 보기에는 그냥 귀여운 딸아이가 평소에는 그런 복장을 싫어하니, 이번 기회에 귀엽기 입히시려는 어머니의 계획 같았다.
그게 나중에 흑역사가 될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티아가 조금 불쌍해졌다.
***
티아의 방문을 환영하는 이들은 굉장히 많았다.
옷을 갈아입히고 아빠의 말에 주변을 구경시켜주라는 말에 고모부네 집으로 향했다.
“제임스가 괴롭히면 아저씨한테 말하렴, 트럭으로 밀어서 돼지 사료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티아를 보자마자 고모부가 한 말이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제임스한테..... 제임스가 괴롭게 하면 아줌마한테 말하렴, 영원히 닭 농장에서 못 나오게 해줄 테니까.”
고모는 나를 무슨 악질 취급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못미더운 성격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 것 같았다.
살짝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가 아니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냥 참기로 했다.
그래도 이사벨의 반응은 달랐다.
“이 애가 엘리시아 역할이야?”
“응.”
“이렇게 내성적인 아이가? 나는 반대야! 엘리시아는 어린 나이인데도 천재성에 못 이겨 도도한 역할이어야 한다고!”
“얌마. 그래도 티아가 몇만 분의 일을 뚫고 합격한 얘야. 연기할 때는 다르니까 걱정하지 마.”
아마도.
나도 본 적이 없으니까 뭐라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빠 제자라니? 내가 글 쓰는 법 가르쳐 달라고 할때는 안 가르쳐줬잖아!”
“너는 소설의 내용도 알려달라고 하잖아? 그리고 그만 떠들어 루니아 깰라.”
“이크!”
지금 루니아는 이사벨의 품에서 곤히 잠들고 있었다.
방금 시끄러운 상황에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와.....”
아직 신생아나 다름없는 루니아를 보자 티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 만져봐도 돼요?”
“응. 상관없어. 근데 깨지 않게 조심해줘.”
“네, 네에.”
티아는 조심스레 이사벨이 안고 있는 루니아를 바라봤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볼을 살짝 찔러본 티아는 곧장 손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사벨의 말대로 아이가 깨지 않기 위함이었다.
“애니는 자고 있으니까. 엄마하고 아빠하고 일하느라 바쁘고 나라도 돌봐야지.”
“용돈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니고?”
“......윽.”
“너 저거 굿즈지? 굿즈에 아주 돈을 쏟아붓는구나.”
“내, 내 영혼을 팔아서 산 것들이야. 후, 후회는 없어. 히히.....”
참고로 이사벨이 구매한 굿즈는 내 작품에 나오는 것들도 있지만, MTS에 관한 굿즈들도 있었다.
MTS 굿즈는 비싸기로 유명한데, 중학생 용돈을 살려면 정말 영혼까지 탈탈 털긴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고모부 집이 농장이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거나 동물을 돌봐주면 어느 정도 용돈을 획득할 수 있기에 아예 못 사는 건 아니었다.
“애니는 유치원에 입학했어?”
“이번 연도에 입학이지 뭐. 에구 우리 애니도 이제 격한 사회생활을 하겠구나.”
“꼬맹이가 무슨..... 아무튼 이만 갈게.”
“맞다. 나 조금 있다가 맥플러리 먹으로 햄버거집 가고 싶은데, 데려가 주면 안 돼?”
“.....이 추운 날에 그거 먹으면 머리 안 아프냐?”
“뭐 어때? 티아도 있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음..... 나야 상관없지만, 티아야 어때?”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럼 조금 이따 점심밥 먹으러 가자. 메디슨 누나는?”
“자고 있어. 오자마자 피곤하다고 누웠어.”
“비행기에서 안 자니까 저렇게 되지. 아무튼 알았으니까 조금 이따가 전화해.”
“응!”
티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다시 집으로 갈까 했지만, 이왕 고모부 집까지 온 거 티아한테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동물보고 갈래?”
“동물이요?”
“뭐..... 기껏해야 말 정도지만.”
“으..... 저 말 싫어요.”
“진짜?”
보통 티아의 나이대 아이들이라면 말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티아는 질색을 했다.
“예전에 말에서 떨어진 이후로 말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음..... 하긴, 그럴 수 있지. 그럼 우리 집 구경이나 할까?”
“네! 아, 그, 그보다 저번에 썼던 릴레이 소설이요.”
“응.”
“그걸 공모전에 내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흐음......”
티아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힘이 들어간 소설이잖니? 공모전이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창작한 걸 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네에.....”
실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이해는 하는 것 같았다.
“집에 가자.”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
이번 집에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휴식 그리고 [인피니티 라이프]의 실마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마무리를 이렇게까지 고민한 적은 처음인데.....’
보통 시놉시스를 적고 글을 쓰는 나였기에 마무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고민한 적은 드물었다.
있다고 한다면 [리턴 패션 디자이너] 1권 정도일까?
그때는 얼마나 많은 절망을 주어야 더 재밌을까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떤 식으로 작은 희망을 이어줄까 고민해야만 했다.
극과 극의 상황이라 더욱 고민이 되었다.
‘몇 가지 예시는 있기는 한데.....’
에드월 홈즈가 적었던 글을 참고하며, 절망 속에 희망을 주는 법을 조금 정도는 배웠다.
다만, 말 그대로 참고일 뿐 내 소설하고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강물에 떨어지는 신은 그대로 가져가는데..... 솔직히 여기서 가장 괜찮은 건 강물에서 살아 나오는 장면이라는 거지. 근데 이건......’
[사막의 전갈] 마지막 부분하고 똑같았다.
오마쥬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강물에서 떨어지는 걸 아예 사용하지 말까?’
지끈지끈-!
머리가 복잡해지자 아파온다.
‘인간의 본질. 악의와 선의를 가지고 쓴 책이니까..... 아니, 이 경우에는 악의만을 가지고 썼다고 해야 하나?’
악의라는 말에 나는 잠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깐만..... 악의?’
나는 서둘러 아까 풀지 않고 내버려 둔 짐을 풀었다.
가방 안에는 지금까지 읽지 않고 내버려 둔 [읽어버린 악의]가 있었다.
루이 감독님한테 조언을 들은 이후 [인피니티 라이프]에 대한 것만 생각하다 보니, 지금까지 깜빡하고 있었다.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악의]라는 힌트가 제목에 적혀있으니 말이다.
‘읽어보자.’
조금 있다 이사벨한테 연락 올 것이기에 나는 가볍게 읽자는 생각을 가지며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