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의 안배-4화 (4/60)

4화

식사 생각이나 하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궁 안이 크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길까지 잃을 정도로 크다니…… 나는 황당함 반 경이로움 반을 섞어 가며 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에 들어섰는데, 그곳에서는 여인과 남자가 어린아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잊고 살아가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나는 결국 하나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잊으면 안 되었다.

어쩌면 나의 불행으로 인해 결국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랬기에 모두가 잊어도 나는 잊으면 안 되었다.

내 첫 번째 불행은 보육원에서 시작됐다.

나는 내가 왜 보육원에 갔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보육원에 도착하기 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준 친구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선과 악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안다.

그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혼내는 것이 잘못이 되는 것이다.

보육원 선생님들은 나를 백치라 불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나를 아주 싫어했다.

너무 아이 같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왜냐하면 아무 기억이 없는 어린 내가 아이같이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은 그들과 똑같이 나를 따돌렸다.

그때 손 내밀어 준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 역시 나와 함께 있는 날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심하게 맞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친구는 자신을 괴롭히려고 쫓아오는 아이들을 피하다 그만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가 내 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의 두 번째 불행은 입양이었다.

나를 입양한 부모님은 날 극진히 돌봐 주셨다.

나도 슬슬 아픔을 잊어 가고 있던 어느 날, 기적처럼 양부모님께 아이가 생겼다.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나를 다시 보육원에 보낼까 잠도 못 자며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 없던 집안에 아이가 생기면 입양한 애는 당연히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낸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양부모님들은 나를 보육원은 물론 그 어떤 곳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태어났다.

여자아이였다.

그렇게 계속 행복할 줄로만 알았는데 내 생일 축하 여행에서 여동생은 졸음 운전자의 차가 인도를 덮치는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감히 내가 그들의 가족이 되어서, 감히 생일 여행 같은 걸 바라서 소중한 동생이 죽었다.

나의 세 번째 불행은 성인이 되어서였다.

여동생의 죽음으로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는 내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없어 양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숙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들과 전화 통화 이외의 만남을 절대 가지지 않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걱정해 계속 찾아왔고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야 했던 나는 군인이 되었다.

한국이 아닌 세계연합군부의 군인이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사실 하는 일은 핵을 가진 나라들이 핵을 쓸 수 없도록 관리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날한시에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핵무기들이 날아올랐고 지구가 멸망해 버렸다.

내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불행이 결국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앗아 간 거였다.

그런 주제에 감히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다니…….

나는 내 불행이 저 웃는 세 사람에게 옮겨붙을까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꽃밭에 앉아 펑펑 울었다.

이렇게 못 볼 줄 알았으면 나를 찾아온 부모님 얼굴을 한 번은 볼걸. 우리 강은하,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세상을 떴을 때 부모님을 한 번만 안아 드릴걸.

내 불행에 눈이 멀어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그들이 너무 그리워서 펑펑 울었다.

위에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만큼 서럽게 통곡했다.

어느 정도 울음을 진정한 후 나는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다행히 지나가는 궁인을 만나 내 궁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돌아오고 나니 갑자기 무기력함이 덮쳐 와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누워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 황제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사람을 보내왔으나 나는 돌려보냈다.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또 옮겨 갈 수도 있으니 자신이 조심해야 했다.

황제가 화를 내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황제는 화를 내지도, 사람을 다시 보내서 곤란하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누워 있었다.

그렇게 잠이 들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귀찮음에 눈을 뜨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저녁은?”

황제였다.

내가 눈을 뜨려고 하는 그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내 시중을 들어 주던 시녀였다.

“안 드셨습니다.”

“당당하게 할 말은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되었다. 앞으로는 뭐라도 먹이거라. 봐주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네, 폐하.”

“물러가거라.”

옷깃이 사르륵하는 소리가 나더니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침도 삼키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눈을 뜰 타이밍을 놓쳤기에 매우 어색해진 모양새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익사가 아니라 아사로 자결 방법을 바꿨나?”

나는 혼잣말을 하는구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안 자는 것을 아니까 눈을 떠.”

나는 그제야 벌떡 일어났다.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건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불퉁하게 나왔다.

“별로 안 일어나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그럼 계속 모른 척하든가.

나는 정말 일어나기 싫었고 굳이 황제와 말꼬리 잡기를 하기도 싫었다.

그나마 계속 누워 있었더니 낮보다 기분이 나아졌지만, 우울감은 많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나?”

“예?”

“왜 울었는지 물어도 되냐는 말이다.”

내가 아직도 울고 있는가 싶어 눈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으나 황제가 나보다 더 빨랐다.

“눈 상한다.”

비빌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만져 보려고만 했는데 황제는 내가 눈을 비빌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냥 만져 보기만 할 겁니다. 눈물이 있나.”

“아니, 눈물은 없어.”

“그럼 왜 우냐고 물어보시는데요?”

“그냥, 운 거 같길래. 눈도 부어 있고 눈동자도 빨갛고, 펑펑 운 얼굴이길래. 누가 괴롭히기라도 했나 해서.”

“아닙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황제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화가 없는 것이 어색해 결국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식사 자리에 오지 않아서.”

“그건 미안합니다. 별로 입맛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대답 대신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직 무섭나?”

무섭냐고? 처음엔 무서웠는데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황제는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서둘러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황제가 더 빨랐다.

“안 그러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대에겐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아니라고 변명하던 것을 접고 다른 질문을 입에 올렸다.

“왜요?”

“왜냐니? 그거야 그대와 함께 살아야 하니까.”

나는 그의 말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후궁 중 그 누구와도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는 가끔 마시긴 했지만……. 그리고 또 황제는 이렇게 늦은 밤에 후궁의 침소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내 질문은 꼭 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왜요?”

이번엔 황제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니. 그대와 나는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나?”

부부. 그래 황제는 나까지 30명이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런데 나한테만 이러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황제의 후궁들이 나 빼고 다 여인임을 떠올렸다.

“폐하.”

“그래.”

“혹시 말입니다.”

“그래.”

“남자 좋아하십니까?”

황제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잠깐 멈칫하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아니.”

“그렇죠. 폐하는 여자 좋아하시는 거죠?”

“아니.”

“그럼요?”

“나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예?!”

나는 기가 막혀 큰 소리를 냈다.

남자도 여자도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 무려 후궁을 30명이나 거느린 꼴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폐하, 혹시 친구가 있으십니까?”

황제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랑 친구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대랑 친구?”

“네.”

“나는 그런 거 키우고 싶지 않은데.”

나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친구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아니면 친구인 나는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다 큰 성인이기에 친구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시군요.”

“그래.”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문득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폐하.”

“그래.”

“혹시 전쟁하십니까?”

황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지?”

“그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입단속을 시켜야겠군. 그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하고.”

“제가 후궁이라 알면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니. 그런데 별로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지. 그대는 여전히 나를 무서워하고 있지 않나.”

황제는 여전히 정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더 묻고 싶었지만 내가 알아서 무얼 하나 싶기도 했다.

전쟁을 해서 망한다고 해도……. 그래, 생각하지 말자.

“그런데 계속 계실 겁니까?”

“왜 불편한가?”

당연히 불편하지. 친구도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남자랑 붙어 있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심지어 여기는 신분제라 나는 황제가 상사처럼 느껴졌다.

편한 상사처럼……. 하지만 아무리 편한 상사라도 밤에는 불편한 법이었다.

“피곤합니다.”

“함께 자면 되지 않나?”

황제는 하늘을 하늘이라 가리키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기겁한 것은 내 쪽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황제의 후궁 신분이었으니까.

0