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디자인
본래 일요일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지인들의 친구들로 인해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화요일까지 있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던가.”
“티아는 괜찮니?”
“부모님한테 연락드려볼게요. 물론 괜찮을 거예요.”
하긴, 티아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부모님들 같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근데 어딜 가려는 게냐?”
“에일리의 집에 갔다 와야 해서요. 잠시 갔다 올게요.”
“밥은?”
“글쎄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일단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올 때 뭐 사 올까요?”
그 말에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마트 가서 산더미처럼 사 왔는데 뭐가 더 필요해? 밥 먹고 올 거면 연락이나 줘라.”
“네. 알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다.
***
집으로 돌아오고 에일리의 집에 언젠가 찾아간다고 연락은 해놨지만, 오늘 찾아간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깜빡하고 전화하지 못했음에도 에일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환영해주었다.
“어서 와.”
‘육아를 하면 지친다고 하던데..... 그것도 아닌가?’
에일리의 얼굴은 생각보다 피로가 없었고 그냥 평상시처럼 밝았다.
“오랜만이야. 오늘은 미안하지만 선물은 없어. 비즈니스로 인해 온 거니까.”
“나도 언제나 선물을 바라지 않아.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 그래서 일은 어느 정도 진척됐어?”
“아. 일단 커피 줄 테니까 들어와.”
“코코아는 없어? 커피는 집에서 마시고 와서 말이야.”
“있어. 마시멜로도 얹어줄게.”
집으로 들어가자 집 여기저기에 아이를 위한 용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앤은 지금 아빠가 데리고 나갔어.”
“데리고 나가다니?”
“일하고 공부 때문에 아빠하고 엄마가 자주 봐주거든. 쇼핑가는데 나 혼자 내버려 두면 불안하다고 데려갔어.”
“그래서 얼굴이 폈구나?”
“나보다 엄마하고 아빠가 앤을 더 잘 돌봐주시더라. 아. 일단 앉아.”
식탁에 앉자 에일리는 내가 말한 대로 코코아 안에 마시멜로 몇 개를 띄운 상태로 가져와 주었다.
“그래서 일은 어느 정도 진척됐어? 아무래도 다음 주쯤에는 이벤트 계획을 밝혀야 할 것 같거든.”
“일단 몇 가지 도안을 만들어놨어.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그 말을 하고 에일리는 방에 올라가 서류철 하나를 가지고 내려왔다.
“자 봐봐.”
서류철 안에는 여러 가지 옷 도안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하나 스스로 그렸는지 디테일이 상당했다.
“드레스도 종류가 꽤 있지만 그래도 여자아이가 입을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으니까.”
“음..... 이거 죽기 직전에 칼리아가 입었던 옷이 아니라......”
“맞아. 벤자민이 과거로 가기 전에 칼리아가 가장 좋아했었다는 드레스로 했어. 아무리 그래도 조금 비극적이잖아?”
“하긴, 이게 더 좋긴 하겠네.”
죽기 직전에 입었던 옷보다 이게 더 좋은 것 같았다.
애초에 에일리한테 도안에 대한 자유를 주었기에, [리턴 패션 디자이너] 안에 속한 칼리아의 옷이면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아직 이벤트를 알리기 전이니 수정하면 되니까.
“흐음......”
“여러 가지 색과 옷감을 넣어봤어. 그중에 프릴이 들어간 드레스가 괜찮을 것 같아서 특히 많이 만들었어.”
“프릴이라......”
“여자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드레스잖아? 공주님 드레스.”
“그렇긴 하지만...... 역시 이건 아니야.”
“응?”
칼리아가 벤자민이 만든 옷을 좋아했던 이유는 예뻐서도 있지만, 아빠가 자신을 위해 귀한 시간을 써가며 옷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프릴 드레스는 그저 여자아이라서 해준 것뿐이잖아? 소설 속에서는 벤자민이 칼리아를 위해 시간을 들여 만든 드레스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빠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며 해준 디자인이라......”
“많이 그려놓긴 했지만 미안하게도 내 마음에 드는 건 없어.”
“아니야. 그걸 생각 못 한 내 잘못도 있지 뭐. 오늘 중으로 더 생각해볼게. 너 언제 떠나는데?”
“원래 오늘 가려고 했는데..... 음. 화요일에 갈 생각이야.”
“화요일이라..... 그럼 내일까지 다시 그려놓을게.”
“아직 돌아갈 날은 미정이라서 천천히 해도 상관없어. 약간 독창적인 디자인도 상관없으니까 벤자민 고유의 디자인 같은 걸 생각해놔 줘.”
“알았어. 오늘도 밤을 새워야겠네.”
“아까도 말했지만 천천히.... 아니, 그냥 네 마음대로 해봐.”
어차피 말려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스스로가 원한 길이다 보니 굳이 내가 말리고 싶지 않았다.
“맞다. 아까 네 방송 봤는데 제자를 들였다며?”
“응. 티아라고 해. 데려올까 하다가 아무래도 이벤트에 대한 건 아직 비밀이니까 안 데려왔어.”
“앤도 그렇게 귀엽게 커야 할 텐데..... 애가 착해 보이던데 [드래곤 마스터]의 그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티아를 보는 사람들마다 그 말을 묻네? 괜찮을 거야. 총명한 아이니까.”
코코아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왔다 가네. 다음에 왔을 때 앤이 조금 컸으려나?”
“한 달 새에 그렇게까지 클 리가 없잖아? 아. 그나저나 제임스.”
“왜?”
“너 소개팅 필요하다며?”
“......잠깐만.”
그 말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캐서린이 너한테도 부탁했어?”
“응. 예전에 부탁받았어.”
‘아는 언니가 굉장히 한정적이구나.’
나는 그때 그런 쓸데없는 장난을 쳤을까.
“소개팅해볼래?”
“아니 됐어. 지금은 글에 더 집중할래.”
“아. 그러고 보니 너 올리비아랑 열애설 났었지? 그리고 다이애나였나? 그 애도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하긴 소개팅할 필요는 없겠네.”
“......”
“아무튼 내일 다시 찾아와줘.”
“알았어. 그럼 이만 갈게.”
캐서린을 원망하며 밖으로 나온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있지 않았다.
딱 비즈니스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래 걸리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배고프네요.”
왕복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리기에 집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집안에는 엄마가 만들고 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 풍겼는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켰다.
“김밥 만드세요?”
“왔니?”
“네. 근데 갑자기 웬 김밥이에요?”
“티아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많이 만들면 좋지 뭐.”
옆을 보니 티아도 맛있다는 듯이 김밥을 먹고 있었고, 아빠도 마음에 들었는지 김밥에 김치를 싸서 드시고 계셨다.
“티아도 김치 먹니?”
“네. 먹을 수 있어요. 엄마가 비건 다이어트 한다고 사 온 적이 있는데 먹어본 적이 있어요. 조금 맵긴 했지만 맛있어서 많이 먹었어요.”
“어쩜......”
왜 그런 느낌 있지 않은가?
미국인이 그것도 어린아이가 김치를 맛있게 먹어주니 뭔가 고마운 기분.
부모님이 티아를 향한 호감도가 더욱 올라간 순간이었다.
“잘라줘?”
“아뇨. 그냥 통으로 먹을게요.”
비닐장갑 하나를 꺼낸 다음 김밥을 통으로 잡아 입 안에 넣었다.
우물우물
‘맛있네.’
그렇게 김밥을 씹다 보니 문득 티아가 무언가를 적고 있는 걸 발견했다.
“글 수정 아직 다 안 했어?”
“네. 아무래도 계속 길어질 것 같아서요. 하나를 수정하니까 연달아 수정할 게 생겨서......”
“하긴, 그래도 그런 것 때문에 수정이 중요한 거야. 어차피 LA로 돌아가도 우리 집에 올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해.”
“아, 안 돼요! 공모전이 이번 주 수요일이잖아요! 엄마가 파일로 글을 옮기는 데도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러니 늦어도 오늘 안에 해놔야 해요.”
“뭐..... 그래.”
딱히 하루 정도 늦게 연재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공모전이라는 특성상 조금이라도 일찍 하여 순위를 올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보니, 그냥 뒤에 서서 티아를 응원해 주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그 둘은 오질 않네? 뭔 일 있나?”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신디와 힐다가 생각났다.
어제저녁이면 뭐라도 가져올까 했는데, 아직까지 오고 있지 않았다.
“공모전에 낼 소설은 봐주지 않겠다고 해서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은 크지만...... 내일 떠나야 하는데, 일단 고모부 집에 가보는 게 좋겠네. 밥 먹고 티아도 같이 가자.”
“네에!”
***
신디와 힐다가 바로 글을 안 가져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공모전에 출시할 작품들뿐인데, 어떻게 제임스한테 가져가겠는가.
공모전에 출시하는 소설은 형평성과 공정함을 위해 안 된다고 했다 보니, 가져갈 수 있는 게 없었다.
또한 이곳에 온 목적이 여행이기도 했고, 가지고 있는 파일이나 공책, 연필 등도 없다 보니 글을 쓰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놓치기는 아까운데.....’
평소 시놉시스를 쓴다는 작가님의 말에 따라, 루이나와 제시카한테 공책 한 권을 빌려 간단한 시놉시스 정도는 적어보았다.
공모전에 낼 수는 없지만 자신의 생각한 스토리의 재미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흘렀지만 신디와 힐다는 그렇게 빨리 새로운 스토리를 적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모든 신경이 공모전에 쏠려 있으니까...... 뭘 적을 수 있을 리가 없네.’
‘제임스 작가님의 조언을 듣고 싶은데..... 히잉.’
모든 작가들이 제임스 작가님처럼 여러 가지 소설을 연재하면서, 똑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쪽 글에 집중하는 것도 힘든데, 두 가지 글에 정신이 팔리면 글에 대한 재미가 확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스토리를 창조하는 건 그녀들한테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스토리를 만드는 건 제임스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많은 습작들을 적을 때 글을 적다 재미가 없어지거나, 흥미가 떨어지면 곧바로 글을 멈추고 다른 스토리로 적었지만, 이게 가능한 이유는 ‘갑자기’ 재밌는 스토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토리라는 건 갑작스럽게 떠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필도 아니니까.’
‘그래도 조언을 듣고 싶은데......’
공모전에 내놓을 책을 보지 않겠다는 선을 들었을 때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열리는 공모전, 거기에 그 공모전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인데 거기에 대고 뭐라 조언을 받는 건 당연히 좋지 않았다.
티아는 제자고 어리다 보니 어느 정도 조언을 받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녀들은 이미 책을 출판한 작가였다.
“제임스는 내일 간다고 하네?”
끙끙거리고 있는 그 둘 앞에 메디슨이 다가왔다.
루이나는 닭가슴살 육포를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말까지 있을 예정이야. 제시카는?”
“나는 목요일 날 가야 해.”
“전부 제각각이네. 오래 있으면 좋지만..... 나도 내일 제임스를 따라가야지 뭐.”
“응? 왜?”
“공모전 준비도 있고, 이번에 제임스가 적은 소설 계약서도 확인해야 하고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으니까.”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신디와 힐다는 아쉬워했다.
오래 있었으면 뭐라도 조언을 구했겠지만, 내일 떠나면 뭐 답이 없었다.
-벌컥.
실망해 있는 그 둘의 귓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있어?”
“아, 안녕하세요!”
제임스와 티아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